<colbgcolor=#0047a0> 출생 | 1885년 |
평안남도 평양시 | |
사망 | 몰년 미상 |
사망지 미상 | |
종교 | 기독교 ( 개신교) |
직업 | 독립운동가 |
상훈 |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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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 이완용 암살미수 사건에 가담한 독립운동가.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2. 생애
1885년에 평양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있다. 1903년에 그는 하와이 이민 대열에 합류하여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훗날 그에게 이완용 암살미수 사건의 참여를 요청할 이재명을 만나게 된다. 그 후 하와이에서 그는 이재명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매국노들을 처단하기로 다짐한다. 그리고 1907년 말에 이재명과 함께 귀국하게 된다. 이후 12월에 그의 고향인 평양에서 이재명과 다시 만났을 때 이재명이 비밀리에 이완용을 암살할 것을 계획하고 있으며 협력을 요청하자 김병록은 이에 응하게 된다.이후 부산 초량에서 약국을 경영하면서 시기를 기다리던 중 이재명으로부터 이완용의 살해를 암살을 실행에 옮기려 경성에 간다는 말을 서면으로 접하고 바로 암살을 실행할 결의를 하고 급히 상경하였다.[1] 그 후 1909년 11월에 박태은의 집에서 이재명 등의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매국노들을 처단하기로 계획하였다. 그는 이재명(독립운동가)등과 같이 이완용을 처단하기로 하였다. 이후 그는 권충, 단검 등을 그의 주변에 준비시키고 이완용 암살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2]
1909년 12월 20일 이완용이 22일 레오폴드 2세의 추도식에 참례하기 위하여 명동성당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동료들과 같이 암살을 준비하게 되었다. 암살을 하기로 한 당일 이재명은 암살을 준비하고 있었고 그와 이동수는 망을 보고 있었다. 이후 이완용이 추도식의 참례를 끝내고 성당을 나와 정문 앞에 대기시킨 인력거에 올라타자 이재명이 달려들어 그에게 깊은 상처를 입혔다. 이를 보고서 김병록은 거사가 성공된 줄로 착각하고서 동료들에게 소식을 전하려 갔다.[3][4]
그러나 이완용은 흉부외과 수술을 받고 죽기 직전에 간신히 살아나게 된다. 거사에 실패하게 된 김병록은 결국 일본 제국 경찰에 의해서 체포되었다. 그는 경성공소원형사부에 회부되었고 1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5] 그 후 김병록은 옥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