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길버트 뉴턴 루이스
Gilbert Newton Lewis |
|
|
|
출생 | 1875년 10월 23일 |
매사추세츠 주 웨이머스 | |
사망 | 1946년 3월 23일 (향년 70세) |
캘리포니아 주 버클리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clearfix]
1. 개요
미국의 화학자.자유에너지의 실험적 측정을 통해 열역학의 중요성을 제시했다.
전자쌍 이론을 확립시켜 공유결합을 규명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으며, 전자쌍의 공급, 수용으로 구분하는 루이스 산염기 구분을 만들어냈다. 아레니우스, 브뢴스테드-로우리, 루이스로 이어지는 고등학교 화학Ⅰ과정의 루이스가 바로 이 사람이다.
최외각에 8개의 전자가 배치된다는 옥텟 규칙을 처음으로 제창한 사람도 루이스이다.
2. 관련 업적
2.1. 루이스 구조식[1]
루이스 전자점식과 구조식이 있는데 이 둘은 결합선의 유무에 달려 있다.화합물은 입체적으로 되어있다. 하지만, 2차원의 평면상에서는 화합물의 구조를 그대로 그리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화합물들 좀 더 편리하게 그리기 위해, 루이스 구조식, Lewis 구조식을 사용하여 나타낸다.
루이스 구조를 그리려면 다음과 같은 규칙을 지켜나가며 그려야 하는데 그 규칙들은 아래와 같다.
1. 결합순으로 구성 원자를 나열한다. 이 때, 구조는 미리 알고 있거나 예측을 해야한다.
2. 전체 원자가 전자수 계산
3. 이온결합 화합물은 양이온과 음이온을 따로 표시함.
4. 결합 원자 사이에 전자 한 쌍을 배치하고, 전체 원자가 전자수가 짝수면 항상 짝으로 배치한다.
5. 외각 원소에 쌍으로 8개까지 전자를 배치한다.
6. 나머지 전자는 중심원소에 쌍으로 배치한다.
7. 중심원소가 8개 미만의 전자를 가지면 외각 원소에 배치된 전자를 가지면 외각 원소에 배당된 전자를 중심원소가 8개의 전자를 갖도록 원자 사이로 이동시켜, 다중 결합을 만든다.
8. 3주기 원소(P, S)는 8개의 이상을 전자를 가질 수 있고, B, Al 원소는 8개의 이하의 전자를 가질 수 있으며, 2주기 원소(C,N,O)는 8개 까지만 소유가 가능하다. 8개보다 적은것은 괜찮으나, 많은 것은 절대로 불가하다.
3. 생애[2]
화학자는 영혼을 잃어버릴 수는 있어도 용기를 잃어버릴 수는 없다. 만일 화학자가 지옥으로 떨어지면서 끓는 용광로의 유황냄새를 맡게 된다면, 아마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지옥의 사자여, 나에게 실험관을 주시오'라고."
- 루이스의 대중 강연 중에서.
- 루이스의 대중 강연 중에서.
3.1. 출생에서 박사까지
길버트 뉴턴 루이스(1875~1946)는 17세기 매사추세츠주에 정착한 초기 청교도의 후예였다. 그는 어린 시절을 네브래스카주에서 자연 관찰을 즐기면서 보낸 후, 잠시 네브래스카 대학에 적을 두었다가 1894년 동부의 하버드로 옮겨 본격적으로 화학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루이스는 학부와 대학원 시절 동안 지도교수인 리처드로부터 엄격한 훈련을 받으며 열역학을 비롯한 이론, 능숙한 실험기법, 그리고 아이디어를 통제할 수 있는 절제력 등을 몸에 익혔다. 박사학위를 취득한 루이스는 일 년 동안 독일의 대학에서 연수를 마친 뒤 모교의 강사가 되었으나, 연구실적 미비로 파면되었다. 그 후 필리핀으로 건너가 그곳의 표준연구소에서 1년을 보냈다.3.2. 교수가 되어
1905년 루이스는 미국으로 돌아와 MIT 화학과 교수가 되었다. 여기서 그의 일생에 큰 영향을 미친 또 한 명의 선생을 만났는데, 바로 A A 노이스였다. 노이스는 물리화학의 대가였던 괴팅겐대학의 빌헬름 오스트발트의 제자로 후배인 루이스와 더불어 20세기 초 미국 물리화학계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루이스는 MIT에 있었던 7년 동안 노이스와 함께 열역학을 화학 평형 상태에 적용하는 문제를 비롯해 전해질, 산성문제 등을 함께 토론하고 연구하며 많은 학문적 성과를 이뤘다.1912년 루이스는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 캠퍼스 화학과 학과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1946년 사망할 때까지 무려 34년간 그는 연구실을 지키면서, 화학결합이론을 비롯한 수많은 선구적인 연구업적을 쌓는 동시에 다음 세대 화학자를 많이 키웠다. 세계의 과학자들은 루이스를 미국 화학의 아버지로 칭송한다. 화학 발전에 기여한 업적도 대단하지만, 무엇보다도 루이스는 훌륭한 제자를 많이 키워냈고, 버클리 캠퍼스를 세계 화학연구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비록 자신은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지 못했지만, 그의 제자 중 다섯 명이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H C 유레이(1934), W F 지아우크(1949), G T 시보그(1951), W F 리비(1960), M 캘빈(1961)
루이스는 학생들이 기본 원리를 제대로 학습하게 하려고 실험실습과 연습문제풀이를 특히 강조했다. 이 두 가지는 화학교육의 중요한 교육 방법으로 자리잡게 된다. 루이스는 학생 스스로 연습문제를 만들어 직접 푸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대학원생을 선발할 때도 얼마나 화학지식을 많이 알고 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과학자로서의 자질이 뛰어난가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런 루이스에게 약점이 있었다면 바로 어리석음을 참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루이스 앞에서 코멘트를 할 때에는 항상 조심해야만 했다. 그는 바보 같은 코멘트나 잘못된 정보를 결코 그냥 넘기지 않았다.
루이스가 학과장이 된 이후 버클리 화학과의 놀랄 만한 성공은 그가 부임한 이듬해인 1913년부터 1937년까지 24년 동안 신임 교수가 모두 버클리 출신이었다는 사실로도 증명이 된다. 이는 학문적 동종교배를 꺼리는 미국대학 풍토에서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는데, 당시 버클리 화학과가 최고라는 자신감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3.3. 사망
1946년 3월 23일 토요일 오후, 루이스는 지난 30여 년간 매일 같이 드나들던 실험실에서 액체수소 시안화물의 전도상수와 온도와의 관계에 대한 실험을 하다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병원으로 옮기던 중 사망했다.이런 그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인해 자살이라는 그럴듯한 루머도 존재한다. 그 이유는 특유의 모난 성격으로 인해 무려 41회 노벨화학상에 노미네이트 되었으나 번번이 수상에 실패하고, 오히려 그의 제자들과 자신의 라이벌이었던 랑뮈어, 그리고 본인보다 못 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날선 비판을 가했던 이들이 줄줄이 수상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그가 제창한 옥텟 규칙(옥텟 규칙이라는 이름은 랑뮈어가 명명한 것이다.)의 경우 21세기 현재의 시선으로 보면 정육면체의 각 꼭짓점에 전자를 모두 위치시키고 그 꼭짓점의 전자를 공유한다는 다분히 인위적인 룰이긴 하더라도 boron chemistry 등이 발전되지 않았던 당시에는 상황을 잘 설명할 수 있었다. 다만 당시에는 허무맹랑한 소리로 받아들여졌고, 이를 랑뮈어가 발전시키면서 원자가전자 이론이 되면서 주목받지만 그 주목의 대상은 랑뮈어에게 돌아갔다. 실제로 우리나라 또한 루이스의 전자점식에 대해서는 말하지만 옥텟 규칙이 루이스의 연구결과임을 얘기하는 경우는 찾기 어렵다.
하여튼 루이스 산염기 이론과 옥텟규칙, 전자배치, 열역학 등 그의 발견들은 분명 노벨상을 받기에 충분하나(화학 교과서에서 가장 이름이 많이 등장하는 인물은 분명 루이스일 것이다.) 모난 인간관계가 모두 망쳤다고 볼 수 있다. 그와 평생에 척을 진 네른스트와 랑뮈어, 아레니우스 등은 그를 전혀 좋게 평가하지 않았고 그런 그들이 학계와 노벨상위원회에 미친 영향은 노벨상 수상 초창기에 매우 거대했기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사망 당일 점심에 랑뮈어와 버클리에서 식사를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본인의 커리어에 대한 상당한 낙담으로 인해 자살했다는 설이 대두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실제 사인이 심장마비인 만큼 어디까지나 루머이지만, 그의 41회나 되는 노벨상 노미네이트와 수상 실패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학계에 몸담고자 한다면 원만한 인간관계는 필수적이다. 특히 연구자들 중엔 성격적으로 모난 이들이 상당히 많은데,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이들은 교수직을 지원할 때 레퍼첵에서 상당한 비판을 듣고 임용에 실패하곤 한다. 여하튼 루이스의 사례는 정말 좋은 반면교사의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