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 행주 기씨[1] |
출생 | 1870년 |
황해도
수안군 천곡방 두대동 (현 황해북도 수안군 용현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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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미상 |
상훈 | 대통령표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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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70년 황해도 수안군 천곡방 두대동(현 황해북도 수안군 용현리)에서 아버지 기혁원(奇赫元, 1851 ~ ?)과 어머니 평창 이씨(1844 ~ ?) 이중락(李重洛)의 딸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나주 정씨(羅州 鄭氏, 1872 ~ ?) 정원일(鄭元一)의 딸과 결혼하여 슬하에 기윤규(奇允奎, 1897. 10. 6 ~ ?), 기은규(奇恩奎, 1902. 2. 21 ~ ?), 기영규(奇榮奎) 등 세 명의 아들을 두었다.그는 1919년 3월 10일 고향인 천곡면 대정리 두대동 기독교회에서 신도 80명이 앞선 3월 3일 수안군 내 천도교인들의 주도로 이뤄진 만세시위에 동조하며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전개하자, 이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었다.
이후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형을 선고받은 그는, 1919년 6월 26일 고등법원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상고가 기각되면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의 행적 및 사망년월일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2006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1]
낭장공 26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