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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앞면〉 辛亥年七月中記. 乎獲居臣, 上祖名意富比垝, 其児多加利足尼, 其児名弖已加利獲居, 其児名多加披次獲居, 其児名多沙鬼獲居, 其児名半弖比.
신해년 7월에 적노라. 오와케 오미(ヲワケ臣)의[1] 시조는 이름이 오오히코(オホヒコ)[2]라. 그 아들은 이름이 타카리스쿠네(タカリスクネ)이며 그 아들은 이름이 데요카리와케(テヨカリワケ)[3]이며 그 아들은 이름이 다카하시와케(タカハシワケ)[4]이며 그 아들은 이름이 다사키와케(タサキワケ)[5]이며 그 아들은 이름이 하테히(ハテヒ)[6]라.
〈뒷면〉 其児名加差披余, 其児名乎獲居臣, 世々為杖刀人首, 奉事来至今. 獲加多支鹵大王寺在斯鬼宮時, 吾左治天下, 令作此百練利刀, 記吾奉事根原也.
그 아들의 이름은 가사하요(カサハヨ)이며[7], 그 아들의 이름이 오와케 오미이니, 대대로 장도인(杖刀人)들을[8] 이끌며 봉사해 온 것이 지금에 이르렀다. 와카타케루 대왕(ワカタケル大王)[9]을 섬기며[10] 시키궁(斯鬼宮)에 있을 적에, 나는 천하를 통치하는 것을 보좌하고 백 번 제련한 날카로운 칼을 만들도록 하였으니, 내 섬겨온 근원을 쓰노라.
신해년 7월에 적노라. 오와케 오미(ヲワケ臣)의[1] 시조는 이름이 오오히코(オホヒコ)[2]라. 그 아들은 이름이 타카리스쿠네(タカリスクネ)이며 그 아들은 이름이 데요카리와케(テヨカリワケ)[3]이며 그 아들은 이름이 다카하시와케(タカハシワケ)[4]이며 그 아들은 이름이 다사키와케(タサキワケ)[5]이며 그 아들은 이름이 하테히(ハテヒ)[6]라.
〈뒷면〉 其児名加差披余, 其児名乎獲居臣, 世々為杖刀人首, 奉事来至今. 獲加多支鹵大王寺在斯鬼宮時, 吾左治天下, 令作此百練利刀, 記吾奉事根原也.
그 아들의 이름은 가사하요(カサハヨ)이며[7], 그 아들의 이름이 오와케 오미이니, 대대로 장도인(杖刀人)들을[8] 이끌며 봉사해 온 것이 지금에 이르렀다. 와카타케루 대왕(ワカタケル大王)[9]을 섬기며[10] 시키궁(斯鬼宮)에 있을 적에, 나는 천하를 통치하는 것을 보좌하고 백 번 제련한 날카로운 칼을 만들도록 하였으니, 내 섬겨온 근원을 쓰노라.
금착명철검(金錯銘鐵劍)은 1968년 일본 이나리야마 고분에서 출토된 철검으로 이나리야마 철검(稲荷山鉄剣), 혹은 이나리야마 고분 출토 철검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금착이란 금상감기법을 의미하는 것이다. 제작 연대는 서기 471년 혹은 531년으로 추정된다.
2. 설명
육안으로 해독하기 어려울 정도로 녹이 슬어 있지만, 1978년 엑스선과 감마선 투과 실험을 통해 총 115개 문자가 쓰여 있음을 밝혀냈다. 명문을 상감한 금은 은과의 합금으로 밝혀졌으며 그 내용은 이나리야마 고분의 피장자인 오와케라는 유력자가 자신의 족보와 철검을 만들게 된 계기를 쓴 것이다.오와케는 유랴쿠 덴노 치세의 인물로 그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다. 이나리야마 고분은 당대 정치적 중심지가 아닌 사이타마에 조성되었으므로, 오와케는 중앙 귀족 출신으로서 동쪽 접경 지역에 파견되어 현지에서 죽었다고 보는 입장과 사이타마 일대를 본래 통치하고 있던 지역 세력 출신이라 보는 입장으로 나뉘어 있다.
오와케의 시조로 언급된 오오히코는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고겐 덴노의 큰아들로 기록된 오오히코노미코토(大彦命/大毘古命)라는 설이 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오오히코노미코토는 부황인 고겐 덴노로부터 장군으로 임명되어 호쿠리쿠(北陸道)로 파견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사이타마와 멀지 않다. 이 설을 따르는 경우 오와케 역시 오오히코를 시조로 둔 성씨인 아베씨(倍臣)의 일원으로, 명문에 적힌 '장도인의 수장(杖刀人首)'이라는 칭호 또한 아베씨가 맡았던 벼슬인 하세츠카베(杖部)의 전신으로 비정할 수 있다.
한편 오와케의 증조부 다사키와케의 경우 한국과의 연관성이 지적된다. 백제 지명에서 성(城)을 뜻하는 어휘로 '기(己/只)'가 있었음을 고려하여, 다사키와케의 이름을 경상남도 하동군의 삼국시대 지명인 다사성(多沙城)과 연관짓는 학설이 일찍이 제기된 바 있다(Murayama & Miller 1979). 다른 이름들과 달리 다사키와케의 아들 하테히와 손자 가사하요의 이름에는 히코, 스쿠네, 와케와 같은 일본식 칭호가 붙지 않았다는 점 역시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다사키와케가 왜국에서 한반도 남부로 건너가 아들과 손자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대가야의 용병으로 활약했으리라 추측하기도 한다.
금착명철검은 1983년 이나리야마 고분에서 출토된 다른 부장품들과 함께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었다.
[1]
오미(臣)는 야마토 왕조로부터 받은 성이다. 상대 일본어로는 wowakë ömî.
[2]
상대 일본어로는 öpöpîkô.
[3]
상대 일본어로는 teyökariwakë.
[4]
상대 일본어로는 takapasiwakë.
[5]
상대 일본어로는 tasakïwakë.
[6]
상대 일본어로는 paⁿdepî.
[7]
상대 일본어로는 kasapaye.
[8]
장도인(杖刀人)의 해석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칼잡이(刀を杖つく人)라는 해석이며, 다른 하나는 장도(杖刀)를 잡은 사람이라는 해석이다. 어느 쪽이든 대왕의 친위대 정도로 해석된다.
[9]
명문의 와카타케루(獲加多支鹵)는
유랴쿠 덴노의 이름인 오오하츠세 와카타케루(大泊瀬幼武)와 일치하므로 같은 인물임이 거의 확실하다. 상대 일본어로는 wakatakêru.
[10]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의 《수수께끼의 칠지도: 5세기의 동아시아와 일본(1983)》에서 제시한 해석으로, 원문의 사(寺)를 절이 아니라 봉사의 사(事)로 교정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