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곽임대(郭臨大) |
이명 | 곽임대( 郭林大), 곽태종(郭泰鍾) |
생몰 | 1885년 9월 9일 ~ 1973년 11월 24일 # |
출생지 | 황해도 은율군 은율면 남천리 |
사망지 | 서울특별시 |
매장지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1] |
추서 | 건국훈장 애국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곽임대는 1885년 9월 9일 황해도 은율군 은율면 남천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황해도 신천군 동부 2리로 이주한 뒤 평양 숭실전문학교에서 공부했으며 자신의 처가 집안의 유명인사인 안창호와 처조카 안중근과 교류하며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이후 1909년 신천 신성학교 교사로 근무했으나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고, 1912년 9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데라우치 마사타케 조선 총독 모살 미수 혐의로 징역 7년을 선고받았지만 1913년 10월 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그러나 신성학교 교사에서 면직된 그는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했다.1913년 초 상하이로 망명한 그는 1913년 4월 상하이를 떠나 하화이로 이주했고, 1913년 10월 21일 안창호가 주도하는 흥사단에 가입했다. 1920년 2월에는 캘리포니아주 윌로스지방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과 김종림이 한인비행사양성소를 설립할 때 참여했으며, 학생들을 통솔, 감독하는 연습생감독의 직책을 맡았다. 그러나 한인비행사양성소는 설립 후 1년만에 재정 악화로 폐교되었고, 그는 1920년 12월에 켄터키 사립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이론을 수학했다. 1927년 1월에는 흥사단 미주위원부 이사부장에 선임되어 등사판의 <흥사단보> 간행을 주관했다.
1944년 10월 28일, 미주와 하와이 각지에 있던 13개의 한인단체 대표가 회동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외교위원부 개조안 발표에 대한 대책회의를 개최하여 임시정부의 개조안을 통과시켰다. 이때 곽임대도 이 회의에 참석하여 김원용(金元容) 등과 함께 대표원(代表員)으로 선출되어 활동했다. 그 후 미국에서 조용히 지내던 그는 1970년 6월 17일 한국으로 귀환해 서울에서 말년을 보내다 1973년 11월 24일에 사망했다.
귀국 후 집필한 회고록은 못잊어 화려강산이라는 제목으로 1974년 출간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곽임대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5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딸 곽영선 역시 십대의 나이에 3.1 운동에 뛰어든 독립운동가였으며,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1]
곽태종이란 이명으로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