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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5fa1><colcolor=#fff> 고미영 Ko Mi-You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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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67년 7월 3일 |
대한민국 전라북도 부안군 | |
사망 | 2009년 7월 11일[1] (향년 42세) |
파키스탄 히말라야산맥 낭가파르바트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160cm, 50kg |
학력 |
청주대학교 (
중어중문학 /
학사) 상명대학교 대학원 ( 체육학 / 석사) |
등반경력 |
히말라야 8,000m 11좌 등정 세계 7대륙 최고봉 3좌 등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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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여성 산악인. 오은선과 더불어 한국 여성 산악계의 양대산맥이었으며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국내 여성 산악인 최초로 8,000m급 봉우리 연속 3개를 등정하는 기록을 세웠다.
산악인으로 더 알려졌지만 실제 활동해 온 기간이나 더 뚜렷한 업적을 남긴 분야는 클라이밍이다. 김자인 선수 이전에 클라이밍계에서 가장 유명했던 여성 클라이머였으며, 후원을 맡았던 코오롱스포츠는 사후 그의 업적을 기리는 뜻에서 고미영컵 청소년스포츠클라이밍 대회를 매년 개최해 클라이머 양성에 힘쓰고 있다.
2. 생애
2.1. 클라이머로의 삶
고등학교 졸업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다. 고교 졸업 후 곧바로 농림수산부 공무원에 임용되어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클라이밍이나 등반과는 전혀 관계없는 삶을 살다가, 89년 우연한 기회로 등산하게 된 북한산에서의 첫 산행이 산악인으로서의 첫 걸음이었다. 가볍게 오른 산행이었지만 등산 중간에 나타난 갈림길에서 남들이 자주 다니는 안정적인 백운대 대신 거칠고 가파른 만경대능선을 택하였다. 등반을 마친 후에는 실내 암벽 등반장을 찾음으로써 클라이머로의 시작을 알렸다. 9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대한민국은 클라이밍의 불모지나 다름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등반장에 가서 연습하고 책도 사서 보고 조언도 들어가며 배웠다. 당시만 해도 70kg이 넘는 몸무게에 160cm의 단신이었기에 남자들이 대부분이었던 클라이밍 장에서 자신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도 없었던 덕택에 클라이밍에만 몰두 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이후 끊임없는 연습과 노력끝에 체중도 20kg 감량하고 코오롱 등산학교도 수료하면서 점점 이름을 알려갔다. 각고의 노력 끝에 처음으로 출전한 93년 국내 클라이밍 대회에서 6위를 기록하였고 2년 뒤에는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5~6년 전만해도 평범한 공무원이었던 한 여성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애초에 타고난 재능이 있었고 클라이밍에 대한 사랑이 엄청났다고 할 수 있다. 이후 95년부터 03년까지 전국등반선수권대회 여자부를 9연패로 휩쓸었고 클라이머로 활동했던 시기에는 적수가 없던 국내 최고의 여성 클라이머였다. 아시아무대에서도 95년부터 04년까지 10년간 6회의 우승과 4회의 준우승을 하는 최강자 중에 한 명이었다. 세계무대에선 우승기록은 없었으나 손꼽을만한 탑랭커 중에 한 명이었다. 세계 랭킹 5~6위의 성적을 기록하였는데, 남성 클라이머의 세계도 불모지에 가까운 한국에서 여성 클라이머가 세계 랭킹 5위권의 최강자가 나타났으니 그야말로 놀랄일이었다.
만 30살이 되어서야 공직생활을 그만두었는데, 만 23살에 클라이밍 세계에 입문했다는 점과 그 이후로도 공직생활과 클라이머로서의 생활을 병행하면서 국내와 아시아를 제패했던 점을 보았을 때 조금만 더 이른 시기에 공직생활을 접었더라면[2] 세계도 제패했었을지 모른다. 워낙 불모지였던 한국에 태어난 그 자체가 짐이 된 케이스. 2002년부터는 아이스클라이밍이라는 조금 다른 분야에 도전해서도 역시 세계선수권 4위, 월드컵 5위 등의 성적을 기록하였다.
2.2. 알피니스트로의 삶
이후 38살이 된 2005년 클라이머가 아닌 알피니스트로 전향하였다. 체력적인 문제도 있었고[3] 클라이머보다는 엄홍길, 박영석등으로 대변되는 알피니스트들이 좀 더 대중에게 친숙하고 인기를 누리는 시기여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타고난 재능은 어디가지 않았는지 2005년 파키스탄의 드리피카를 오르고(6,447m) 한국 나이로 40살이 되던 시기인 2006년 8,000미터 14좌 중 가장 쉬운 난이도[4]인 중국의 초오유를 등반하며 14좌 등반의 첫 시작을 알렸다.한국 산악계 최대의 사건 중 하나인 여성 14좌 완등 경쟁의 서막이 열렸다. 다만 이 때 당시만 해도 나이도 많았고 여성 알피니스트로의 시작은 알렸지만 산악계에서도 본인도 뭔가 큰 기대를 걸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본인 스스로도 그 당시엔 14좌 정복에 대한 욕심은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문제는 이 당시 여성으로써 14좌를 모두 정복한 사람이 전 세계에 없었고 클라이머로 보여준 그녀의 신체적 재능이 매우 뛰어났고 노력하는 자세나 끈기가 보통 수준이 아니었던 탓에 그녀가 강사로 속해있던 코오롱 등산학교의 운영 주체였던 코오롱 스포츠가 그녀의 스폰서로 나서면서 일이 커지기 시작했다. 코오롱의 전격적인 지원이 더 강화되면서 2007년엔 단숨에 14좌 중 세개인 에베레스트, 브로드피크, 시샤팡마를 등정해버린 것이다. 알피니스트로 전향한지 2년 밖에 안된 상태에서 14좌중 3좌 등정을 1년만에 이뤄낸 대단한 업적이었다. 이때부터 언론에서도 슬슬 여성 최초 14좌 완등에 대한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고 본인 또한 크게 부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당시 또 다른 유명한 한국의 여성 산악인이었던 오은선에게 붙은 스폰서였던 블랙야크에게 고미영은 위협적인 존재였다. 오은선 또한 한국 등산계에서 꽤나 이름 떨치던 선수였고 특히 2001년부터 꾸준히 14좌를 정복하고 있던 이탈리아의 에두르네 파사반[5]만 제치면 오은선을 여성 최초의 14좌 완등자로 만들 수 있었을꺼라 기대했던 블랙야크에게는 갑자기 튀어나와 엄청난 페이스로 등반하는 고미영의 존재는 겁낼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어느 누구든 세계 최초 여성 14좌 등반자로 소개된다면 이로 인해 보는 홍보효과가 막대할 것이고 이 홍보효과를 누리지 못하면 그야말로 아웃도어 브랜드의 경쟁력에서 밀린 탓에 출혈경쟁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때부터는 단순히 오은선 대 고미영이 아니라 오은선/ 블랙야크 vs. 고미영/ 코오롱의 대결 양상이 되어갔다. 고산 등반이라는 것은 동네 뒷산 오르는 것과 달리 어마어마한 비용[6]이 들고 오은선과 고미영 또한 프로 산악인으로 각 회사에서 엄청난 임금[7]을 받는 처지였고 14좌를 먼저 등반할 경우, 본인 개인과 회사들이 누리는 영예나 경제적 효과가 어마어마할 것이기 때문에 이때부터 출혈 경쟁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고미영의 경우는 알피니스트 전향한 지 만 3년이 되던 해인 2008년에 로체, K2(산), 마나슬루를 오름으로 2년간 14좌 중 6개를 정복하는 성과를 냈다. 오은선 또한 2008년에만 마칼루, 로체 , 브로드피크, 마나슬루를 올라서 고미영보다 한 좌를 더 많이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그 전에 오은선이 올랐던 가셔브룸이나 시샤팡마, 에베레스트의 경우 거의 9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이뤄낸 것이었다. 그런 페이스로 달려오던 산악인이 1년에 4개를 올랐으니 이는 완전한 오버페이스였다.
2009년에도 이 무한 경쟁은 꾸준히 이어졌다. 오은선은 다울라기리, 가셔브룸1봉, 낭가파르바트, 논란의 칸첸중가 네 봉우리를 올랐고 고미영은 2009년 마칼루, 칸첸중가, 다울라기리를 오르고 마지막엔 낭가파르바트에 도전했다. 하지만 고미영이 낭가 파르바트에서 내려오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자 이 끝도 없는 무한 경쟁은 비극으로 끝나버렸다. 오은선이 고미영 사망 다음 해인 2010년에 마지막으로 14좌 중 최종보스인 안나푸르나를 오름으로 이 경쟁의 마침표를 찍었지만 고미영의 죽음과 칸첸중가의 등반여부 논란으로 이미 의미는 퇴색될대로 된 상태였다.
2.3. 안타까운 마지막
등반가로서도 발군의 활약을 펼쳤던 그녀는 2009년 7월 11일, 히말라야산맥의 낭가파르바트 산 등정에 성공하고 하산 하던 중, 안타깝게도 캠프2 부근지점에서 로프가 없는 지점을 지나다[8] 절벽 아래로 떨어져 실족사하였다. 향년 42세. 1,000m 이상을 떨어졌으며 중간에 튀어나와 있던 바위에 머리를 부딪혔다고 한다. 실제로 발견 당시 머리 쪽 손상이 굉장히 심했고 피도 상당히 많이 흘린 상태였다.그나마 시신 수습이라도 바로 가능했던 것도 기적에 가까운 일로, 저 정도 고도의 설산에서 추락하면 수색작업도 실패하고 실종 상태로 사망인정 수순을 밟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등산 중 사망한 국내 등산가들 대다수는 계속 실종 상태거나, 수년에서 수십 년 이후에야 시신이 발견되고, 그나마도 데리고 내려올 수 없어 산에 그대로 매장되기도 했다. 고미영 대장의 경우 헬기를 동원해 간신히 발견되었고 함께 갔던 동료 대원들이 목숨을 걸고 해발 5,300m 지점의 가파른 절벽을 오르내리며 시신을 수습해와 고국에서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에게 체육훈장 맹호장을 추서하였고, 대한산악연맹과 그녀의 고향인 부안군에서는 고인을 애도하며 부안스포츠파크에 '고미영 동상'을 세웠다. 2012년에 대한산악연맹 50주년을 기념하여 선정한 '산악계를 빛낸 50인'에도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고인은 상명대학교 일반대학원 체육학과에 진학 중이었는데, 자신의 뒤를 이을 후학을 양성하기 위한 진학이었다고 한다. 또한, 고산 14개봉을 모두 정복하고, 자신의 등정이야기를 책으로 써내는 것을 계획하였으나, 안타까운 죽음으로 인해 이 책은 영영 출간되지 못하게 되었다.
3.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 매거진S: 만년설에 사그라진 불꽃, 고미영 #
* KBS 오감실험: 히말라야 14좌의 꿈 - 고미영, 낭가파르바트에 잠들다
[1]
추락 당시 추정시간이 22시 30분이었다. 그녀가 1000m 이상 추락을 했음에도 1시간 30분 이상을 생존했다면 사망일이 7월 12일이 되는 거지만 7월 12일 아침에 헬기 발견 당시 사망한 것으로 보여 언제 사망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참고로 시신수습은 날씨 악화로 인해 7월 16일에 진행되었다.
[2]
클라이머로서의 삶이 불안정했기 때문에 방법이 없었다.
[3]
한국의 세계적인 여성 클라이머인
김자인 선수도 32살인 도쿄올림픽에 출전하여 메달을 따는 것이 목표고 체력적인 문제로 잘할 수 있을지를 걱정하는 만큼 고미영의 당시 나이는 클라이머로 최정상을 누리기에는 조금 시기가 지났었다.
[4]
프로 산악인 기준이다.
[5]
논란중인 오은선과 달리 확실하게 14좌를 올랐고 오은선의 칸첸중가 등반여부를 거짓이라고 하는 쪽에서는 파사반을 여성 최초의 14좌 등반자로 꼽고 있다.
[6]
베이스캠프를 차리는 비용도 어마어마하지만 거기까지 필요한 장비들을 운반하는 비용, 네팔 정부에서 어마어마하게 챙기는 입산료 등등 한 두푼이 드는 게 아니다. 우리나라처럼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스폰을 붙지 않는 이상 개개인이 하는 것은 굉장히 힘들다.
[7]
임원급의 연봉 및 성과금
[8]
심지어 그 로프가 없는 구간이 겨우 5m밖에 안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