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15대 국왕
선조 | 宣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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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초대 태황
선조 건원제 | 宣祖 建元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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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효태황 宣祖□□□□□□□□□□□□□□□孝太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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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호 | 선조(宣祖) | ||
존호 | □□□□□□□□(□□□□□□□□) | ||
시호 |
□□□□□□□효태황 (□□□□□□□孝太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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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595년 | ||
조선 한성부 경복궁 자선당 | |||
즉위 | 1626년 | ||
조선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D] | |||
사망 | 1650년 | ||
대한 한성부 경복궁 강녕전[D] | |||
능묘 | □릉(□陵) | ||
절일 | □□절(□□節) | ||
재위 | 조선 왕세손 | ||
??[3] ~
1608년 (음력 ?? ~ 1608년 11월 1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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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세자 | |||
1608년 ~
1626년 (음력 1608년 11월 17일 ~ 162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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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국왕 | |||
1626년 ~ 1632년 | |||
대한 태황 | |||
1632년 ~ 1650년 | |||
연호 | 건원(建元)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 전주(全州) | |
휘 | 연(瑌) | ||
전호 | □□전(□□殿) | ||
부모 | 부황 경조, 모후 김씨 | ||
부인 | 정후, 계후, 원빈 등 | }}}}}}}}} |
1. 개요
명군이 되어보세!의 등장인물.조선의 왕이었다 명나라 멸망 이후 할아버지 장조와 아버지 경종의 뜻을 이어 칭제건원하여 대한 태황(大韓太皇)을 자처하였고, 건원(建元)의 연호를 사용하여 명나라 홍무제 이후 일세일원제 전통에 따라 건원제가 되었다.
묘호는 선조(宣祖)이다.
2. 작중 행적
세자 이성의 장남이자 원손. 8살에 천자문을 떼고 산학과 라틴어를 배우는 등 조기교육을 받는다. 재석이 이뻐해주고 있다. 재석은 단종 신원 문제는 자신은 물론 세자도 건드리기 어려울 테니 세손부터 밑작업을 해야 한다고 판단, 수시로 언질을 주고 있다.이연은 단종과 같은 원손-세손-세자-국왕 루트를 탈 예정으로 그야말로 절대적인 정통성을 가지게 된다. 아버지 이성은 문종과 달리 건강하고, 장조 승하 시점에서 이연도 이미 14세를 넘겨 단종과 달리 어린 나이에 즉위해 찬탈당할 가능성도 전무하다. 감히 이의를 걸 수 없는 정통성과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물려준 왕권으로 단종 복위는 어렵지 않게 이룰 수 있어 보인다.[4]
명이 망해가는 시절에 즉위하여 경조의 사망과 가뭄을 핑계로 명을 돕기 위해 출병하지 않았고 명이 망하도록 방치했다. 그리고 명이 멸망한 후 1632년 국명을 '대한(大韓)'으로, 황제의 칭호는 태황(太皇)으로 칭제건원했다. 처음 제정한 연호는 건원(建元).[5]
내달인 후궁 원빈을 들였으나 사이에서 자식을 보지는 않았다. 쓸 수 있는 기술이라면 뭐든지 써서 돈을 벌어들여 백성들을 먹여살려야 한다는 실용주의적 애민정신을 바탕으로 증기기관 사용을 활성화하고 수출주도형 경제를 만들고 노비제를 축소하는 등 대한의 경제를 크게 발전시킨 업적이 있다.
옥좌에 흑백곰 가죽을 깔고 앉았다고 한다. 1650년 55세로 사망했다. 작중 이재석이 빙의하지 않은 왕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그 행보 또한 꽤나 파격적이다. 물론 그중 몇 개는 장조의 유훈을 따른 거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도 꽤 된다.
명을 구하지 않았고, 노비제를 유명무실한 수준으로 축소시켰고, 견서사 파견을 중단하고 증기기관 비밀유지 원칙을 깨고, 노산군을 단종으로 복권시켰으며, 무종이 배향한 박서, 안우, 김득배, 이방실을 무묘에서 제외하고 박위, 이지란,[6] 배극렴, 최무선을 배향했다.
세종대왕께서 남기신 국시로 인한 불문율을 깨고 본관은 다르지만 같은 이씨인 이순신의 증손녀를 태자비로 간택했다. 원 역사 조선은 세자빈으로 10~14세의 소녀를 간택했으므로 열조와 진성태황태후의 연배를 보면 진성태황태후는 열조 즉위 이전에 태자비로 간택된 것으로 추정된다.
두 명의 중전에게서 3명의 적자를 보았으나, 정비 소생 장남과 차남은 요절하고 칭제 직후 첫 황후가 요절하면서 들인 계후에게 3남 연가제 이전을 얻었다.
사후 저승세계를 다룬 외전에서 자신의 조부였던 장조가 자기 손자에게 빙의했단 사실을 알고 많이 당혹스러워한다.
3. 기타
원 역사 인조(1595년생)와 동갑이고 재위기간이 인조와 대체로 비슷한 등 원 역사의 인조 포지션이다. 인조 희망편 같은 느낌인 듯.본작에서는 인조가 태어나기 전에 하성군(원 역사 선조) 일가가 멸족당하면서 아예 태어나지 않았지만, 가족관계를 비교하면 건원제는 인조의 11촌 조카가 된다.
- 원 역사 인조 : 성종-중종-덕흥대원군-선조-정원군-인조
- 본작 선조 : 성종-진성대군(중종)-창녕군-은성군-장조-경종-건원제
계후를 후궁 자리에서 황후로 승격시킨 것인지 원 역사의 장렬왕후처럼 새로 간택한 것인지는 불명이다.
작중에서 두 황후의 시호가 아예 언급되지 않는 인물이다. 아버지 경조의 처가 원 역사 인조의 정후인 인렬왕후의 시호를 사용하고 있는데, 건원제의 황후가 둘이라는 설정을 고려하면 원 역사 정원군의 정실인 인헌왕후를 오류 낸 것이고 이쪽이 인렬황후-장렬황후일 가능성이 있다.
설정상 연조 연가제와 39세 차이가 나서 연가제의 재위기간이 원 역사 효종과 현종을 합친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나이는 현종에 더 가깝다. 이 때문에 1부와 2부 사이 역사 변동으로 1대가 더 벌어지면서(원 역사: 성종-연산군&중종-인종&명종-선조/본작 : 성종-무종(연산군)-인종-명종-장조(양자)) 1대 더 내려갔었는데, 연가제가 조손뻘 수준으로 늦게 태어나면서 항렬이 같아진다. 그러다 3부와 4부 사이에서 다시 1대가 더 벌어지면서 1대 더 내려갔다.
[D]
[D]
[3]
1605년 이전.
[4]
실제 역사에서 단종을 복위한 숙종 역시 2대 독자이자 적자-적자로서 막강한 정통성을 배경으로 가지고 있었다. 효종 사후에 태어나서 왕세손 자리는 못 있었지만.
[5]
신라
법흥왕~
진흥왕 재위 초반의 연호로 작중 연호들은 삼국시대 연호에서 따왔다. 연가제는 고구려, 건복제는 신라.
[6]
그런데 태조의 측근 이지란이 별다른 이유 언급도 없이 무종이 처음 무묘를 만들었을 때 배향되지 않은 것은 매우 어색하다. 작가가 실수로 넣지 않았다가 뒤늦게 이지란을 떠올린 듯 하다. 아니면 이미
종묘에 태조의 배향공신으로 배향되어 있어 무묘 초기에는 중복해서 배향하지 않았다고 설정했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