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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제/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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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 가족 관계
연호 강희
능묘 경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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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선대 가계3. 효성인황후 소생4. 효소인황후 소생5. 효의인황후 소생6. 효공인황후(강희 4비) 소생7. 각혜황귀비 소생8. 돈이황귀비 소생9. 경민황귀비 소생10. 온희귀비 소생11. 혜비(강희 4비) 소생12. 의비 (강희 4비) 소생13. 영비(강희 4비) 소생14. 양비 소생15. 성비 소생16. 순의밀비 소생17. 순유근비 소생18. 정비 소생19. 통빈 소생20. 양빈 소생21. 희빈 소생22. 목빈 소생23. 포귀인 소생24. 귀인 곽락라씨 소생25. 귀인 원씨 소생

1. 개요

강희제의 가족관계에 대해 서술한 문서.

강희제는 황후 4명[1]을 비롯하여 60여명의 후궁을 두었으나, 황후들은 모두 요절하여 강희제는 30대 중반 이후 황후 없이 생활해야 했다. 황후 대신 효의인황후의 동생인 각혜황귀비를 귀비로 삼아 6궁을 통솔하게 하였다.

특기할만한 사항이 있는데, 강희제의 자녀 항렬부터 여느 한인들처럼 이름에다 돌림자를 쓰기 시작했다. 원래는 첫 아들부터 '승(承)'자 돌림을 썼지만 그렇게 이름을 지은 첫 세 아들이 모조리 요절해버리는게 마음에 걸렸는지 작위를 받은 황장자 인티(胤禔 允禔, 윤제)부터의 윤(胤)자 돌림을 쓰기 시작했다. 이 돌림자는 옹정제가 즉위한 후 싹다 동음이자인 允으로 바뀌었다.[2] 그래도 옹정제는 자기 기준에서 이현친왕 인샹(胤祥, 윤상)같은 착한 형제들 중, 극히 일부에게 특명으로 사후에나마 胤자를 돌려주기도 했다.

비의 나열은 위패 서열 순이다.

2. 선대 가계

성조 강희인황제 세조 순치장황제 태종 홍타이지
효장문황후 보르지기트씨
효강장황후 동가씨 동도뢰(佟圖賴)
각라씨

3. 효성인황후 소생

황후 효성인황후 혁사리씨(孝誠仁皇后 赫舍里氏), 1653~1674[3]
자녀 차남 이름 승호(承祜) 1669~1672
7남(황2자) 이름 이밀친왕 윤잉(理密親王 胤礽)[4] 1674~1724

4. 효소인황후 소생

계황후 효소인황후 뉴호록씨(孝昭仁皇后 鈕祜祿氏), 1659~1678
온희귀비의 언니이다.

5. 효의인황후 소생

2계황후 효의인황후 동가씨(孝懿仁皇后 佟佳氏), 1656~1689 [5]
자녀 8녀 이름 이름 불명[6] 1683

6. 효공인황후(강희 4비) 소생

추존황후 효공인황후 우야씨(孝恭仁皇后 烏雅氏), 1660~1723
자녀 11남(황4자) 이름 세종 헌황제 윤진(世宗 憲皇帝) 1678~1735
황후 효성헌황후 니오후루씨(孝聖憲皇后 鈕祜祿氏) 1692~1777
자녀 장남 이름 고종 순황제 홍력(高宗 純皇帝) 1711~1799
14남(황6자) 이름 고산패자(固山貝子)[7]윤조(允祚) 1680~1685
23남(황14자) 이름 순근군왕 윤제(恂勤郡王 允禵)[8] 1688~1755
7녀 이름 이름 불명 1682
9녀(5공주) 이름 고륜온헌공주(固倫溫憲公主)[9] 1683~1702
12녀 이름 이름 불명 1686~1697

7. 각혜황귀비 소생

효의인황후의 여동생으로 슬하에 자녀는 없으며 항목 참조.

온희귀비 사후 내명부를 관리하며 황후 역할을 했다. 강희제 중기까지 청나라의 후궁품계가 제대로 정리되지 못해, 정식으로 책봉받지 못한 후궁들이 있었는데 각혜황귀비도 그 중 한명이었다. 1701년 귀비가 되었으며[10] 강희제 사후 옹정제가 아버지의 후궁을 높인다는 의미로 황고황귀비로 승급하였으며 이후 건륭제 대에 황조수기황귀태비로 존숭하였다.

8. 돈이황귀비 소생

2황귀비 돈이황귀비 과이가씨(敦怡皇貴妃 瓜爾佳氏)[11], 1683~1768
자녀 18녀 이름 이름 불명 1701

9. 경민황귀비 소생

3황귀비 경민황귀비 장가씨(敬敏皇貴妃 章佳氏), 17세기~1699[12]
자녀 22남(황13자) 이름 이현친왕 윤상(怡賢親王 胤祥) 1686~1730
13녀(8공주) 이름 화석온각공주(和碩溫恪公主)[13] 1687~1709
15녀(10공주) 이름 화석돈각공주(和碩敦恪公主) 1691~1709[14]

10. 온희귀비 소생

온희귀비 뉴호록씨(溫喜貴妃 紐祜祿氏), 1661~1694 [15]
자녀 18남(황10자) 이름 이혁돈군왕->패자품급 윤아(貝子品級 允䄉)[16] 1683~1740
11녀 이름 이름 불명 1685~1686

11. 혜비(강희 4비) 소생

혜비 납라씨(惠妃 納喇氏), 17세기~1732[17]
자녀 3남 이름 승경(承慶) 1670~1671
5남(황장자) 이름 이혁직군왕 윤제(胤禔)[18] 1672~1735

12. 의비 (강희 4비) 소생

의비 곽락라씨(宜妃 郭絡羅氏)[19][20]
자녀 13남(황5자) 이름 항온친왕 윤기(恒溫親王 允祺)[21] 1679~1732
17남(황9자) 이름 이혁[22] 고산패자 윤당(允禟) 1683~1726
20남(황11자) 이름 윤자(允禌) 1685~1696

13. 영비(강희 4비) 소생

영비 마가씨(榮妃 馬佳氏)[23], 17세기~1727
자녀 장남 이름 승서(承瑞) 1667~1670
4남 이름 새음찰혼(塞音察渾) 1671~1674
3녀(2공주) 이름 고륜영헌공주(固倫榮憲公主)[24] 1673~1728
6남 이름 장화(長華) 1674
8남 이름 장생(長生) 1675~1677
10남(황3자) 이름 성은군왕 윤지(誠隱郡王 允祉)[25] 1677~1732

14. 양비 소생

양비 위씨(良妃 衛氏)[26], 1662~1711[27]
자녀 16남(황8자) 이름 이혁[28] 염친왕 윤사(廉親王 允禩)[29] 1681~1726

15. 성비 소생

성비 대가씨(成妃 戴佳氏)[30], 17세기~1740
자녀 15남(황7자) 이름 순도친왕 윤우(淳度親王 胤祐)[31] 1680~1730

16. 순의밀비 소생

순의밀비 왕씨(順懿密妃 王氏)[32], 17세기~1744
자녀 25남(황15자) 이름 유각군왕 윤우(愉恪郡王 允禑)[33] 1693~1731
26남(황16자) 이름 장각친왕 윤록(莊恪親王 允祿)[34][35] 1695 ~1767
28남(황18자) 이름 윤개(允祄)[36] 1701~1708

17. 순유근비 소생

순유근비 진씨(純裕勤妃 陳氏), 17세기~1753
자녀 27남(황17자) 이름 과의친왕 윤례(果毅親王 允禮)[37] 1697~1738

18. 정비 소생

정비 만류합씨(定妃 萬琉哈氏)[38], 1661~1757
자녀 21남(황12자) 이름 이의친왕 윤도(履懿親王 胤祹)[39] 1685~1764

19. 통빈 소생

통빈 납란씨
자녀 6공주(황10녀) 이름 고륜순각공주(固倫純慤公主)[40] 1685~1710

20. 양빈 소생

양빈 고씨(襄嬪 高氏), 17세기~1746[41]
자녀 29남(황19자) 이름 윤직(胤禝)[42] 1702~1704
19녀 이름 이름 불명 1703~1705
30남(황20자) 이름 간정패륵 윤의(簡靖貝勒 胤禕) 1709~1731

21. 희빈 소생

희빈 진씨(熙嬪 陳氏), 1690~1737[43]
자녀 31남(황21자) 이름 신정군왕 윤희(愼靖郡王 胤禧) 1711~1758[44]

22. 목빈 소생

목빈 진씨(穆嬪 陳氏), 17세기~1724
자녀 34남(황24자) 이름 함각친왕 윤비(諴恪親王 胤祕)[45] 1716~1773
35남 이름 윤원(胤禐) 1718

23. 포귀인 소생

포귀인 조가씨
자녀 3공주(황5녀) 이름 화석단정공주(和碩端静公主) 1674~1710

24. 귀인 곽락라씨 소생

귀인 곽락라씨[46]
자녀 4공주(황6녀) 이름 고륜각정공주(固倫恪靖公主)[47] 1679~1735

25. 귀인 원씨 소생

귀인 원씨
자녀 9공주(황14녀) 이름 화석각정공주(和碩慤靖公主)[48] 1689~1736



[1] 효성인황후, 효소인황후, 효의인황후는 강희제 생전에 혼인하여 정식 책봉된 황후이지만, 효공인황후는 후궁으로 강희제 사후 친아들인 옹정제가 즉위하면서 성모황태후로 승급하여 황후로 추존되었다. [2] 允의 중국어 발음은 다른데 한국 한자음으로는 胤과 마찬가지로 '윤'으로 읽힌다. 또한 일부 형제들은 돌림자 외의 두번째 글자도 인전과 비슷하게 읽혀서 두 글자를 모두 개명하기도 했다. [3] 순치제가 후사를 당부한 정황기 출신 보정대신 허서리 소닌(赫舍里 索尼)의 첫째 아들의 딸, 즉 손녀이며 강희제 연간 권신이었던 허서리 송고투(赫舍里 索額圖)의 조카이다. 명문가 출신이지만 본래 합달부의 부속민이었기 때문에 다른 보정대신들의 반대가 심했으나 순치제의 총신인 소닌을 포섭하기 위해 태황태후인 효장문황후가 밀어붙여서 황후가 되었다. 황후 본인은 윤잉을 낳고 사망했지만, 윤잉의 존재로 인해 송고투를 중심으로 황태자당이 결성되어 권력다툼의 중심에 섰다. [4] 강희제를 죽을 때까지 속썩인 그 망나니 황태자. 강희제가 자손들의 돌림자 계승 규칙을 세우기 전 유아기에는 보성이라는 초명을 썼는데, 이 때문에 황장자당의 두목 밍주의 큰아들이자 문인으로 잘 알려진 청나라의 보헤미안 납란성덕(나라 승더, 納蘭性德)이 성덕(成德)이라는 초명을 개명해야 했다. 강희제가 유언으로 윤잉의 일가를 부탁하며 큰아들을 친왕에 봉하며 잘 챙겨주라 당부했기 때문에 옹정제는 윤잉을 유폐에서 풀어주지는 못했을지언정 그 자녀들만큼은 많이 챙겨주며 제법 잘 키워줬다. 윤잉의 6녀(화석숙신공주)와 7남(이각군왕 홍위)를 양녀와 양자로 삼았고, 화석숙신공주의 경우 몽골 과이심부 박이제길특 관음보와 결혼하게 되는데 이 때 혼수가 다른 공주들에 비해서 더 많았다고 한다. 장남인 이혁이친왕 홍석의 경우 1730년 이현친왕 윤상의 작위와 함께 세습망체를 인정해주기도 했다. 허나 강희제의 당부는 손자 홍력에게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는지, 홍석은 1739년 건륭제 폐위 음모에 연루되어 작위를 추탈당하고 유폐되어 생을 마쳤으며, 작위는 앞에서 말한 이각군왕 홍위에게 간다. 그러나 화석숙신공주는 잘 대접받으며 그녀의 딸은 건륭제의 셋째 아들인 순군왕 영장과 결혼한다. [5] 효소인황후가 죽은 후 내명부의 수장이 되어 강희제의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황후가 아닌 황귀비의 지위에 있었으나, 위독해지자 사망 하루 전에 강희제가 황후로 승급시켜준다. 원래 강희제의 사촌이지만 고모 따라 조카가 시집가는 청나라의 관습을 따라 후궁이 되었다. [6] 유일한 딸이었으나 생후 1달만에 요절했다. 1달만에 요절했기에 강희제는 당시 관습에 따라 8녀의 상을 치르지 않고 화장시켰다. [7] 어릴때 죽었으나 황6자로 인정됨 [8] 통설은 윤정(胤禎)이었으나 옹정제 즉위 후 윤제였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강희조의 옥첩 등에서 윤제(胤禵)라는 이름도 발견이 되어서 개명 경위에 논란이 있다. 윤정은 옹정제의 친동생임에도 옹정제가 아니라 황8자당의 윤사를 지지하였다. 1720년의 원정 활동에서 군재에 두각을 드러내면서 윤사와 윤당 등은 그를 차기 황위 계승자로 지지하였다. 또한 일반적으로 황자들은 하오기에 소속되지만 윤제만 정황기에 소속되고 강희제에게 여러가지 특혜를 받아 아직까지도 강희제가 본래 염두엔 둔 후계자라는 설이 있다. 허나 1722년 친형의 즉위 후 형과 굉장히 사이가 좋지 않았던 만큼 옹정제는 윤제를 강희제의 능참봉으로 보내 사실상 유폐시킨다. 효공인황후가 죽은 직후 군왕으로 봉해졌으나 여전히 패자 대우를 받다가 옹정 3년 패자로 강등되고 옹정 4년 패자 작위도 뺏긴 채 경산 수황전에 유폐된다. 이후 옹정제가 죽고 조카인 건륭제가 즉위한 후 연금에서 풀려났다. 파르냉 신부가 이 상황을 묘사한 편지가 존재하는데, 백성들이 황10자 윤아와 황14자 윤정이 풀려났다는 소식을 듣고 환호하며 이들에게 무릎을 꿇고 절을 했고, 새 황제의 덕을 칭송했다고 한다. 건륭제는 윤정의 작위를 차차 올려주며 정사에 참석시키고 순근왕으로 봉하며 정황기 한군 도통직을 맡긴다. 아이훈 조약에서 실무자로 활동한 혁산이 윤제의 현손이다. [9] 강희제가 가장 총애한 딸로 보통 공주들은 몽고 왕족과 결혼을 하지만 이 딸만큼은 만주 귀족과 결혼을 시켰다. 1698년 화석액부 동가 순안안에게 하가. 참고로 순안안은 융과다의 조카로 대부분의 동가씨들이 그러했듯이 윤사를 지지했다. 1723년 옹정제 즉위후 1품 무관인 영시위내대신에 오르고 작위 역시 화석액부에서 고륜액부로 업그레이드된다. 1724년에 갑자기 사망했는데 백부인 융과다가 1726년에 연갱요와 쌍으로 숙청당한 것을 생각하면 때를 잘 골라 간 셈이다. 참고로 순안안의 아들(서자인데 적자가 없는 관계로 공작 작위를 계승함)인 동가 원방은 장친왕 윤록의 딸과 결혼하여 공작 겸 화석액부가 된다. [10] 온희귀비 사후 6년간 귀비 자리가 공석이었는데 이 6년동안은 강희 4비(혜비, 의비, 덕비, 영비)가 내명부를 통솔했다. [11] 원래는 빈으로 입궁하고 1718년 비로 승급하였다. 돈이황귀비는 건륭제가 태어난 직후 효성헌황후 대신 건륭제의 양육을 맡았는데 건륭제는 즉위 후 키워준 은혜를 잊지 않고 돈이황귀비의 지위를 빈에서 황귀비로 올려준다. [12] 살아있을때는 각혜황귀비처럼 품계를 받지 못한 비공식 후궁이었다. 그러나 사후 민비로 추존된걸로 미루어보아 강희제의 총애를 받았던 듯. 옹정제 즉위 후 경민황귀비로 더 높게 추존되었고 옹정제가 후궁으로는 청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황제와 합장시켰다. 또한 옹정제는 장가씨를 포의에서 양황기 만주 기분니루로 대기시켰다. 이렇게 사후에 옹정제에게 엄청나게 큰 특혜를 받은 이유는, 친아들이 옹정제가 가장 아낀 형제였던 윤상이였기 때문인 듯하다. [13] 1705년에 몽골 우오특부 찰살극 두릉군왕 박이제길특 범진에게 하가. 참고로 남편은 1727년에 준가르와 차 밀무역을 하다 걸려서 옹정제에게 작위를 추탈당한다. 같은 화석액부인 책릉이 준가르를 무찔러 패자에서 초용친왕 작위를 받은 것과는 대조적이다. [14] 1708년에 몽골 과이심 태길 박이제길특씨 다이제에게 하가. 참고로 남편은 1719년에 죄를 지어 작위를 추탈당하고 1720년에 죽는다. 여담이지만 이 사이에서 나온 딸이 강희제의 딸 고륜순각공주의 액부인 초용친왕 책릉의 아들 성찬간포와 결혼했다. [15] 강희 19년 비 대우를 받는 격격으로 입궁하여 강희 20년 귀비로 책봉되었다. 언니인 효소인황후와 함께 청나라 최고의 명문가 출신이다. 무려 강희제의 보정대신이고 누르하치의 외손자이기도한 어빌룬의 딸이었다. 얼마나 명문가 출신이었냐면 온희귀비 소생이라는 것만으로도 만약 윤잉이 없다면 다음대 황제는 맡겨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일 정도.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의 아들인 10황자는 다음대 황제로 미는 것을 포기할 정도로 머리가 나빴다. 최고 명문가 출신인 어머니를 둔 황자로서는 정말 드물게도 사서에 공부 못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16] 돈군왕(敦郡王)까지 진봉되었으나 옹정제 즉위 후 박탈당하고 유폐되었다가 건륭제 즉위 후 복권되며 풀려났다. 숙청 당시 윤사와 윤당보다는 나았으나 옹정 13년에 장자가 옥사하는 고통을 겪었다. [17] <영헌록>에서는 예허나라씨이자 허서리 송고투와 함께 권력을 다투던 나라 밍주(納蘭明珠, 납란명주)와는 사촌관계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현재 옥첩에서 울아나라씨로 밝혀졌다. 혜비는 만군기 정황기 출신이지만 포의(예속 귀족) 출신이고 부친의 관직도 낮아 그리 영향력이 크지 않은 집안이었다. 혜비는 강희 초기에 서비가 되어 강희 16년에 혜빈으로 정식 책봉되었고, 강희 20년에 강희 4비 중 가장 먼저 배위를 받았으며, 온희귀비 사후 각혜황귀비가 귀비가 될 때까지 강희 4비가 육궁을 통솔했을 때 영비와 함께 태후로부터 최종 권한을 받았다. 또한 연희궁에서 많은 황손들을 양육했다. [18] 황태자 윤잉과 대립한 첫번째 황자다. 황3자 윤지, 황8자 윤사, 황13자 윤상, 황14자 윤정과 함께 무예에 출중한 황자였고 준가르 원정에서 군사적 능력을 입증했다. 그러나 나라 밍주와 교제하며 윤잉과 대립하고 급기야 강희제에게 "윤잉은 행실이 추잡하고 인심을 크게 잃었다. 관상가 장명덕이 일찍이 윤사는 귀해질 거라고 하더라. 윤잉을 죽일 거면 강희제가 손쓸 필요 없이 자신이 대신 나서서 죽이겠다."라고 하며 윤잉에 대한 살의를 표출한 것도 모자라 윤사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는 요지의 망언을 내뱉어서 강희제의 분노를 사고 부황의 눈밖에 났다. 윤잉이 폐위된 이후로도 그를 저주한 사실이 발각되어 유폐되고 작위를 박탈당했다. [19] 강희 16년 내무부 수녀로 입궐했다. 녹두패에서 발견된 이름은 나라주다. 강희제의 총애를 받아 입궁한 해에 바로 의빈으로 봉해지며 익곤궁의 주자가 된다. [20] 차남 윤당 강희제의 황8자 윤사를 지지하며 옹정제와 노골적으로 대립했다. 의비는 강희제의 사후 건강이 좋지 않아 가마를 타고 강희제의 영당에서 옹정제의 생모인 덕비 오아씨의 앞자리에 섰기 때문에 옹정제가 이를 트집잡았다. 결국 아들과 함께 옹정제의 보복을 정통으로 받아 의비를 모시던 태감 20여명이 모조리 체포되어 노비로 전락한 뒤 영고탑(寧古塔)으로 유배를 가고 이를 거부한 사람은 참살하고 시신마저 불태워져 그 유골을 영고탑에 보내버리면서 주변인물들도 모조리 숙청당했다. 슬하의 자녀들을 모두 먼저 떠나보내고 항친왕 윤기가 죽은지 1년 후에 사망한다. [21] 윤기는 친동생인 윤당과는 달리 권력투쟁에 관여하지 않았다. 순치제의 황후인 효혜장황후가 윤기를 키웠는데, 효혜장황후는 윤기가 권력투쟁에 희생당하는 걸 원하지 않았다. 참고로 윤기의 아들인 홍승(1697-1750)은 위에 서술된 윤잉의 아들인 이혁이친왕 홍석(1694-1740), 이현친왕 윤상의 아들인 영군왕 홍교, 장각친왕 윤록의 아들인 홍보(1713-1743) 등과 함께 건륭제 폐위 역모에 연루되지만 작위 박탈로 처벌이 끝난다. 이후 항친왕 작위는 동생인 홍경에게 간다. [22] 작위의 추탈을 의미한다. [23] 강희 4비 중 말석이었으나 혜비 납란씨와 함께 육궁을 관리한 권한을 부여받는 등 우대를 받았다. [24] 1691년 몽골 파림부 찰살극 군왕 박이제길특 오이곤에게 하가. 사실상 장녀였기에 온헌공주와 함께 강희제의 총애를 받은 공주다. 또한 강희제의 공주들 중 정치적인 활약이 두드러지는 공주로 파림부의 내정을 안정시킨 공로를 인정받고 강희제를 간호해서 강희 48년 고륜공주로 봉해졌다. 옹정 6년 서거한 뒤 제문에서도 공주의 공로에 대한 찬사가 실려있다. 여담이지만 아들이 옹정제 시절에 궁궐 시위였는데 불이 났는데도 술만 마시고 있어서(...) 분노한 외삼촌에게 크게 혼나고 가택연금을 당했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이 사이에서 나온 딸은 현친왕 연황에게 시집을 간다. 참고로 현친왕이라는 작위에서 알 수 있듯이 연황은 청태종의 서장자이자 도르곤과의 후계경쟁에서 밀려 숙청당한 숙무친왕 호격의 고손자다. [25] 성친왕(誠親王)까지 진봉되었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강등당하였다. 징크스라도 있는 건지 장례식에서 실수를 저지른 적이 많았다. 윤상의 어머니인 경민황귀비 장가씨가 죽었을 때 이발하다 걸려서 군왕에서 패륵으로 강등당한 적이 있고 옹정제의 후궁 돈숙황귀비 연씨의 장례식에 지각하기도 했다. 대중적으로는 존재감이 없지만 실제로는 강희제의 중용을 받았고 구왕탈적에 참여한 황자 중 한 명이다. 황장자 윤제, 황8자 윤사와 함께 준가르 원정에 세 번 모두 참전했다. 다만 3차 원정 직전 병에 걸려 실제로 참전하지는 못했다. 또한 황8자 윤사와 번갈아 가며 정사를 돌보는 등, 강희제의 중용을 받았고 윤잉의 2차 폐위 이후 실질적인 장자로서 존재감을 드러내며 세력을 구축했다. 그러나 옹정제 즉위 후 상황은 완전히 돌변하여 옹정제의 매서운 질타를 받았다. 윤지 본인은 황8자당은 아니었으나, 숙청당한 동생들을 안타까워하며 도와주려고 애썼고 때로는 옹정제의 추궁과 의심을 피하기 위해 동생들과의 관계를 부정하며 자비를 청했다. 황8자당이 숙청당한 이후에도 큰아들 홍성은 황8자당이라는 이유로 유폐당했기 때문에 옹정제가 가장 아끼는 아들 복혜의 장례식에서 평소보다 희색이 만연했다. 가장 사이가 좋은 형제인 황7자 윤우가 죽은지 한달만에 옹정제가 신임하는 동생 윤상의 장례식이 매우 성대하게 치루어지자 윤지는 슬픈 기색을 드러내지 않으며 옹정제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옹정제는 원래부터 윤지를 싫어해서 즉위 이후 계속 추궁하고 괴롭히다 옹정 8년 복혜와 윤상의 장례식에서 슬픈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윤지의 작위를 삭탈하고 유폐한다. 이후 건륭제 시기에 건륭제는 셋째 큰아버지의 작위를 회복시키고 죄를 벗겨준다. 차기 대권경쟁에서는 밀렸지만 그래도 시독 진몽뢰를 시켜 고금도서집성 편찬을 후원하며 文에서만큼은 형제들 중 돋보이는 족적을 남겼다. 기마와 궁술실력도 출중했다. 선교사들은 윤지의 궁술이 강희제와 비견될만하다고 칭찬했고, 강희제가 윤잉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황장자 윤제, 황3자 윤지, 황8자 윤사가 가장 많은 토끼를 사냥했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5대손인 재령은 도광제의 황후인 효정성황후 박이제길특씨의 형부로 함풍제, 공친왕에게는 조카뻘(...)이자 이모부였기에 괜찮은 대접을 받는다. [26] 이름은 수왕지예다. [27] 내무부 포의 관령 출신으로 내무부 수녀로 들어왔다. 황8자가 결혼하기 전에 빈이 되었으나 후궁 제도가 완비되지 않아 봉호는 받지 못했다. 1707년까지 양빈으로 기록되어 있어 1707년 이후에 비로 승급한 듯하다. [28] 작위의 추탈을 의미한다 [29] 옹정제 즉위 이후엔 보복을 정통으로 맞아 황9자 윤당과 함께 아기나(阿其那)로 개명되어 유폐된 채 죽었다. 강희제의 아들 중 위에서 서술된 9황자 윤당과 더불어 옹정제에게 가장 가혹하게 숙청당한 황자. [30] 내무부 포의 출신이지만 사촌이 내무부 총관으로 임명되어 가세는 좋은 편이었다. 그러나 강희 초년에 후궁이 되고 황7자 윤우를 낳았는데도 강희 48년에야 빈이 되었다. 이런 늦은 승봉은 그녀가 총애 받지 못한 탓도 있지만 윤우가 다리에 장애가 있고 일찍 융희의 양자로 입적된 탓이다. [31] 순치제의 7자 융희의 후사로 입적되었다. [32] 강희 말년에 총애를 받았으나 민인 출신이라 오랫동안 정식 비빈으로 책봉받지 못했고, 강희 57년에 밀빈으로 책봉된다. [33] 적복진인 과이가씨는 도통 석문병의 딸로 위의 이밀친왕 윤잉의 처제이기도 하다. 즉 윤잉과는 형제인 동시에 동서지간. 이렇듯 황태자-황4자당과도 관련이 깊은데 정작 친동생이나 그 바로 아랫 동생인 윤례와는 달리 정치에 관여하지는 않았다. 또한 손녀들 중 하나는 부찰 복강안의 제수이다. [34] 옹정제 즉위 후 승택유친왕의 아들 쇼서의 장자인 장정친왕 복고다(莊靖親王 博果鐸)가 후사 없이 죽자 양자로 들어갔는데 이때 승택유친왕의 차남 이혁혜군왕 보옹고로의 후손들이 반발하였으나 보옹고로 역시 작위를 박탈당한 지위였기에 하자가 있었고, 옹정제와 윤록이 보옹고로의 후손들을 잘 타이르고 여러 혜택을 챙겨주며 넘어갔다. 윤록은 옹정제의 심복임은 물론 건륭제에게도 스승과 같은 존재였으나, 본인과 세자인 홍보(1713-1743)가 이밀친왕 윤잉의 장자인 홍석과 친하게 지내다가 같이 처벌받았다. 그러나 이후 면책받고 다시 조정에 복귀했다. 홍보 역시 훗날 장친왕으로 추봉되어 철모자왕작을 공인받는다. 또한 영상 역시 5촌 아저씨 건륭제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참고로 장녀인 화석단유공주(1713-1753)은 옹정제의 양녀로 몽골 과이심부 자사그 보두얼러거타이 군왕( 승격림심의 작위 맞다)박이제길특 제묵특다이제와 결혼한다. 둘 사이에 자식이 없어 작위는 동생이 계승하는데 동생의 양손자가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의 난 당시의 장군인 승격림심이다. [35] 여담이지만 도광제 때 윤록의 고손자인 이혁장친왕 혁매는 아편을 피다가 1838년(하필 아편전쟁 나기 직전에 눈치도 없이...) 도광제와 임칙서에 의해 작위를 추탈당한다. 이로 인해 작위는 윤록의 차남의 증손인 면호가 장친왕작을 계승하는데 면호의 손자인 재훈( 효정현황후의 이종조카다. 즉 동치제와도 사촌지간.)은 의화단의 난에 단군왕 재의, 육현 등과 함께 가담하여 신축조약후 사실상 서태후의 책임회피 차원에서 자결을 명받고 1901년 자살한다. [36] 윤잉의 1차 폐위의 도화선이 된 황자로 유명하다. 윤개가 병에 걸리자 강희제가 윤개의 병환이 회복되길 기원하고 있었는데 윤잉은 형제가 죽어가는 데도 슬퍼하지 않고 강희제의 막사 안을 염탐했다. 강희제는 윤잉을 무릎 꿇리고 울면서 노발대발했다. [37] 후궁견환전의 과군왕이다. 1727년 과친왕에 책봉되었으며 적복진인 뉴호록씨는 강희제의 보정대신 중 하나인 뉴호록 알필륭의 적자인 아령아의 딸이다. 원래 아령아는 황8자당 소속으로 윤사를 지지하여 사후 옹정제에 의해 작위를 추탈당한다. 그런데 아령아의 부인인 우야씨(옹정제의 친어머니 효공인황후의 여동생)가 옹정제의 이모였는데, 아령아는 황8자당이었다. 아령아는 옹정제가 즉위하기 전에 사망했으나 아령아의 아들들은 사촌인 옹정제의 보복을 받아 참수당하거나 유배를 갔다. 참고로 위에서 서술된 10황자 윤아와도 처고종사촌 형제간이다.(...) 이후 적복진과 측복진 사이에 후사가 없어 옹정의 막내아들인 홍염이 양자가 된다. 옹정제의 아들 홍염은 이복형 건륭제의 치세에서 이런저런 사고를 많이 쳤으나, 건륭제는 다른 이복동생인 홍주에게 그랬듯이 몇 안남은 동생 홍염도 은근히 봐줬다. [38] 이름은 뇨뇨다. 효공인황후, 양비 위씨와 함께 궁녀로 입궁했다. 내무부 관령 출신이었으나 옹정제가 효공인황후와 함께 입궁했다는 이유로 정황기 만주로 대기시켰다. 그러나 강희제의 유지에 따라 출궁한 후 옹정제를 찾아가지도, 연락도 하지 않았다. [39] 옹정제 즉위 후 군왕으로 봉했으나 제사 절차에서 실수했다는 이유로 패자로 강등을 당했고 다시 보국공으로 강등당한다. 옹정 8년에 군왕으로 복위된다. 이후 조카인 건륭제 즉위 후 이친왕으로 작위가 높여진다. 늦둥이 자식이 있었지만 그마저도 일찍 죽은 이유로 건륭제의 황4자 영성이 양손으로 입적된다. 참고로 복진은 의정대신 부찰 마제의 딸로 마제는 효현순황후 부항의 백부이니 건륭제와도 처사촌 동서간이다. [40] 할하 소속이었으나 청나라에 귀부하여 강희제로부터 3등 아다하 하판 직위를 수여받은 책릉과 혼인했지만 순각공주는 4년만에 서거했다. 책릉이 준가르와의 전쟁에서 전공을 쌓으며 작위가 승격되었고 옹정제로부터 친왕 작위를 수여받자 순각공주도 화석공주에서 고륜공주로 승격되었다. [41] 현직 시절엔 품계가 없다가 옹정제 때 귀인으로, 건륭제 때 양빈으로 추존되었다. [42] 어릴 때 죽었으나 황19자로 인정되었다. [43] 후궁은 커녕 궁녀도 될 수 없는 민인 출신이었으나 미인이 많은 강남 지방을 순행하던 강희제에 의해 입궁했다. 민인 출신들은 빈 이상 올라갈 수 없었기에 후궁 시절 품계도 없었으나 옹정에 의해 귀인으로, 건륭에 의해 희빈으로 추존된다. [44] 후궁견환전의 견환의 동복 여동생 작은 옥요(玉嬈)와 혼인하는 그 신패륵 윤희. 건륭 연간 초기에 활동했지만 건륭제와 동갑이지만 숙부라는 항렬 때문에 노안으로 묘사되는 일이 많다. 강희제가 자식이 좀 많아놔야지 자식이 없어 동갑인 건륭제의 황6자 영용이 양자, 아니 양'손'으로 입적되었고 질(質)친왕으로 봉작이 업그레이드되었다.참고로 딸인 다라격격은 몽골 할하부 지용친왕 박이제길특 상재다이재(1731~1778)와 결혼했는데 상재다이재는 윤희의 형인 이현친왕 윤상의 딸이자 옹정제의 양녀인 화석화혜공주(1714~1731)의 아들이다. 즉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서로 사촌간. 참고로 상재다이재의 작위는 아버지 다이제새포등이 죄를 짓는 바람에 친왕에서 군왕으로 강등되었다가(다이제새포등은 화혜공주가 1731년에 죽은 지 2년 후인 1733년에 죽는다. 상재다이재가 준가르 정벌전에서 초용친왕 고륜액부 책릉과 강희제의 10녀인 고륜순각공주의 아들인 성찬간포와 공을 세움에 따라 친왕으로 올라간다. [45] 나이 차이만 40살에 가깝게 차이나는 옹정제의 막내동생으로, 시대적 특성상 아버지를 넘어 할아버지뻘에 가까운 넷째 형이 즉위할 당시엔 7살의 꼬맹이였다. [46] 의비 곽락라씨의 언니다. 본래 과부였으나 내무부 수녀로 입궐한 후 후궁이 되었다. [47] 처음엔 화석공주로 봉해져 할하부 군왕 돈다포다이제에게 하가했다. 1709년 강희제의 딸로서 <할하 삼기 대법규>의 제정에 관여하였다. 옹정 원년 고륜공주로 봉해졌다. [48] 한군 정백기 일등남 손승운에게 하가했다. 유일하게 한군기인에게 하가한 공주다. 공주의 아들 손오복은 강희제의 명으로 황8자 윤사의 딸과 정혼했고 옹정연간에 혼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