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869년 5월 8일 |
충청도
천안군 (현 충청남도 천안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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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32년 10월 27일 |
만주국 흑룡강성 하얼빈시 서부가구 북정양가 4호 | |
종교 | 대종교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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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강인수는 1869년 5월 8일 충청도 천안군(현 충청남도 천안시)에서 태어났다.그는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한성부에서 동우회(同友會)를 조직하고 주권회복을 도모했다. 그러다가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에 연루되자 곧 러시아 제국 블라디보스토크로 피신하여 항일 투쟁을 지속했으며, 1920년에는 만주에서 북로군정서의 지휘관 김좌진의 휘하에 들어가 청산리 전투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 뒤 그는 영안현 해림지구(海林地區)[1]로 이주하였고, 1922년 9월 13일 이곳에 대종교 동이도(東二道) 제1지사(第一支司) 소속의 장일시교당(帳一施敎堂)을 설립하기도 했다. 1925년에는 길림성 연길도(延吉道) 영안현(寧安縣)[2]에서 신민부(新民府)를 조직에 참여하고, 검사원(檢査院)의 검사원(檢査員)으로 선임되어 지방조직과 독립군의 편성 및 훈련에 주력했다.
1929년에는 만주 일대의 각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한 한족연합회(韓族聯合會) 결성에 가담했다가 1930년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하얼빈과 경계를 접하던 영안현 산시지구(山市地區) 산시역(山市驛)[3]에 은신했다가 만주사변 이후 1932년 10월 27일 흑룡강성 하얼빈시 서부가구(西傅家區) 북정양가(北正陽街)[4] 4호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강인수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