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3-10 21:40:11

강대련

1. 개요

姜大蓮 (1875년 ~ 1942년)
일본식 이름: 渭原馨

경상남도 진주 출생으로, 14세에 금강산에서 출가하여 불교 승려가 되었다.

1905년에 명진학교를 졸업한 후, 이회광이 있던 원종총무원의 서무부장을 거쳐 1911년 수원 용주사의 주지가 되었다. 1915년에는 삼십본산연합사무소의 초대 위원장에 올라 불교계의 실력자로 부상하였고, 수차례에 걸쳐 위원장과 상치원(常置員: 상무위원)을 역임하였다. 그가 세운 불교 중앙학림은 이후 불교계의 대표 사학인 동국대학교로 발전하였다.

강대련은 친일성향이 강한 승려로, 1919년 3 .1운동 직후 삼십본산연합사무소의 위원장 자격으로 일본 측에 제출한 조선불교기관 확장의견서의 내용에는 조선과 일본의 왕실, 귀족 여성을 상대국의 승려와 결혼시키면 양국의 화합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의견을 담아, 이러한 의견서의 내용으로 인해 불교계의 반발이 강하여 강대련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나아가 불교의 교리를 어긴 범계자(犯戒者)로 판단하여 강대련을 불교계에서 축출하려는 움직임이 벌어져 재판에서 관련 주모자들이 실형을 선고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강대련은 민족주의 계열 세력에 의한 영고축출의 움직임을 도리어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스스로 별호를 지어 붙였는데, 이러한 행보로 불교계의 개혁파였던 승려 강신창은 공공연히 강대련을 가리켜 '조선 불교계의 큰 악마'라고 불렀다.

사망할 때까지 용주사 주지를 지내면서 조선총독부와 가까운 관계를 맺었고, 교권을 두고 또 다른 친일 승려인 이회광과 대립하기도 하였다. 말년에는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을 위하여 법요식을 지냈고, 거액의 국방헌금도 헌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