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18:45:27

강극모

<colbgcolor=#0047a0> 출생 1890년 6월 23일
함경남도 풍산군
사망 1951년 1월 4일
함경남도 풍산군
직업 독립운동가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강극모는 함경남도 풍산군 사람이다. 1920년 음력 2월 단신으로 중국 지린성 장백현 17도구로 이주한 그는 그해 음력 9월 윤덕보(尹德甫)와 이동백(李東白)의 권유를 받아들여 17도구 동평덕리에 본부를 둔 결사단군비단(軍備團)에 가입한 후 윤덕보로부터 독립운동자금 모집의 명을 받고 음력 10월 상순 조선으로 잠입했다.

강극모는 함경남도 신흥군 동상면 달아리에 거주하는 박계화(朴啓華)와 만났고 그의 안내를 따라 동도 풍산군 웅이면 용문리 김도경(金道敬)의 집에 가서 동리 박도천(朴道天) 외 여러 주민들을 모아놓고 박도천에게 협박했다.
우리는 중국 간도 용정촌 신정부로부터 독립운동 자금 모집을 위해 온 사람이다. 너희들도 조선민족인 이상 응분의 군자금을 내야 하며 만약 응하지 않을 시에는 다른 단원이 와서 죽일 것이다.

이리하여 박도천으로부터 2원을 받아낸 강극모는 10월 8일 동리 이병국(李炳國)의 집에 가서 주민 오재진(吳在鎭) 외 여러 명을 모아놓고 오재진을 다시 협박해 2원을 받아낸 뒤 동평덕리에 복귀했다. 이후 그는 전에 한의학을 공부한 적이 있었기에 1921년 음력 2월 윤덕보의 명령에 따라 군비단의 군의로서 러시아령인 이만에 파견되어 동 지역의 병원에 배속되었다.

그러다가 1922년 음력 6월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그해 7월 27일 국민대회를 연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윤덕보 휘하에 있는 군비단 참위 임표(林豹)의 명령에 따라 지청천 외 여러 동지들과 함께 국민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동년 7월 상순 경 이만을 출발해 상하이로 갔다. 그러나 임시정부 간부 간에 정치적 마찰이 일어나 국민대획라 무산되자, 그는 동년 음력 8월에 상하이를 출발해 다시 러시아령 이만으로 돌아왔다.

그러다가 일제 경찰에게 체포된 강극모는 1927년 3월 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풀려난 후에는 고향에서 지냈으며 1951년1월 4일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강극모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