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08 20:20:20

가이우스 푸르니우스(법무관)

가이우스 푸르니우스
라틴어: Gaius Furnius
생몰년도 미상 ~ 미상
출생지 로마 공화국 로마
사망지 로마 제국 로마
지위 플레브스
국가 로마 공화국 로마 제국
가족 가이우스 푸르니우스(아들)
직업 로마 제국 호민관. 법무관

1. 개요2.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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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호민관, 법무관.

2. 행적

집안 배경 및 초기 행적은 알려진 바 없지만,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와 절친한 친구였다는 사실은 전해진다. 기원전 51년 킬리키아 총독에 선임된 키케로는 키케로는 절친한 친구 티투스 폼포니우스 아티쿠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로마를 떠나기 전에 친구들에게 자신의 임기가 연장되는 것을 막아달라고 부탁했다고 밝혔다. 이 요청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이듬해인 기원전 50년에 호민관이 될 예정이었던 가이우스 푸르니우스도 있었다. 키케로는 편지에서 푸리우스를 "우리 푸르니우스"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기원전 50년, 푸르니우스는 호민관으로서 키케로의 이익을 위해 행동했다. 키케로가 킬리키아에서 약탈을 자행한 이민족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자, 원로원에 키케로의 승리를 기리는 감사 기도를 드리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키케로는 그에게 다소 불만이 있었던 듯하다. 기원전 50년 2월, 키케로는 아티쿠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나는 푸르니우스의 법안을 좋아하지 않네. 왜냐하면 그가 규정한 경우 외에 다른 경우는 두렵지 않기 때문이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하자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편에 섰고, 카이사르와 키케로 사이의 중개자가 되었다. 키케로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에 대한 공식적인 비난이 있을 원로원 회의에 참석하는 것을 피하고 싶어했을 때, 푸르니우스는 로마를 떠나지 말아달라고 요청하는 카이사르의 편지를 키케로에게 전달했다.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이 벌어졌을 당시 갈리아 코마타[1] 총독으로 부임될 예정이었던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 레가투스로 지명되어 있었다. 그는 카이사르 추종자들과 키케로 및 원로원과의 협상 때 중개자로 활동했다. 기원전 43년 말에 플란쿠스의 승인을 받고 로마로 돌아간 뒤 법무관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어 기원전 42년도 법무관으로 활동했다.

기원전 41년 옥타비아누스를 상대로 페루시아 내전을 단행한 루키우스 안토니우스를 지원하고자 군대를 일으켰으나, 도중에 옥타비아누스의 역습을 받자 움브리아의 센티넘 시로 후퇴했다. 이후 옥타비아누스의 포위 공격으로부터 센티넘 시를 지키던 그는 로마가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의 수중에 넘어갔다는 소식을 접하자 급히 철군하는 옥타비아누스를 추격했지만, 그 사이에 퀸투스 살비우스 살비디에누스 루푸스가 히스파니아에서 이탈리아로 들어와서 센티넘을 공략하고 뒤이어 누르시아를 평정했다. 이후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와 함께 페루시아로 피신한 뒤 농성했지만, 기원전 40년 2월 말 또는 3월 초에 식량이 바닥나 성내에 기아가 창궐하면서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의 지시에 따라 두 장교와 함께 옥타비아누스를 찾아가 항복 협상을 벌였다.

이후 동방을 지배하고 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휘하로 들어갔고, 기원전 39년 티투스 섹스티우스가 이끌던 아프리카 방면 4개 군단을 동방으로 데려오는 임무를 맡았지만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아프리카 총독으로 부임한 뒤 군대를 인수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기원전 36~35년 아시아 총독으로 부임했고, 3개 군단을 이끌고 파르티아로 망명하려던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마르쿠스 티티우스와 함께 중도에서 요격해 격퇴했다. 이후 폼페이우스가 안전 보장과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직접 만나게 해주는 것을 대가로 그에게 항복하겠다고 제안하자, 푸르니우스는 티티우스에게 이 문제를 떠넘겼다. 티티우스는 신변의 안전을 보장할 테니 군대를 해산하고 항복하라고 요구했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이를 받아들이고 항복했지만, 티티우스는 약속을 어기고 처형했다.

기원전 31년 9월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 해군이 참패한 뒤, 그는 아들 가이우스 푸르니우스의 호소 덕분에 옥타비아누스로부터 용서를 받았다. 기원전 29년 실제로 집정관에 선임되지는 않았지만 집정관 지명자가 되었다. 이후의 행적은 알 수 없지만, 히에로니무스에 따르면 아들보다 나중에 죽었다고 한다.
[1] 일명 장발의 갈리아.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을 끝내면서 설치된 임시 속주로, 후에 아퀴타니아, 벨기카, 루그두넨시스로 분할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