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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h of War/아프리카 군벌의 배경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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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유럽 제국주의자들은 자신의 몫으로 가져갈 대륙과 그곳에서 날 부를 바라며 경쟁하듯 아프리카로 나아갔다. 신앙, 명성과 부를 추구하여, 이 식민지배자들은 아프리카 부족들뿐만 아니라 다른 제국주의자들과 충돌을 빚게 되었다. 이는 거듭되는 전쟁을 불러왔으며, 이는 식민 지배를 하는 유럽인들에게 공급되는 자원이 불안정하고 불안함을 의미했다. 아프리카-유럽 사이에 좀 더 안정적인 교역로를 만들기 위하여, 1884년에 베를린 회담이 개최되었고 그 결과 아프리카 대륙은 각 부족들의 문화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분할되었다. 유럽인들에게 이는 굉장한 성공이었고 또한 새로운 유럽의 더 나아간 협력의 순간들 중 하나였다.

한편, 오스만 제국은 1980대에 근대 제국으로 변화하여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에 적응하려는 몸부림을 계속했다. 이를 위해서, 오스만 조정은 많은 망명 러시아 귀족들을 술탄의 조언가 자격으로 받아주었다. 이 귀족들은 술탄의 왕실 조정에서 감독을 맡았으며, 오스만 귀족 자제들의 고등교육을 맡았다. 그러나 새로이 탄생한 소련은 이러한 행동들을 좌시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붉은 군대가 1904년에 발칸반도를 침략하게 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빠르게 무너져 내렸고, 유럽 연합에 소련 침략자를 몰아내도록 의탁할 수밖에 없었으며 결국 오스만 제국은 발칸반도의 모든 권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정당성을 지키기 위해 귀족들은 몰락하기 전에 왕처럼 행동하기 시작했고, 왕위 찬탈에 대한 욕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1907년 봄에 소련은 영국령 인도로의 진격로 확보를 목적으로 아프가니스탄으로 남진했고, 유사 이래 가장 길고 가장 치열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1910년에 오스만은 한 번 더 페르시아 동부까지 영토를 넓혔고 페르시아와 아프가니스탄의 심히 불안정한 국경수비를 돕는다는 명목으로 왕국을 장악했다.

1916년에 오스만 제국은 심각한 실수들을 저질렀는데, ‘2차 대장벽 공성’에서 유럽연합이 패배에 가깝다는 것과 연합의 식민지 주둔군이 역대 최저라는 것을 알자 그들은 연합이 약하며 이집트에 있는 그들의 시설들을 지켜내지 못할 것이라 강하게 믿었다. 이로 인해, 오스만 제국은 수에즈 운하를 자신들의 것으로 할 기회를 보게 된 것이다. 전쟁은 짧고 치열했으며, 연합이 이집트를 방어하기 위해 식민지 의용군을 실어 나르기 시작할 때까지 알렉산드리아가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유일한 요새였다. 치열했던 알렉산드리아 공성전은 오스만 제국이 나일강을 따라 수많은 기뢰를 지중해로 떠내려 보내 효과적으로 재보급을 차단하면서 막을 내렸다. 1920년에 오스만 제국은 연합의 지원을 더 이상 받지 못하고, 소련이 남진하며 공화국이 부족 간 갈등과 내란을 부추기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1922년에 젊은 투르크인이 마지막 남은 오스만 귀족들을 모두 처형하면서 오스만 제국은 멸망했다. 영토는 다른 이들을 지배하려 분투하는 족벌 집단의 지배에 들어갔다. 이 전적인 혼돈의 시기에 유럽연합과 소련이 이 이익이 되는 땅들을 차지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며, 유럽연합은 터키와 아라비아를, 소련은 남부 코카서스와 페르시아를 차지했다.

연합이 더욱 더 많은 인력을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차출하자 아프리카 내부 상황은 채굴 진지와 플랜테이션 농장을 요새화하기에는 좋지 못하게 되었다. 아프리카 대륙의 내부 상황은 도시 외부의 공무원들이 적거나 극히 줄어들면서 유럽연합에게 매우 불리해졌다. 유럽 정착자들은 불안해했고 결국 민병대를 결성했다. 1920년대 중반부터 내부 상황은 무법과 보복의 연속이었다. 지역의 유럽연합 공무원들은 유혈사태를 막을 수도 막을 의지도 없었다.

독립으로 가는 길의 첫 단계는 1935년에 수에즈 운하를 확보하려는 공화국의 시도로부터 찾아왔다. 에티오피아의 거친 환경에서 단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하니파’라는 의문의 장군이 지휘하는 아프리카 민병대는 공화국을 몰아내고 수에즈 운하를 차지했다. 이 사건은 아프리카 반란군이 어중이떠중이 농부들이라는 관념을 무너뜨렸고, 세계는 ‘하니파’의 군대를 아프리카 정세의 주력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반군 “전쟁 집단(War Host)”은 악명 높은 ‘하니파’와 그녀의 최측근 샤카 줄루 2세로 세력을 나누었다. 2년 뒤, 전쟁 집단은 북부, 중부 아프리카를 해방할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유럽연합의 산업과 채광의 중심지인 남부 아프리카 식민지였다. 남부의 전쟁은 어느 편도 포로를 잡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만행의 해였다. 보어인들은 요하네스버그에 유산을 남겨두고 영원히 떠나버렸고, 유럽연합은 퇴각할 때 대규모의 군수시설과 도시에 설치했던 무기고들을 모두 자폭시켰는데, 뒤이은 폭발은 런던에서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고 회자된다. 전쟁 집단이 아프리카를 차지하자, 그들은 명칭을 “아프리카 군벌(African Warlords)”로 변경했다.

1939년에, 전 아프리카가 군벌의 지배하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한 독립 그 이상을 원했다. 아프리카 군벌은 노예가 된 형제들과 유럽연합이 남기고 간 황폐해진 아프리카의 복수를 원했다. 그들은 수에즈를 건너 북부로 진군하며 여전히 제국주의자들의 지배하에 있는 이들을 해방하고 연합으로부터 구출한 세력과 손을 잡았다. 전쟁 집단의 마지막 대 진격은 아프가니스탄으로였고, 결정적으로 소련을 몰아냈다.

군벌은 다른 대부분 진영들과는 매우 다르며, 중앙집권체제 대신 밀레트 체제[1]를 받아들였다. 군벌은 부족들, 국가들, 에미리트들, 왕국들, 그리고 자유 국가들을 다스린다.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으나, 전쟁 집단이 그들을 부를 때, 그들은 반드시 빚을 살과 연료, 강철로 갚아야 한다. 아프리카와 중동은 자유로우며, 이를 군벌이 지켜준다.


[1] 오스만 제국에서 공인된 비(非)이슬람 종교 자치제. 지방자치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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