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8-18 09:43:54

March of War/라틴 군정의 배경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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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국 연방이 중앙아메리카로 세를 넓혀갈 때 라틴 아메리카의 국가들은 북쪽의 이웃나라가 하나씩 자신들을 약화시키고 식민지로 삼는 것을 막을 힘이 없었다. 공화국 연방의 라틴 아메리카 영토 내부로의 꾸준한 확장의 결과로, 남아메리카에 남아있는 자유국가들은 국내 불안정서와 정치싸움의 증가를 목격했다. 시골 지역에서 일어나는 폭동들과 폭민정치[1]에 대응하기 위해, 아직 남아있는 남아메리카 독립국들의 군대가 법률과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켰고, 이후 그들은 이 합동 군사 독재정부를 “라틴 군정”이라 불렀다. 훗날 그들의 영토에서 막강한 권력을 확립하게 되는 라틴 군정은 잠재적인 공화국 지지자들과 국가의 적들을 고문하고, 불구로 만들며 죽였다. 이 공개처형의 대부분은 군사재판과 군정을 등에 업고 폭력을 휘두르는 군중들 양쪽 모두에 의해 집행되었다.

처음에는, 라틴 군정은 공화국 연방의 보급품을 훔치거나 근시안적인 미국 대기업이나, 소련 무기상인, 심지어는 쇼군 외교관처럼 그들의 무장을 기꺼이 지지하는 아무 단체의 지원을 통해 물자를 모았다. 그러나 이런 지원은 보통 큰 대가가 따랐는데, 이로 인해 군정은 감히 그들을 위협할 어떤 적이라도 대항하기 위한 적절한 무장을 국내에서 조달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라틴 군정에는 산업화된 도시나 공장들이 심각할 정도로 부족했지만, 중공업은 충분히 보유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군정이 자신들의 장비 중 일부를 현지에서 생산할 수 있었지만, 그들의 군사 기재 개발에 대한 전문성 부족은 시설의 부족과 합쳐지면서 라틴 군정은 그들의 시설들을 핵심 군사 기재 생산을 위해 남겨놓게 되었다. 이를 염두에 두고, 라틴 군정은 보병들로는 채울 수 없는 남은 공백을 메우기 위해 기존에 보유하던 산업용 차량들을 전투용으로 보강하기 시작했다. 한편, 라틴 군정은 대륙의 사나운 정글에서 획득한 자연 독소로 파괴적인 효과를 내게 하기 위해 국가의 적이나 반역자들을 실험체로 하여 인체실험을 하기 시작했다. 군정은 자유주의자와 자본주의자들에 대한 자신들의 탄압이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이 빠르게 파고들 공백을 만들었다는 걸 알게 되었으며, 그들의 빈곤계층 출신 병사 대부분이 이 새로운 사상에 동조했고 군정은 이를 이용하고자 했다. 역사의 한 획을 그을 행동 군정 지휘관들은 사회주의 이념의 요소들을 도입했는데, 이를 자신들의 직접적인 통제 하에 도입하였고 이를 사회적 조화의 근원으로 변모시켰다. 이로 인해 그들은 남아메리카의 진정한 지도자로서의 정당성을 얻게 되었다. 1925년에 공화국 연방은 더 남쪽인 아마존 유역 쪽으로 확장을 시작했다. 몇 개월의 치열한 정글 전 이후, 브라질의 부대는 끈질기고 수월한 공화국 연방의 전진에 서서히 영토를 잃어갔다. 동년 9월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의 군정 군대는 브라질이 제안한 공화국 연방에 대항할 군사 동맹을 논의하기 위해 리우 데 자네이로에 모였다. 불과 몇 주만의 논의 끝에 군정들은 라틴 군정의 최고위원회 설립에 동의했고 상호 안전 지원과 군사 통합에 대한 조약을 맺었다. 아마존의 공화국 연방에 대항하여 흐름을 뒤엎는 뛰어난 성공을 보자 페루, 볼리비아, 우루과이와 파라과이도 몇 개월 뒤 합류했다.

1928년 봄에 공화국 연방 식민지들의 봉기가 본격적으로 일어나던 때 라틴 군정은 내부적으로 이 이웃들을 제때 도와야한다는 압박감을 느꼈다. 공화국 연방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는 것과 군벌의 숙적에게서 나라를 적극적으로 빼앗아 오는 것은 확연히 서로 다른 작전임을 깨닫고, 라틴 군정의 지도자들은 소비에트 연방에 도움을 요청했다. 소련은 일종의 투자로서 라틴 군정에 필수 전쟁 물자와 체제 전복의 전문가를 지원했다. 이 동맹으로 군정은 1930년 베네수엘라의 봉기에서 첫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공화국 연방을 몰아내고 싶어 하는 인민당 덕에 군정은 국가를 해방하고 라틴아메리카 내에서 연립정부가 사이먼 볼리바르나 호세 데 산 마르틴 이후 볼 수 없었던 해방자라 불리는 평판을 얻을 수 있었다. 1933년까지 라틴 군정은 파나마 이남의 모든 지역을 해방시켰고 두텁게 요새화된 파나마 운하 지대를 공성하느라 2년을 보냈다. 이 시기동안, 해방된 국가들은 체제에 반하는 것은 용인되지 않으며 공화국 연방의 편에 섰던 자들은 조직적으로 제거되었고 군정의 이념을 따르지 않는 자들은 사회에서 매장됨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국가들의 시민들을 깜짝 놀라게 한 것은 라틴 군정으로의 빠른 흡수합병이었다. 국가해방의 시기에는 흔히 해당 지역에 라틴 군정이 세를 장악하고 반체제 인사에 대한 숙청을 시작했는데 보통 대지주들이 가장 먼저 제거되었다. 1934년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군정 내부 구성원에 대해서도 엄청난 피바람이 불었던 해였는데 일부가 소련을 등에 업고 쿠데타를 일으켜 군정 지도부를 몰아내려 한다는 정보가 들려오자, 그들은 선수를 쳤다. 1시간 이내에 모든 소련 공무원들과 소비에트 내통자 후안 페론,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이 체포되었다. 그해 6천구에 달하는 머리가 모스크바로 돌려보내졌다고 한다.

파나마 요새가 군정의 해방을 방해하는 동안 군정은 카리브 해에 몰래 보급품을 보내 캐리비언 섬들과 중앙아메리카에서 성장하는 국내 반란군들을 지원했다. 1936년까지 파나마는 라틴 군정에게 5년 가까이 공격당하고 있었고, 마음이 급해진 공화국 연방은 파나마 운하를 라틴아메리카가 통치하도록 넘기는 대신 공화국 연방이 자유로이 운하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조건으로 협상에 들어갔다. 1937년에 협정이 마무리되었을 때 라틴아메리카에는 공화국 연방의 거점이 쿠바와 북부 멕시코 딱 2개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공화국 연방은 2년간 라틴 군정을 피비린내 나는 교착상태로 끌고 갔고 그동안 남부 국경 수비 네트워크, 붉은 장벽에서 따온 대규모로 요새화된 벙커와 참호 시스템을 공화국 연방 영토로 진군하는 어떠한 라틴 군정의 공격도 막아낼 수 있도록 건설했다. 1939년에 공화국 연방은 다시 한 번 평화를 보장했고, 장벽을 완공하자 쿠바와 북부 멕시코를 독립시킨 뒤 이를 비무장지대로 하자고 라틴 군정에 제안했다. 그들의 해방작전이 완수되자 라틴 군정의 지휘관들은 다른 진영들이 자신들을 집어삼킬까 두려워했고, 그래서 그들은 선수를 쳐 이웃국가를 분열시키고 이 내부 불안 평정을 통해 그 국가를 차지하기로 결정했다. 이로 인해 그들의 관심은 태평양과 아프리카로 바뀌었고, 유럽 연합에 대항하는 아프리카 군벌과 쇼군 제국에 대항하는 동남아시아 지역을 지원했지만, 후자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러한 그들의 행동에 대한 보복이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1] 다수의 난폭한 폭민들에 의한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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