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13 18:18:09

후안 카를로스 와스모시


파일:파라과이 국장.svg
파라과이 공화국 대통령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 #0038a9; color: #fff;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카를로스 안토니오 로페스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 파쿤도 마차인 시릴로 안토니오 리바롤라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살바도르 호베야노스 후안 바티스타 힐 이히니오 우리아르테 칸디도 바레이로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베르나르디노 카바예로 파트리시오 에스코바르 후안 후알베르토 곤살레스 마르코스 모리니고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후안 바티스타 에후스키사 에밀리오 아세발 안드레스 엑토르 카르바요 후안 안토니오 에스쿠라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후안 바티스타 가오나 세실리오 바에스 베니그노 페레이라 에밀리아노 곤살레스 나베로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마누엘 곤드라 알비노 하라 리베라토 마르시알 로하스 페드로 파블로 페냐
제20대2 제25대 제26대 제27대
에밀리아노 곤살레스 나베로 에두아르도 샤에레르 마누엘 프랑코 호세 페드로 몬테로
제21대2 제28대 제29대 제30대
마누엘 곤드라 에우세비오 아얄라 엘리히오 아얄라 루이스 알베르토 리아르트
제29대2 제31대 제28대2 제32대
엘리히오 아얄라 호세 파트리시오 구기아리 에우세비오 아얄라 라파엘 프랑코
제33대 제34대 제35대 제36대
펠릭스 파이바 호세 펠릭스 에스티가리비아 이히니오 모리니고 후안 마누엘 프루토스
제37대 제38대 제39대 제40대
후안 나탈리시오 곤살레스 라이문도 롤론 펠리페 몰라스 로페스 페데리코 차베스
제41대 제42대 제43대 제44대
토마스 로메로 페레이라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 안드레스 로드리게스 후안 카를로스 와스모시
제45대 제46대 제47대 제48대
라울 쿠바스 그라우 루이스 앙헬 곤살레스 마치 니카노르 두아르테 페르난도 루고
제49대 제50대 제51대 제52대
페데리코 프랑코 오라시오 카르테스 마리오 아브도 베니테스 산티아고 페냐
<rowcolor=#ffffff> ※ 파라과이의 경우 임기가 중간에 단절되었다가 다시 집권해도 처음 집권했을 당시의 대수를 유지한다.
← 파라과이 집정관 }}}}}}}}}
<colbgcolor=#0038a9><colcolor=#fff> 파라과이 제44대 대통령
후안 카를로스 마리아 와스모시 몬티
Juan Carlos María Wasmosy Monti
파일:Juan Carlos Wasmosy.jpg
출생 1938년 12월 15일 ([age(1938-12-15)]세)
파라과이 아순시온
국적 파일:파라과이 국기.svg 파라과이
정당 파일:콜로라도당.png 콜로라도당
임기 제44대 대통령
1993년 8월 15일 ~ 1998년 8월 15일
배우자 마리아 테레시아 카라스코

[clearfix]
1. 개요2. 생애

1. 개요

파라과이 제44대 대통령이자 39년만에 나온 문민 정부이다.

2. 생애

헝가리계 파라과이인이며 1828년 브라질로 이민 온 집안의 후손이다. 본래 Vámosy라는 성씨가 파라과이에 정착한 후, 스페인어식인 Wasmosy로 바뀌었다. 아순시온 국립 대학교에서 물리학을 전공했으며 1962년 토목 엔지니어로서 회사를 설립하고 이타이푸 댐 건설 수주를 따넨 컨소시움의 대표이기도 했다.

1993년 5월 9일에 열린 대선에서 39.9%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1] 하지만 로드리게스 전 대통령의 개입이 있기도 했다. 취임 연설에서 전임 정부의 자유 무역 정책을 이어서 수행하고 교통, 건강, 교육 분야에서 증가하는 문제에 대처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와스모시는 정당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콜로라도당은 총선에서 상하 양원에서 가장 많은 의석을 얻었지만 야권이 연합하며 과반수를 차지했고 군부는 와스모시에 비협조적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특히 리노 세자르 오비에도 장군과의 갈등은 쿠데타 발발 직전까지 이어졌다.[2] 결국 오비에도 장군이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되는 것으로 협의를 보며 위기를 넘겼다. 하지만 파라과이 국민들은 대통령이 공갈에 굴복했다고 비난하며 격분했다. 하루 만에 오비에도의 장관직을 사임시키며 여론을 잠재웠다.

2002년 와스모시는 대통령 재임 중 공금 횡령 혐의로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항소심에서 보석과 가택 연금으로 감형되었다.

1995년 상반기와 1997년 상반기에 메르코수르 회장을 겸임했다.
[1] 1954년 이래 최초의 민간인 대통령이 되었다. [2] 오비에도 장군은 스트로에스네르 정부를 실각시킨 쿠데타의 핵심이었으며 정치적 영향력을 크게 확보한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