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문서: 황선홍/지도자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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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클럽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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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내용은 황선홍/국가대표 경력 문서 참고하십시오.3. 플레이 스타일
한 마디로 황선홍은 어떤 전술의 어떤 역할을 맡겨도 언제나 제 몫을 하는, 당시 아시아 기준으로는 만능 공격수였다. 그의 이런 장점은 패널티 박스 안에서 양질의 패스를 받지 않으면 무력화되는 동시대의 최용수와 김도훈, 팀의 전술이 자신 위주로 돌아가야 빛을 발하는 후배 국가대표 공격수인 이동국과 김신욱의 약점에 비춰봤을 때 국가대표팀이 그를 뽑을 수밖에 없는 매우 중요한 이유였다. 따라서 그가 선수 시절을 하는 동안 어떤 국가대표 감독이든 반드시 황선홍을 최전방 공격수로 썼으며, 황선홍이 국가대표에 뽑히지 않았을 때는 그가 부상 중이었을 때 밖에 없다.
최소한 우리나라 선수 중 그 당시 기준으로 훌륭한 183cm의 키와 피지컬, 100m를 12초에 뛰는 준수한 주력을 바탕으로 온갖 종류의 슈팅 기술을 실전에서 시도할 수 있는 수준[1]의 공격수였다. 발기술도 꽤 괜찮아서 순간적인 발밑 기술로 공을 지켜내거나, 상대 진영으로 공을 전진 시도하는데 큰 무리가 없었고, 시야와 패싱 능력도 나름 준수하게 갖추어 연계 플레이 역시 뛰어나 측면으로 빠져서 크로스를 올리거나 2선으로 내려와 공격 전개에 가담하는 등 처진 스트라이커도 소화 가능했다. 요약하자면 개인 전술의 폭이 매우 넓었다. 거기에 그는 넓은 활동 반경에 지능적인 오프 더 볼 움직임 역시 갖추고 있어 공간 활용에 뛰어났다. 이것이 그가 선수로 활약하던 당시 한국 국가대표팀의 모든 감독들이 결국은 황선홍을 기용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다.
국가의 자존심이 걸려 있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자국에서 벌어지는 2002년 월드컵 때 한국의 월드컵 역사상 첫 승을 노리던 첫 번째 경기에서 35세의 노장 선수가 선발 원톱으로 나왔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원래 2002년 월드컵 때도 황선홍이 주전이었고 안정환이 교체였다. 공격수를 넘어 축구 선수로서 환갑인 35세의 나이로 국대에서 주전이였다는 것만으로 그의 재능과 센스는 히딩크 감독도 인정했다.[2] 그만큼 황선홍의 클래스가 뛰어났다는 것이다. 본래는 가급적 체력이 좋은 젊은 선수를 기용하고 싶었지만 그가 제일 뛰어났기에 기용된 것이다.[3] 그의 친구이자 동 시대의 또다른 레전드인 홍명보의 경우 그가 차출되는 순간 팀 전술이 쓰리백 오버래핑 위주 전술로 획일화된다는 황당한 단점을 지녔다는 점과 대조된다.
세계무대에서는 한계가 명확했으며 유럽 기준으로는 평범한 수준이었다는 이야기가 많다. 당대 유럽의 수준급 스트라이커만큼의 화려함이나 중압감은 없었던 건 사실이나, 지금보다 훨씬 열악한 환경에서 성장하여 아시아권에서는 정상급 스트라이커로 인정받았던 그가 당대의 세계적 수준의 선수들과 비교되어 폄하될 이유는 없다. 애초에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출신 선수가 유럽에서 뛴다는 건 아무리 실력이 출중해도 90년대 당시에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4] 근래의 한국 팀 스트라이커들이 AFC 아시안컵을 비롯한 아시아권 대회에서도 죽을 쑤는 한편, 황선홍은 당시 아시아권에서는 확실한 득점 자원임을 증명했고 FIFA 월드컵에서도 만만찮은 팀을 상대로 두 골이나 넣어봤으니 말이다.
주로 최전방의 타켓형 스트라이커로 뛰는 경우가 많았는데, 움직임과 공간 창출이 굉장히 뛰어났다. 항상 수비수 2~3명을 끌고 다니며 공간을 만들었고 수비를 등지고 하는 플레이도 뛰어났다. 그에 따라 슈팅 기회를 직접 갖기도 했지만 다른 2선 선수들에게 공간을 제공해주는 역할을 많이 했다. 또한 순간적인 방향 전환과 침투, 뛰어난 위치 선정으로 슈팅 기회를 많이 가졌는데 오히려 이것이 골 결정력 부족이라는 폄하로 이어지기도 했다.[5][6] 다만 선수 시절 지독한 불운으로 늘 부상에 시달렸고,[7] 그로 인해 젊은 시절 그의 플레이는 기복이 있었다. 황선홍의 부상과 비난에 대해서는 이후에 상세히 후술한다.
이렇게 한국 축구에서 유니크한 스타일을 보여주었다 보니, 그의 후계자를 찾는 데에도 꽤나 애를 먹었다. 황선홍 은퇴 이후 황선홍의 역할을 맡았던 선수는 이동국, 정조국, 조재진, 박주영, 이근호, 김신욱 등이 있지만 모두 황선홍과 비교할 때 조금씩 아쉬운 활약상을 보여줬다.
4. 총평
황선홍은 최순호와 함께 우리나라 축구 역사상 가장 뛰어난 원톱 스트라이커라 할 수 있는 인물이다. 선수 생활을 하던 14년 간 국가대표팀 부동의 스트라이커로 활약했고, 동시대의 모든 공격수는 황선홍과의 경쟁에서 밀렸다. 히딩크도 체력을 중시하며 젊은 선수들 위주로 대표팀을 구성했는데 그에 따라 초반에는 대표팀에 승선하지 못했다. 그러나 대표팀은 골 결정력 부족으로 히딩크로부터도 킬러가 없다는 소리를 들어야했고 결국 황선홍이 합류하고나서 킬러가 왔다는 극찬과 함께 무한 신뢰 받았다. 황선홍은 공격수로는 환갑일 나이인 33세로 다시 안정환[8], 최용수[9], 김도훈[10] 등을 모두 제치고 최전방 원톱 스트라이커 주전 자리를 꿰찼다. 결국 그 어떤 선수도 부상이 아닌 황선홍과의 주전 경쟁에서 이기지 못했다.황선홍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바로 부상이다. 황선홍은 축구 인생에 전환기를 맞이할 즈음이면 공교롭게도 크고 작은 부상이 닥쳐와서 선수생활 내내 부침이 심했다. 특히 전방 십자인대가 두 번[11]이나 파열됐는데 군대에서 전방 십자인대가 파열되면 곧바로 의병 제대를 할 수 있는 매우 심각한 부상이다. 특히 축구 선수에게 십자인대 파열이란 선수 피지컬에 큰 영향을 주고 선수 생활 내내 고통스러운 재활과 보강 훈련을 해야 한다. 십자인대 파열로 내리막길을 걷게 된 축구 선수들도 많다.[12][13]
이런 부상을 무려 두 번이나 겪고도 재활에 성공해 극복하고 계속해서 대표팀의 주전 공격수로 발탁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그가 대체 불가능한 선수였다는 뜻이다. 간혹 어떤 이들은 동시대 공격수인 '독수리' 최용수가 A매치 67경기 27골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황선홍보다 더 활약했다고 착각하는데 최용수가 활약했던 98 월드컵 예선 때는 황선홍이 부상으로 아예 대표팀으로 뛰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독하게 따라다니던 부상만 아니었다면 훨씬 더 좋은 커리어를 기록할 수 있었던 선수였다.
선수 시절 끝없는 불운으로 부상에 시달렸고 욕도 많이 먹었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기대와 주목을 많이 받는 선수였다. 90년대에는 심지어 황선홍 급류차기 훈련이라는 황당한 기사 등 대한민국 축구의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는 선수였다. 그래도 마지막인 2002년 월드컵에서 명예 회복을 하며 선수 생활을 잘 마무리했기 때문에 불운으로 끝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이후 황선홍의 플레이를 직접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폄하 당하는 경우가 있다.
4.1. 비난과 폄하 그리고 오해
왜 그토록 욕을 먹었는가?일단 90년대에는 사람들이 축구에 대한 지식이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 그 때문에 경기에서 지거나 못했을 경우, 대표팀에 대한 비난이 미드필더나 수비수 또는 전술에 대한 비판이 아닌, 오로지 최전방 공격수에게만 집중되었다. 90년대 한국 축구는 공격보다는 수비 불안이 더 큰 문제였고, 지금도 마찬가지로 한국 축구는 늘 수비가 문제다. 그러나 동시대 국가대표의 붙박이 중앙 수비수였던 홍명보에게 비난이 쏟아지는 경우는 전혀 없었다는 점은 의아한 일이다. 특히 98 프랑스 월드컵 네덜란드전 5:0 참사 때도 홍명보를 비롯한 수비수에 대한 비난은 없었고, 오히려 십자인대 파열 부상으로 벤치에 앉아있던 황선홍을 욕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때까지 수비진이나 미드필더진은 비난에 있어서 성역이였고, 모든 욕은 골을 못넣은 공격수, 그리고 그런 공격수를 기용한 감독이 욕을 먹었다.[14] 즉, 경기에서 지면 무조건 공격수가 욕을 먹던 시절이었다.[15][16]
그 때문에 황선홍은 국가대표로서 무수히 많은 활약을 했음에도 94 미국 월드컵 볼리비아전 딱 한 경기에서 실망스러운 모습으로 욕이란 욕은 다 먹고, 심지어 그의 커리어도 폄하되고 있다. 사실 94 미국 월드컵 볼리비아전 외에 딱히 황선홍이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인 것은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4강전을 제외하면 딱히 없다. 그저 단 한 경기로,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으로, 황선홍은 과도한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대가를 너무나도 혹독하게 치러야만 했다.[17]
사실 황선홍이 진짜로 실력 없고 욕만 먹는 선수였다면 94 월드컵 이후 묻혔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94 월드컵 이후로도 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96 AFC 아시안컵, 96 애틀란타 올림픽[18] 등에서 골을 넣으며 맹활약했다. 물론 94 월드컵 이후 생겨난 안티팬들은 맹활약하는 황선홍을 보며 아시아용이라고 비아냥댔지만, 결국 황선홍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하는 공격수라는 건 부정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하는 공격수가 월드컵에서 못했던 것에 대한 좌절감이 더 큰 비난과 분노로 이어진 것이다.[19]
98 월드컵을 앞두고 한일전에서 역전골을 넣으며 화려하게 복귀했고, 그에 따른 기대도 대단했다. 그동안 한국 대표팀이 실행해보지 않았던 황선홍과 최용수의 역대 최강의 투톱을 가동할 수 있다는 큰 기대가 있었지만 결국 부상으로 좌절됐고, 98 월드컵은 완전히 망쳐버린 흑역사가 되었다. # 그리고 엉뚱하게도 이런 기대와 그에 따른 실망감은 일부 안티팬들에 의해 황선홍의 비난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왜 중국전에 무리해서 부상을 당했냐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과거가 있어서인지 국대 스트라이커들에 대해 연민의 감정을 많이 표시한다. 예를 들어 박주영이 한창 까일 때에도 이 정도는 너무 부당하다는 의견을 내비친 적도 있고, 이동국의 경우에는 포항 출신이라는 것 이외에도 많은 공통점이 있어서인지 과거의 자신과 겹쳐보는 듯한 발언을 많이 한다. 2013년 올스타전에서 제 2의 황선홍으로 노장 축에 속하는 이동국을 뽑기도 했다.
아시아에서만 활약했다?
역대 2위에 해당하는 황선홍의 A매치 103경기 50골(경기당 0.49골)에 대해 아시아에서만 넣은 골이라는 폄하가 있다.[20] 그러나 AFC에 속한 이상 AFC 아시안컵 예선과 FIFA 월드컵 예선 때문에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은 당연히 아시아팀들과 경기를 많이 한다. 황선홍 뿐이 아니라 다른 모든 선수들도 아시아팀과 비아시아팀과의 경기 비율은 비슷한 수준이다.
어차피 역대 한국 공격수 중에 유럽 빅리그에서 성공적으로 활약한, 최고의 공격수 중 한명으로 평가받은 선수는 차범근과 손흥민 뿐이고 이 선수들도 A매치 득점 대부분을 아시아팀 상대로 기록했다.[21][22]
유럽이나 남미의 유명 공격수들도 약팀과의 경기에서 몰아치기를 하는 것은 다 마찬가지이다. 심지어 현시대 최고의 선수인 리오넬 메시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도 그렇다. 포르투갈의 전설적인 골잡이 에우제비우는 호날두가 자신의 A매치 골기록을 넘어서자 나는 리히텐슈타인이나 아제르바이잔과는 경기한적 없다며 꼬집었었고 실제로 호날두의 대표팀 득점을 뒤져보면 7골을 넣은 리투아니아를 비롯해 라트비아, 아르메니아, 안도라, 에스토니아, 페로제도 같은 약체팀들에 대놓고 몰아넣었다. 2020년 11월까지 호날두가 A매치에서 기록한 102골중에 피파랭킹 50위권 안에 있는 팀 상대로 기록한 득점은 28골에 불과하다.
호날두보다야 덜하지만 메시도 크게 다르진 않다. 같은 남미에서 매번 마주치는 브라질과 우루과이에게 5골씩 기록한걸 제외하면 강팀 상대로 다득점한 적이 없다. 베네수엘라, 과테말라, 파나마, 볼리비아, 에콰도르 같은 중남미 약체팀들 상대로 열심히 몰아넣었고 스페인(2골), 독일(1골), 프랑스(1골) 같은 유럽 강호들 상대론 조용했다.
황선홍의 클래스가 아시아를 넘어서지 못한 것에 대해서야 할 말이 없지만 황선홍을 콕 집어 아시아 몰아넣기라고 그가 넣은 골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것은 부당한 폄하다. 또한 아시아팀과 비아시아팀에 대한 골을 따로 분리하여 비교하면 황선홍이 역대 1위이다. 심지어 그는 선수 생활 내내 부상에 시달려 대표팀 경력에서 최소 2년 이상의 공백이 있는 선수다.[23]
[1]
사실 프로 리그의 수준은 일단 제외를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월드컵에 나갈 수 있는 혹은 월드컵을 개최할 수 있는 나라의 프로축구 리그에서 뛰는 프로선수쯤 되면 기본적으로 본인이 상상할 수 있는 웬만한 기술은 다 구사할 수 있다. 이걸 실전에 써먹을 수 있느냐가 문제인데, 그걸 국내 프로 리그에서만이 아니라 웬만한 실력의 다른 아시아 국가대표팀과의 시합에서도 써먹을 수가 있는 실력의 선수였다.
[2]
한국의
베르캄프나
판바스턴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3]
심지어 당시에는 세계 축구계에서 알아주던 리그인
세리에 A에서 뛰고 있던 안정환조차도 황선홍의 백업이었고 실제 안정환 본인도 황선홍이 있으니 자신에게는 기회가 없을 것이라고 말한 것만 봐도 황선홍이 얼마나 대단한 선수인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더욱이 황선홍의 포지션인
중앙 공격수가 축구에서 얼마나 격렬하고 가혹한 자리인지를 생각하면 더 말을 할 필요도 없다.
[4]
그걸 80년대에 해낸
차범근이 사기캐인 것이다.
[5]
동시대에 그의 포지션에서 뛰었던 최용수와 김도훈은 움직임이 적어 뛰어난 미드필더가 없으면 최전방에 고립되는 일이 잦았다.
[6]
즉, 경기 중에 다른 공격수들에 비해 워낙 슈팅 기회를 많이 갖다보니 그 슈팅들이 모두 골로 이어지진 않으면서 황선홍은 개발이라는 오명을 받았다. 그런데 기록을 비교해 보면 다른 공격수들은 아예 슈팅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심지어 황선홍이 그렇게 날려먹은 것도 월드컵이라는 세계적인 무대였으며, 그것도 상대가 월드컵에 출전할 정도의 실력을 가진 세계적인 선수들과의 대결에서 집중마크 당하면서도 혼자 힘으로 슛 찬스를 만든 것이기에 더더욱 대단할 수 밖에는 없다.
[7]
마지막 대회였던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조차 폴란드와의 첫 경기에서 허벅지 부상을 입고 이후부터 진통제를 맞고 뛰었다.
[8]
황선홍의 교체 멤버로 선발되었지만 폴란드 전 이후 황선홍이 허벅지 부상을 입으면서 포르투갈전, 이탈라이전, 스페인전에서는 안정환이 선발로, 황선홍이 교체로 나왔다. 참고로 안정환이 황선홍의 백업으로 나오던 다시 2002년에는 그 당시 세계 최고의 축구 리그인 세리에A에서 뛰던 시절이었다.
[9]
부상으로 폼이 떨어진 상태에서 미국전에서 교체 출전했으나 결정적인 기회를 날린 것 때문에 이후 경쟁에서 완전히 밀렸다.
[10]
황선홍의 어깨 부상 시절 히딩크호의 공격수로 활약했지만 결국 황선홍에 밀려 최종 엔트리에서 탈락했다.
[11]
92년 독일에서 부퍼탈에서 막 주목 받기 시작할 때 한 번 파열,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중국과의 평가전에서 같은 부위 다시 파열.
[12]
대표적으로 어려서부터 축구 천재라 불리며 한국 축구의 기대주였던 고종수는 2002년 십자인대 파열 부상을 입고 그 후로 사실상 몰락하여 선수 생활도 일찍 마치게 된다.
[13]
황선홍의 장남인 황재훈은 중학교에서 축구 선수로 활약하다 십자인대 파열로 축구 선수를 그만두었다.
[14]
98 월드컵 멕시코 전에서 3:1로 패배 후 차범근 감독이 욕을 먹었는데, 그 이유는 공격수인 최용수를 기용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15]
근데 사실 이때 황선홍이 워낙 욕을 바가지로 먹어서 그렇지 독일전에서 세 골 먹힌 골키퍼 최인영도 만만찮게 욕을 먹었다.
[16]
사실 지금도 똑같은 게 지금이야 인터넷이 활성화되어서 못하는 선수면 어느 포지션이든 욕을 먹지만 특히 공격하는 포지션이 욕을 많이 먹는건 똑같다. 2010년의 이동국을 생각해보면 그런게 정성룡이 큰 실수를 해서 1점을 주었지만 그 물회오리 임팩트때문에 엄청난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방송에서도 이동국은 그 물회오리에 대해 언급을 한다. 2014년 박주영도 따봉이라는 좋지않은 별명을 얻게 되었고 말이다. 사실 공격수가 욕을 많이 먹는 이유는 그만큼 기대가 매우 크고 득점을 해줘야 하는 포지션이며 역대 프로선수 중에서도 공격수가 가장 인기많고 인지도도 높다.
[17]
사실 90년대 한국축구계의 선수육성, 관리수준은 심리, 신체 기타 모든 측면에서 팬들의 기대에 비해 그야말로 참혹한 수준이었다. 90년대에는 말그대로 전근대적으로 훈련을 했고 구타가 일상적이었다. 선후배 빠따는 기본이었다. 감독에게도 소위 빠따당하는 것은 일상적이었다. 안정환은 그때 많이 맞았다고 한다. 축구하는 학생들도 흙바닥에서 축구를 했다. 그래서 히딩크도 자서전을 통해 그가 베르캄프나 반 바스텐을 연상시키는 좋은 움직임과 슈팅 감각을 가졌다며, 조금 더 일찍 유럽에서 체계적인 과정을 거쳤으면 훨씬 대단한 선수가 되었을 거라고 언급한바 있다. 물론 이것은 동시대 다른 선수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이야기겠지만, 그는 혹사와 팀의 선수관리 실패로 인한 큰 부상을 여러번 겪었으며 또 대표팀 부동의 공격수였기에 훨씬 큰 기대에 부응해야만 했고 또 비난받아야만 했다.
[18]
와일드 카드 출전
[19]
우리나라 최고인데 왜 세계 무대 가면 그모양인가 하는 식의 비난이지 다시는 국가대표에 못나오게 해야한다는 식의 비난이 아니었다. 왜냐면 이것은 세계무대에 대한 경험자체가 90년대에는 많지 않았기 때문에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20]
역대 1위는 차범근
[21]
차범근은 키커 랑리스테 WK 1회, IK 4회. 손흥민은 2020-21 PFA 올해의 팀 선정, 2021-22시즌 프리미어 리그 득점왕으로 세계 기준으로도 A급 이상의 공격수임을 확실하게 인정받았다.
[22]
애초에 선수 개인의 클래스를 떠나서 한국 국적의 선수가 자신의 커리어 동안 A매치에서 만날 확률이 가장 높은 팀들이 아시아 팀들이다. 아시아에서의 경쟁을 이겨내야 월드컵에 나갈 것이 아닌가. 이는 다른 대륙의 선수들에게도 마찬가지다.
[23]
심지어 아직까지도 대한민국 남자 축구 대표 선수 중에서는 이렇게 부상을 달고 살았던 황선홍보다도 더 많은 득점자는 세계 축구계에서 아시아인이면서 유일하게 "황제"라는 칭호를 지닌 차범근 밖에는 없고, 그 손흥민도 2024년 11월을 기준으로 황선홍과 동률이니 그의 대단함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