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하의 대외 전쟁·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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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전투 | 교전국 | |
<colbgcolor=#ece5b6>
호수천 전투 ,1041, |
북송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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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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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 | ||
몽골-서하 전쟁 ,12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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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천 전투 好水川 戰鬪 |
||
<colbgcolor=#59412c><colcolor=#ECE5B6> 시기 | 1041년 (경종 4년) | |
장소 |
호수천 |
|
교전국 |
<rowcolor=black> 서하 (수세) 승
|
북송 (공세) 패
|
주요 인물 |
지휘관 [[서하| 西夏 ]] 지휘관 불명
|
지휘관 [[북송| 大宋 ]] 임복
|
병력 | 병력 규모 불명 | 북송군: 18,000명 |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군 궤멸 |
결과 | 서하의 승리 |
[clearfix]
1. 개요
서기 1041년 서하군이 북송군을 호수천(好水川: 지금의 닝샤 후이족 자치구 룽더현 서북쪽)에서 섬멸한 전투.2. 배경
탕구트인은 강족의 후예로, 간쑤성, 산시성 일대로 이주한 이래 당나라의 지배를 받았다. 9세기 후반 황소의 난이 심화되면서 장안이 반란군에게 함락당하자, 당나라 조정은 탕구트족에게 구원을 호소했다. 이에 탁발사공이 반란 토벌에 함께하여 장안 수복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당나라는 이에 보답하고자 황실의 성인 이씨를 하사하고, 정난군절도사에 봉하여 은, 하, 수, 정, 유 등 5개 주를 하사했다.송나라 건국 후, 탁발사공의 아들이자 탕구트 수령 이이홍은 태위 칭호를 하사받은 보답으로 송나라에게 조공을 바쳤다. 이후 980년대에 수령 이계봉과 동생 이계천이 권력 분쟁을 벌이다가, 이계봉은 송나라에 항복하고 이계천은 요나라에 투항했다. 그러다 997년 이계천이 송에 귀순하면서, 탕구트의 혼란은 일단락되었다. 이계천의 아들 이덕명은 수령 직을 이은 뒤 독자적인 행보를 시도하다가 송나라의 침입을 받았으나 1005년 격퇴한 뒤 화의를 체결하여 송 황실로부터 황실의 성인 조씨 성을 하사받았다. 이후 이덕명은 요나라, 송나라와 친선을 유지하며 세력을 키웠고, 홍경성을 축조하여 독립 국가의 기반을 마련했다.
1032년 하국공 직을 계승한 이원호는 1038년 9월 조씨 성을 버리고 이씨로 성을 복구한 뒤, 황제를 칭하고 국명을 대하(大夏)로 정했으며, 연호를 친수례법연조(天授禮法延祚)라 하였다. 이후 10만 대군을 일으켜 연주를 공격하는 등 송나라에 대항할 뜻을 노골적으로 보였다. 이에 송인종은 더이상 좌시해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하고 1040년 한기를 섬서경락무마사에 봉하고, 범중엄을 전운사로 삼아 장차 한기로 하여금 경원로를 통해 서하를 공격하게 하고, 범중엄은 부연로를 통해 서하를 치게 했다.
서하의 침략이 갈수록 심해지자,1041년 정월 한기가 서하로 원정군을 투입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정은 이를 따르기로 하고 군대에게 출동할 기일을 경계하여 하달했다. 이에 범중엄이 간언했다.
정월 안에 군사를 일으키면 군사들과 말의 양식과 사료를 움직이는 데는 만 가지가 넘는 계획이 있으며, 험한 지역으로 들어가서 요새 밖은 비나 눈이 내리고 크게 추우며, 이슬에 노출되어 쓰러지게 되니, 적이 이 기회를 타게 된다면 상하는 것이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지금 부연로의 성루, 병갑, 양초, 사마의 공격과 수비에 대한 계책은 이미 순서를 갖추고 있어서 적이 먼저 도착하는 것을 걱정할 것이 없으니, 청컨대 봄이 되어 따뜻해질 때까지 기다리십시오. 적의 말은 삐쩍 마르고 사람들은 굶주렸으니, 그 세력은 제압하기 쉽고, 도 그들이 밭 갈고 씨 뿌리는 것을 소란스럽게 할 수 있는데, 설사 커다랗게 획득하는 것이 없을지라도 역시 다른 걱정거리는 갖게 되지는 않습니다.
얼마 전에 이미 칙서를 내려서 번족의 수령들을 불러서 이끌어 주었고, 신 역시 사람을 파견하여 그들의 사정을 탐문하였는데, 조정에서 원방에 있는 사람들을 부드럽게 대한다는 뜻을 전달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중국의 칭호를 참월하지 않게 하고 때맞추어 진공하는 의례를 닦게 하고, 조정도 역시 굽어서 좇을 수 있습니다. 지금의 부연은 옛날에 진공하는 길이니, 원컨대 조정에서 이 한 길을 존치시키고 제장들로 하여금 병사를 챙겨서 엄히 방비하면서 적이 이르면 치게 하십시오. 토벌을 아직 시행하지 않은 것을 틈타서 신이 은혜를 베푸는 뜻을 표시하는 것을 용납하시면 세시 간에 혹은 불러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신은 아마도 정의를 떼어놓아 끊게 되고, 무기를 뉘어놓은 것이 무기한으로 있게 됩니다.
만약에 신의 계책을 채용하였는데 세월이 지나가도 효험이 없다면, 천천히 군사를 일으킬 것을 도모하십시오. 먼저 수, 유를 빼앗아 그들의 요해처를 점거하고, 군사를 주둔시켜서 전지를 경영하는 것이 오래 버티기 위한 계책입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다산, 횡산 일대에 사는 번, 한인들의 호구는 한병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불러서 항복시킬 수 있습니다. 혹은 바로 달아나서 숨는다고 하더라도 역시 이들도 서쪽에 있는 적의 한쪽 팔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강역을 개척하고 구적을 제압하는 데는 가볍게 거병하는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얼마 전에 이미 칙서를 내려서 번족의 수령들을 불러서 이끌어 주었고, 신 역시 사람을 파견하여 그들의 사정을 탐문하였는데, 조정에서 원방에 있는 사람들을 부드럽게 대한다는 뜻을 전달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중국의 칭호를 참월하지 않게 하고 때맞추어 진공하는 의례를 닦게 하고, 조정도 역시 굽어서 좇을 수 있습니다. 지금의 부연은 옛날에 진공하는 길이니, 원컨대 조정에서 이 한 길을 존치시키고 제장들로 하여금 병사를 챙겨서 엄히 방비하면서 적이 이르면 치게 하십시오. 토벌을 아직 시행하지 않은 것을 틈타서 신이 은혜를 베푸는 뜻을 표시하는 것을 용납하시면 세시 간에 혹은 불러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신은 아마도 정의를 떼어놓아 끊게 되고, 무기를 뉘어놓은 것이 무기한으로 있게 됩니다.
만약에 신의 계책을 채용하였는데 세월이 지나가도 효험이 없다면, 천천히 군사를 일으킬 것을 도모하십시오. 먼저 수, 유를 빼앗아 그들의 요해처를 점거하고, 군사를 주둔시켜서 전지를 경영하는 것이 오래 버티기 위한 계책입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다산, 횡산 일대에 사는 번, 한인들의 호구는 한병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불러서 항복시킬 수 있습니다. 혹은 바로 달아나서 숨는다고 하더라도 역시 이들도 서쪽에 있는 적의 한쪽 팔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강역을 개척하고 구적을 제압하는 데는 가볍게 거병하는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조정이 조서를 내려서 범중엄이 청한 뜻을 따르겠다고 하자, 범중엄이 다시 상소를 올렸다.
부연로는 경계 지역으로 들어가는 곳이어서 제로에 비하여 제일 머니, 마땅히 먼저 성채를 수리하여 복구하여야 합니다. 청컨대 2개월 반 동안에 군사를 합하여 2만 명을 가지고 영평채에서부터 나아가서 승평채를 쌓고, 승평채의 공사가 완공되기를 기다려서 이로운 곳을 선택하여 나아가서 쌓으며, 이를 이용하여 조원호의 동쪽 경계 지대에 있는 군마를 견제하여 힘을 합쳐서, 저들이 서쪽으로 환경, 경원에 있는 군사를 막을 수 없게 하는 것도 역시 세 길로 함께 나아가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조정에서는 범중엄이 부연로 한곳에 남아서 서하를 막아내기로 했지만, 여전히 범중엄과 하송, 한기 등에게 조서를 내려서 같이 모의하여 기회가 있을 때에 호응하고 편리한 길을 택하여 조만간에 군사를 출동시키는 것에 얽매이지 않게 하였다. 범중엄은 전후로 여섯 번 상소를 올린 끝에 승평 등 12개의 성채에 성을 쌓으니, 번, 한의 백성들은 뒤를 이어가면서 생업에 복귀했다. 하지만 하송이 "경원로의 군대만 출격시키고 부연로를 남게 한다면 변경에서 빙빙 돌게 되며, 경원로에 있는 군사에만 원정을 위임하면 적을 모아놓게 해 계책에 떨어지게 된다"고 반대하면서, 송나라는 조정은 원정의 구체적인 계획을 정하지 못했다.
그러던 1041년 2월, 이원호가 10만 대군을 이끌고 송나라를 쳤다. 그는 먼저 호수천에 주력군을 숨겨두고, 별동대를 파견해 위주를 노략질하게 했다. 마침 변경을 순시하던 한기는 이 소식을 듣고 급히 진융군으로 달려가서 그 군사를 모두 내보내 막게 했다. 또한 1만 8천 정예병을 모집한 뒤 임복 장군으로 하여금 적을 치게 했다. 경원주박도감 상역을 선봉으로 하고, 주관, 경원도감 무영이 이를 잇고, 행영도감 왕규, 참군사 경부가 뒤를 좆게 했다.
한기는 임복을 대면한 뒤 계책을 제시했다. 그는 여러 영채의 서로의 거리는 40리로 하고, 길 가까이로 쉽게 가도록 하며, 추량은 충분히 제공하게 했다. 그리고 형세를 살펴서 아직 싸우지 않아도 되면 바로 험한 곳을 근거로 하여 매복하고서 서하군이 돌아가기를 기다렸다가 요격하게 했다. 임복 등은 바로 길을 나섰고, 한기는 친히 성 밖으로 나아가 그에게 거듭 경계했다. 이리하여 호수천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전투 경과
임복은 1만 8천 정예병을 이끌고 출정한 뒤 새로 만든 참호의 밖에서부터 경무장을 한 기병 수천 나누어서 회원성, 날릉천으로 향하여 가다가 진융군서로도순검 상정, 동순검내시 유숙을 만났다. 얼마 후 서하군과 맞붙어서 장가보의 남쪽에서 수백 명의 목을 베었다. 적 기병이 말과 양, 그리고 낙타를 버리면서 거짓으로 패주하자, 상역은 기병을 이들을 추격하였고, 임복도 역시 병사를 나누어 스스로 거느리며 뒤를 밟았다.석양이 질 무렵, 임복과 상역은 군사를 합쳐서 호수천에 주둔하였고, 주관, 무영은 군대를 합하여 용락천에 주둔하였는데, 양측은 산을 중간에 두고 5리 정도 떨어졌다. 다음날 군사를 회합하기로 약속하고 적과 대치했다. 이때 정찰병이 적의 병사가 적다고 전하자, 임복 등은 이들을 가볍게 봤다. 하지만 길은 멀어지고 추량이 이어주지 못해서, 사람과 말이 먹을 것이 부족하여 사흘간 굶었다. 그럼에도 임복 등은 적이 유인하는 것임을 깨닫지 못한 채 계속 쫓아갔다.
2월 14일, 원정군은 용간성의 북쪽에 도착했다. 이때 서하의 대군이 하천을 따라서 가는 광경이 포착되었다. 그들은 육반산 아래로 내려와 양목륭성과 5리 떨어진 지점에 진지를 세워 송군과 대치했다. 임복 등은 그제야 적의 계략에 떨어졌다는 걸 깨달았지만, 이제와서 후퇴했다가는 적의 추격에 몰살당할 가능성이 컸기에, 어쩔 수 없이 전투를 벌이기로 했다. 상역이 말을 달려서 서하군의 선봉대와 교전하자, 적군이 철기병을 풀어서 아직 정열을 하지 못한 임복의 본대를 공격했다.
진시(오전 8시)부터 오시(낮 12시)까지 전투가 이어졌고, 송군은 산을 등지어 승지를 점거하려 했다. 이때 매복했던 적이 산의 뒤에서부터 출현해 내려오면서 공격하니, 송군 장병들은 대부분 낭떠러지로 떨어져서 죽었고, 상역과 유숙은 사투를 벌이다 전사했다. 적군이 군사 수천 명을 나누어 송군의 후방을 막아 포위 공격하였고, 임복은 힘껏 싸우다가 몸에 10여 발의 화살을 맞았다. 소교가 임복에게 속히 피하라고 권하자, 임복이 말했다.
"나는 대장이 되어서 군사가 패배하였으니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할 뿐이다."
그는 사인철간을 휘두르며 몸을 빼내어 사투를 벌이다가 창에 뺨을 찔려 목구멍이 잘려서 죽었다. 임복의 아들인 임회량도 역시 호수천에서 전사했다. 이에 앞서, 한기는 위주도감 조진에게 명하여 와정에 있는 기병 2,200명을 거느리고 가서 임복의 부대의 후방을 지원하게 했다. 조진은 곧 주관, 무영과 더불어 요가천에서 군사를 모았다. 그런데 적군이 임복 등을 섬멸한 여세를 몰아 요가천의 송군까지 덮쳤다. 왕규가 양목륭성에서부터 주둔하고 있던 병사 4,500명을 이끌고 와서 주관의 군사가 있는 서쪽에 진을 치고서 요가천을 포위한 서하군을 공격했지만, 포위망이 견고하여 깨뜨릴 수 없었다.
무영은 중상을 입어 군사를 돌볼 수 없었고, 적군이 오시(낮 12시)부터 신시(오후 4시)까지 더욱 많이 도착하여 공세를 퍼부었다. 결국 동쪽에 치우쳐 있던 보병이 먼저 무너지니, 송군은 궤주하였고 무영, 조진, 왕규, 경부도 모두 전사했다. 왕규는 적 수백 명을 격살하고 철편을 구부리다가 손바닥이 파열되었지만, 오히려 분발하면서 태연자약했다. 타고 있던 말이 세번 화살을 맞고 쓰러지자 말을 세 번 바꿔탔다. 마지막에는 말에서 내려서 좌우로 달려나가 적군 수십 명을 죽였지만, 날아온 화살이 눈을 꿰뚫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무영은 패배를 면할 수 없음을 알고 경부에게 피할 것을 권고했지만 경부가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무영이 탄식하며 "그대는 문리라서 군사에 관한 책임이 없는데, 어찌하여 나 무영과 함께 죽으려고 하시오?"라고 하였고, 주관 역시 권고했으나 경부는 끝까지 싸우다가 창에 몇 군데를 찔려 전사했다. 오직 주관만이 남은 무리 천여 명을 이끌고 민원을 지키면서 사투를 벌였고, 밤이 되자 서하군이 물러났다. 이후 이원호는 범중엄의 군대가 파병했다는 소식을 듣고 국내로 돌아갔다. 이리하여 호수천 전투는 막을 내렸다.
4. 결과
호수천 전투는 송나라에게 있어 큰 타격이었다. 정예병 1만 8천 명이 몰살당했고, 서하 전선에서 활약하던 장수들이 대거 전사했다. 이원호는 "짐은 위수에 몸담고 장안으로 직행하려 한다."며 기세등등했지만, 범중엄이 군기를 엄중하게 하고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진지 구축과 전술 개발 등에 주력하면서 송군이 강해지자 더 이상 밀어붙이기 힘들어졌다. 범중엄은 수비에 치중하며 정면 대결을 피했고, 이민족들의 안착에 전심을 다했으며, 1042년 마보채를 기습 공격하여 승리한 뒤 대순성을 극비리에 수축한 후 서하군 6만 명의 공세를 막아냈다.서하군은 호수천 전투 이후에도 송군과 회전을 벌일 때마다 승리했지만, 범중엄이 수비에 전념하며 공세를 번번이 막아내자 곤란한 처지에 처했다. 게다가 송나라가 무역을 중단해버리는 바람에 식량, 포목 등 생활용품이 부족해지면서 민심이 동요했고, 민족과 계급 갈등이 심해지면서 부족민들이 저항하거나 송나라로 탈주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결국 이원호는 송나라와의 화해를 모색했고, 송나라 역시 요나라와 전쟁 중이어서 서하와 더 이상 전쟁을 벌이지 않기로 했다. 그리하여 1044년 송이 서하에게 매년 공물을 보내는 대신 서하는 송의 신하국이 되는 조건의 화약이 체결되었다. 서하의 황제는 하국왕(夏國王)에 봉해졌고, 송은 매년 비단 13만 필, 은 5만 냥, 차 2만 근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