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한방섭(韓芳燮) |
생몰 | 1890년 2월 28일 ~ 1958년 10월 9일 |
출생지 | 전라남도 곡성군 석곡면 덕흥리 |
사망지 | 전라남도 곡성군 |
매장지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한방섭은 1890년 2월 28일 전라남도 곡성군 석곡면 덕흥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천도교 신자로, 1924년 9월 8일 김영학(金永鶴)과 함께 석곡면 능파리에 거주하는 김재우(金在宇)가 다량의 벼를 매각했다는 것을 듣고 독립운동 자금 1만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김재우가 이에 응하지 않자 무력으로 재차 요구하다가 결국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1924년 10월 광주지방법원에서 강도상인 혐의로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받고 광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출옥 후에는 불령선인으로 간주되어 형사들의 감시를 받았으며, 그의 큰 아들은 탄광으로 징용되었고 작은 아들은 징병되었다. 8.15 광복 후에도 그는 강도로 낙인 찍혀 주민들에게 손가락질당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가족들까지도 할아버지의 독립운동 사실을 거론하기를 꺼렸다. 심지어 부인은 남편의 독립운동 자료들을 모두 불태우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렇게 말년을 불우하게 보내던 그는 1958년 10월 9일에 사망했다.
한방섭의 손자 한정옥씨는 조부의 동료인 김영학이 독립유공자로서 1990년 건국훈장을 추서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조부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한방섭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고 2010년 그의 유해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한정옥 씨는 “할아버지는 살 만했던 집안이 자신 때문에 어려워졌다면서 늘 미안하다고 말씀하셨다”면서 “고문 후유증으로 몸이 아프신 데도 돌아가시기 몇개월 전까지 산비탈을 일구셨다”고 회고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