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21:59:10

하용기

성명 하용기(河龍基)
생몰 1891년 1월 15일 ~ 1964년 4월 25일
출생지 전라북도 임실군 둔남면 오수리
사망지 전라북도 임실군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하용기는 1891년 1월 15일 전라북도 임실군 둔남면 오수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23일 오수리 장날을 이용해 이기송(李起松), 오병용 등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했다. 3월 23일 오후 2시, 그는 오수리 장터에서 천도교도, 기독교도들이 중심이 된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행진했다.

이때 한국인 순사보 고택기(高宅基)가 출동하여 주동자인 이기송을 강제로 체포하여 주재소로 연행했다. 그러자 하용기는 오병용, 이병렬(李秉烈), 김일봉(金一奉) 등 8백명의 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달려가 이기송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했다. 이에 일본인 순사 무라이(村井)가 이기송을 석방하자, 그는 다시 장터로 돌아와서 2천여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과 함께 일본인이 경영하는 상점을 파괴하며 격렬한 시위를 벌이고 면사무소로 행진했다.

면사무소에 도착한 그는 그곳에서 면장, 면서기들에게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했고 뒤이어 주재소로 향했다. 군중은 주재소에 도착한 뒤 유치장 문을 부수고 김영필(金永弼) 등 구금된 사람들을 석방시켰다. 이때 순사보 고택기가 총을 겨누며 위협하자, 하용기는 그의 총을 빼앗고 경종대 아래로 끌고 나와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며 구타했다. 그러나 군중은 3월 23일 저녁 출동한 남원 헌병분대와 임실경찰서 경찰들의 무차별 사격으로 많은 사상자를 낸 채 해산했다.

이후 하용기는 일제의 검속 때 체포되었고, 1919년 7월 31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임실군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964년 4월 2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하용기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0년에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