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1 11:13:01

피털루 학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 개요2. 전개3. 여담

1. 개요

피털루 학살(Peterloo Massacre) 1819년 8월 16일 잉글랜드 맨체스터의 성 피터 광장(St. Peter's Fields)에서 영국군 기병대가 의회 체제 개혁을 요구하는 집회를 하던 비무장 시위대에게 돌격하여 18명을 죽이고 400~700여 명을 다치게 한 사건이다.

2. 전개

집회를 조직한 것은 현지 붓 수공업자이자 급진적 신문인 <맨체스터 옵서버(Manchester Observer)>의 창간인 중 한 명인 조지프 존슨(Joseph Johnson)이었다. 면직물 수공업자이자 개혁가인 존 나이트(John Knight)와 <맨체스터 옵서버>의 편집장 존 새커 색스턴(John Thacker Saxton)도 집회 조직에 참여했다. 6만여 명의 시위대가 집결했고 ' 곡물법 폐지', ' 보통선거권', '투표용지 사용'[1] 등의 현수막을 든 이들도 많았다. 특기할 점은 이 시위를 주도한 이들이 멋쟁이(best dressed) 파벌이었다는 것이고 이들은 금주, 절제, 비폭력을 모토로 내세웠다. 쉽게 말해 '술 먹고 봉기를 일으킨 천것들'이 아니라 좋은 옷을 입은 시민들의 합법적인 평화시위를 천명한 것이다.
시대적 배경상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직후, 영국은 오랜 전쟁을 치르며 물가가 상승한 상태였다. 이에 영국 부르주아 계층은 물가를 정상화(하락)시켜야 한다 주장했다. 또한 영국 지주계층은 곡물 물가만큼은 유지시켜야 한다 주장했다. 둘 다 받아들여지며, 결국 서민층의 임금은 하락했지만 곡물값은 유지되었다(곡물법 참고). 당시 영국의 의회정치는 한 선거구의 투표권자가 10명인 곳 등 소수의 부자만이 투표할 수 있었으므로 서민층의 의견은 반영되지 못했기에 '곡물법 폐지'와 '보통선거권'은 서민의 생존권 보장이나 다름없었다.

이에 당국은 제15경기병연대, 맨체스터-살포드 의용기병대, 기타 흉갑기병대, 보병대와 포병대가 포함된 군대를 파견했다. 연설이 시작되자 현지 치안판사 윌리엄 헐튼은 '나는 그들의 시민권이 공중도덕을 유지하는 데 부적합하다고 판단합니다. 즉시 행동하십시오'라는 쪽지를 군부대에게 보냈고 연사들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반란분자들의 시민권은 무시하고 싹 죽여 버리라는 명령이었다.

영장을 집행하려던 경찰은 군중의 저항에 부딪혔고 이내 싸움이 벌어졌다. 바로 이때 요맨리 기병대가 군중을 향해 돌격했다. 최초의 사망자는 2살배기 아기 윌리엄 필즈, 그 아기를 안고 있던 어머니 앤 필즈(Anne fileds)였다. 그 짧은 아비규환 속에서 11명이 죽고 6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맨체스터 옵서버>는 이 사건을 '피털루 학살(Peterloo Massacre)[2]'이라고 불렀다. 워털루에서 승리한 것을 중요 치적으로 삼던 웰즐리 내각은 '피털루'라는 표현을 만든 맨체스터 옵저버의 편집장을 체포해 구속했다.

3. 여담

  • 워털루 전투 참전용사는 이를 보고 워털루보다도 끔찍했다고 저술했다. 프랑스 군대와 싸운 워털루보다는 비무장한 영국 민간인을 학살한 피털루가 더 끔찍하긴 했을 것이다.[3]


[1] 1819년에는 공개투표를 하던 터라 비밀선거를 요구하는 구호였다. [2] 성 피터 광장과 워털루 전투(Battle of Waterloo)를 합성해 만든 표현 [3] 5.18 민주화운동 때도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가 "나는 월남에서 베트콩도 죽여봤지만 저렇게 사람을 죽이는 놈들은 처음 보았다"고 울분을 토한 사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