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slam a rompu l'unité méditerranéene que les invasions germaniques avaient laissé subsister. C'est là le fait plus essentiel qui se soit passé dans l'histoire européenne depuis les guerres puniques. C'est la fin de la tradition antique. C'est le commencement du Moyen Age... Il est donc rigoureusement vrai de dire que, sans Mahomet, Charlemagne est inconcevable.
이슬람은 게르만 침입에도 불구하고 존속했던 지중해의 통일성을 파괴했다. 이것은 포에니 전쟁 이래 유럽사에서 발생한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이것은 고전 전통의 종말이요 중세의 개막이다. 따라서 마호메트가 없는 샤를마뉴는 상상할 수도 없다고 말하는 것은 엄연한 진실이다.
H.피렌, 그의 저서 << 마호메트와 샤를마뉴>> 에서
이슬람은 게르만 침입에도 불구하고 존속했던 지중해의 통일성을 파괴했다. 이것은 포에니 전쟁 이래 유럽사에서 발생한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이것은 고전 전통의 종말이요 중세의 개막이다. 따라서 마호메트가 없는 샤를마뉴는 상상할 수도 없다고 말하는 것은 엄연한 진실이다.
H.피렌, 그의 저서 << 마호메트와 샤를마뉴>> 에서
1. 개요
중세사의 거두이자 아날 학파의 창시자로 손꼽히는 벨기에의 역사가 앙리 피렌(H.Pirenne)이 서로마 제국의 쇠망부터 샤를마뉴의 황제 대관에 이르는 중세의 개막을 설명하기 위해 주창한 학설. 피렌 테제는 그의 저서 마호메트와 샤를마뉴에서 집대성되었기 때문에, 간혹 저서명이 그의 학설과 학설과 같은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2. 주요 주장
2.1. 게르만족의 남하에도 불구하고 유지된 지중해적 통일성
마호메트와 샤를마뉴 1부, 이슬람 이전의 서유럽(L'Europe occidentale avant l'islam)의 중심내용.피렌 테제가 주창되기 이전까지, 역사학계에서 서로마 멸망 이후 서유럽에 자리한 게르만 소왕국들[1]은 < 로마 제국 쇠망사>의 저자 E.기번으로 대표되는 근대 계몽주의 사관에 의거, '문명국 로마를 멸망시키고 암흑 시대를 불러온 야만인들' 정도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르네상스기 지식인들이 가지고 있던 중세에 대한 편견과 고대에 대한 무한한 선망에서 비롯된 관념에 불과한 것으로 이를 실질적으로 뒷받침해줄 고고학적인 조사나 당대 사료에 대한 교차 검증 등은 전무한 것이었다.
피렌은 이런 전통적 학설에 반발, 오랜 연구를 거쳐 로마 제국과 게르만 왕국 간의 관계에 대해 자신의 독창적인 견해를 만들어냈다. 그는 먼저 고대 로마 제국의 특성이 지중해를 통해 유지되는 사상적,종교적,경제적 통일성이라 정의한 후, 이것이 서로마 멸망 이후 게르만 왕국 시기에도 유지되었다 주장했다.
피렌 테제에 따르면, 게르만족들은 양적인 면에서 그들이 차지한 로마 속주에 어떠한 영향을 주기에 턱없이 그 수가 부족했으며 로마 문화와 본격적으로 접촉한 후에는 이를 본격적으로 수용한 후 보존하려 노력했으며 그 과정에서 지중해의 통일성은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그 증거로는 로마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게르만족의 법전 편찬, 게르만 왕국 내에서 로마식 통치 기구와 행정 제도의 존속, 지중해를 통한 해상 교역의 성행[2]이 제시되었다.
이상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게르만족의 발흥과 서로마 제국의 붕괴는 고대 사회의 핵심인 지중해의 통일성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2.2. 이슬람의 발흥이 끼친 영향
마호메트와 샤를마뉴 2부, 이슬람과 카롤링거 왕조(L'islam et les Carolingiens)의 중심 내용.한편, 갑작스레 등장해 극적인 팽창을 이룬 이슬람의 발흥은 지중해의 통일성을 파괴하고 중세를 개막한 원흉으로 지목받았다.
피렌의 주장에 따르면 이슬람 제국의 신실한 전사들은 독자적인 신앙으로 단단히 무장해 정신 문화에 있어 비잔티움 제국으로 대표되는 유럽의 기독교-로마 문화에 동화되지 않았으며 더 나아가 활발한 군사활동으로 지중해의 통일성을 붕괴시켰다. 그 과정에서 발생한 지중해 연안의 황폐화와 교역의 쇠락은 왕실의 권위를 상업에서 나오는 부에 의존하던 메로빙거 왕실의 약화를 초래함과 동시에 프랑스 북부의 농업 생산물이 세력의 원천이던 카롤링거 가문의 부상을 초래, 종국에는 피핀의 찬탈로 카롤링거 왕조의 프랑크 왕국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한편 이슬람 제국의 압박으로 그 자신의 생존조차 위협받게 된 비잔티움 제국에게 교황을 보호해줄 여력 따위는 없었고 교황은 독자적인 생존 방안을 모색, 새로이 떠오르던 카롤링거 왕조와 결탁해 그들의 찬탈을 인정하고 더 나아가 그들에게 로마 황제의 관을 씌어줌으로서 유럽의 새로운 질서, 중세가 그 개막을 알리게 된다.
3. 비판과 영향
피렌이 피렌 테제를 주창할 때만 해도 중세 초기에 대한 연구는 관련 고고학 사료나 당대 자료에 대한 검토가 전무한 열악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피렌 테제는 후에 이 시기에 대한 연구가 이뤄지면서 그의 자료 오독이나 상충되는 고고학 사료가 발견됨에 따라 많은 비판을 받게 된다.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지중해의 통일성 붕괴와 이슬람 세계의 역할에 관한 부분으로, 현대의 연구 결과는 3세기의 위기 이래 지중해의 사회,경제가 점진적으로 쇠퇴하였으며 이슬람이 발흥하기 이전인 6세기에 이미 대대적인 흑사병 확산의 공격을 받으면서 재기불능의 치명상을 입었다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극적인 '하룻밤 사이의 몰락'은 역사를 쉽게,소설처럼 이해한다면 모를까 역사를 합리적으로 바라보는 데 있어서는 방해요소일 뿐이다.
이슬람의 발흥면에 대해서도 최신 연구 성과는 피렌 테제와 상충하고 있다. 샤를마뉴와 하룬 알 라시드 사이의 친목으로 상징되는 프랑크 왕국과 이슬람 제국 사이의 교류는 샤를마뉴의 상업 진흥 정책과 함께 성행했으며, 샤를마뉴의 화폐 개혁 역시 이슬람 제국의 디르함-디나르 화폐를 모델로 했다는 쪽으로 무게가 기울어지면서 오히려 카롤링거 왕조 시기 상업의 부흥에 이슬람이 일조했다는 주장이 힘을 얻는 편.
그러나 이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열악한 사정 속에서 새로운 학설을 창시한 피렌의 공로와 피렌 테제가 기존의 역사학계에 끼친 영향은 무시할 수 없는 편이다. 이전까지 막연히 암흑시대로만 인식되었던 중세 초기를 조명한 것은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불후의 업적으로, 현대 사학계도 피렌 테제가 다소 과장된 면이 있긴 하나 게르만 왕국들이 나름 로마의 문물을 수용했음은 인정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피렌의 기여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4. 기타
샤를마뉴와 마호메트를 번역해 국내에 피렌 테제를 소개한 강일휴 교수는 이슬람의 역할을 중심으로 피렌 테제를 비판하는 논문 '피렌 테제와 이슬람'을 기고하기도 했다. 오래 전 논파된 고전 학설을 소개하는 입장에서 현대 입장의 해석을 다는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다소 아이러니함이 느껴지기도 한다.피렌 테제가 학계에 제시된지 50년이 지났음에도 아직까지 중세 초기를 게르만족=암흑시대=로마문명 파괴 정도로 인식하는 이들이 절대다수인 것이 현실.
[1]
서고트 왕국,
동고트 왕국,
반달 왕국,
프랑크 왕국 등
[2]
동로마 제국을 대상으로일종의 조공무역의 형태로 이루어진 반달 왕국의 올리브 수출(+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하는 북아프리카 관개 체계의 존속) , 프랑크 왕국-동로마 제국 간 시리아,유대 상인의 동방 특산품 수출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