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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앙리 드 몽모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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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초기 경력2.2. 대 네덜란드 전쟁2.3. 9년 전쟁2.4. 사망
3. 자식들4. 기타

1. 개요

17세기 프랑스의 명장. 프랑스-스페인 전쟁, 대 네덜란드 전쟁, 9년 전쟁에서 활약한 인물. 개인적으로는 방탕한 삶을 살았지만 군사적 역량은 우수하여 대 콩데(le Grand Condé)의 후계자로 일컬어졌다.

2. 생애

2.1. 초기 경력

프랑수아는 1628년 1월 8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프랑수아 드 몽모랑시 부데빌은 아들이 태어나기 6개월 전에 뵈브롱 후작을 상대로 한 결투에 참가했다가 결투를 법으로 엄격히 금지한 리슐리외 추기경의 특명으로 처형되었다. 이 때문에 아버지가 없던 프랑수아는 그의 고모 샤를로트 드 몽모랑시의 보살핌을 받았다. 젊은 프랑수아는 그보다 7살 많은 루이 2세 드 콩데 부르봉(일명 콩데 공작)과 우정을 쌓았고 프롱드의 난 때 콩데 공작과 함께 프랑스 왕실과 마자랭에 맞서다가 스페인으로 함께 도주해 프랑스-스페인 전쟁 때 콩데와 함께 스페인군을 지휘해 조국을 침략했다.

1659년 피레네 조약으로 프랑스-스페인 전쟁이 끝난 후 콩데와 함께 사면되어 프랑스로 돌아온 프랑수아는 자신의 누이인 샤티롱 공작부인과 매우 가깝게 지냈다. 이는 샤티롱 공작부인의 사촌이자 뤽상부르 공작령의 여자 상속인인 마들렌 드 뤽상부르-피네와 결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다가간 것이었다. 그는 몇년 간 누이를 통해 마들렌과 접촉하다가 1661년 마침내 결혼에 성공했고 뤽상부르 공작이라는 작위를 얻게 되었다. 1668년, 프랑수아는 콩데 휘하 중장으로 근무하면서 콩데의 프랑슈콩테 공략에 가담했다. 이후 그는 4년간 여유로운 생활을 보내며 도박을 일삼고 여러 여자들과 불륜을 일삼았다. 생시몽 공작은 이러한 프랑수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최종적으로 뤽상부르 공작보다 성실한 사람은 없었고 그만큼 전투 중에 적과 용감히 싸우면서도 신중하고 현명한 사람은 없었다. 그는 대담하고 자신감이 있었으며 동시에 위험하고 결정적인 순간이 가장 격렬한 포격의 한 가운데를 관측하고 예견할 수 있는 냉철한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전장에 섰을 때가 그가 정말로 대단했을 때였다. 그러나 다른 때의 그는 게으름 그 자체였다. 그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곳 외에는 아무런 운동도 하지 않고 도박을 일삼하고 친밀한 사람들과 매일 밤 저녁 만찬에 모여 밤새 술을 마셨고 거의 항상 같은 이들과 함께 했다. 또한 그는 매번 상냥한 여성들과 성관계를 맺었다."

2.2. 대 네덜란드 전쟁

1672년 4월, 프랑스는 잉글랜드와 함께 네덜란드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대 네덜란드 전쟁을 개시했다. 이때 프랑수아는 프랑스 분견대를 이끌고 25,000명의 뮌스터-쾰른 동맹군과 합세해 6월 11일 흐룬노를 공략했다. 프랑수아는 뒤를 이어 위트레흐트를 점령하고 암스테르담으로 진격했다. 그러자 네덜란드 총독 빌럼 3세는 네덜란드군의 잔존병을 모두 홀란트 근처로 집결시킨 후 암스테르담 근처의 둑을 무너뜨려 인위적으로 홍수를 일으켰다. 이후 네덜란드군은 홍수선을 장벽으로 삼아 결사적으로 방어했다.

1672년 12월 27일, 프랑수아는 강물이 얼자 병사들을 이끌고 얼어붙은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러나 갑자기 얼어붙었던 강이 녹아버리는 데다 적의 반격이 거세 부득이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일로 분노한 프랑수아는 네덜란드 수비군이 버리고 간 보데그라븐의 요새 마을을 발견하고 그곳에 거주하던 주민들을 그들의 집과 함께 산채로 불살라버렸다. 네덜란드의 반프랑스 선전대는 이 사건을 이용해 네덜란드 국민들의 반프랑스 감정을 자극했고, 프랑스의 승리로 쉽게 끝날 줄 알았던 전쟁은 장기전으로 치달았다. 그러나 그는 루이 14세 앞에서 자신이 네덜란드인들을 구워버렸다며 자랑했고 자신의 행위가 불필요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1673년, 프랑수아는 위트레흐트와 마스트리히트에서 7만의 적군을 상대로 단지 2만 명에 불과한 아군을 성공적으로 퇴각시켰다. 이 공적으로 그의 위치는 장군들 중 최고 계급에 이르렀고 1675년 프랑스군 원수가 되었다. 1676년, 그는 라인강 상류에 배치되었으나 적장 로렌 공작을 필립스버그의 외곽에서 붙잡지 못했다. 1677년, 그는 발랑시엔을 습격했고 1678년엔 빌럼 3세의 군대를 생드니에서 격파해 빌럼 3세가 네이메헌 평화 조약에 서명하게 했다. 프랑수아의 명성은 단숨에 높아졌지만 프랑스군의 보급을 맡았던 루부아 후작의 시기를 불러 일으켰다.

이 무렵, 루이 14세의 정부였던 몽테스팡 부인은 한 여성 점성술사의 조언을 받아들여 두꺼비 점액, 말린 두더지 가루, 박쥐의 피, 인간의 정액과 월경혈로 제작한 '사랑의 묘약'을 만든 후 왕이 먹는 음식에 넣었다. 이걸 먹은 루이 14세는 답답함, 우울증, 현기증으로 괴로워하다가 뒤늦게야 진실을 알아채고 그 점성술사를 화형에 처하고 몽테스팡 부인을 별궁에 감금했다. 이때 루부아 후작은 이 사건에 프랑수아도 개입했다고 고변했고, 결국 프랑수아는 1680년 바스티유 감옥에 갇혀 몇달간 조사를 받아야 했다. 그는 무혐의 처분을 받고 풀려났지만 그가 갖고 있던 궁전을 왕실에 헌납해야 했다.

2.3. 9년 전쟁

9년 전쟁이 한창이던 1689년 8월, 위미에르 공작 루이 드 크레방이 지휘하는 프랑스군 24,000명이 왈쿠르에서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군 35,000명에게 패배했다. 이 소식을 들은 루이 14세는 10년 동안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프랑수아를 스페인령 네덜란드 방면의 지휘관으로 임명하고 위미에르 공작에게 프랑수아의 지휘를 받게 했다. 이에 따라 1690년 5월 프랑수아는 군대를 이끌고 스헬더 강을 따라 헨트 방향으로 북상했다.

이때 네덜란드구을 지휘하고 있던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폰 발데크는 적과 교전을 회피하고 6월 8일 쥬나프로 이동했다. 이에 프랑수아는 위미에르 공작에게 레이어강과 스헬더 강으로 이어지는 방어선의 수비를 맡긴 후 네덜란드군을 뒤쫓아 6월 23일 상브르 강을 건너 남하했다. 이 덕분에 네덜란드군이 브란덴부르크군과 합세하기 전에 그의 군대가 루이 프랑수아 드 부플레르의 분견대와 합세하면서 전력에서 우위를 보였다. 이후 프랑수아가 6월 27일 몽스와 샤를루아 남쪽에 진영을 마련하자, 게오르크 프리드리히는 이에 맞서 6월 28일 니베유와 피에톤 사이에 진영을 설치했다.

1690년 7월 1일, 양군은 나뮈르와 샤를루아 사이에 위치한 플뢰뤼스에서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3천명이 전사하고 3천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지만 네덜란드군은 6천명이 전사하고 5천명이 부상당했으며 8천명이 포로로 붙잡히는 괴멸적인 피해를 입고 말았다. 이로 인해 네덜란드군의 전력이 약화되자, 루부아 후작은 국왕에게 상브르 강과 뫼즈 강을 장악해 네덜란드를 압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루이 14세의 관심은 오로지 라인강 방면에만 있었기 때문에 이를 기각하고 프랑수아를 도와줬던 루이 프랑수아 드 부플레르의 분견대를 본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냈다. 그 때문에 프랑스군은 플뢰뤼스 전투의 승리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고 네덜란드가 회복할 시간을 벌 수 있도록 허용해버렸다.

1691년 9월, 게오르크 프리드리히는 네덜란드군의 겨울 숙영을 준비하기 위해 본국으로 후퇴하면서 후위 방어를 위해 로이체에 기병대를 남겨두었다. 당시 투르네에 있던 프랑수아는 즉각 추격군을 파견했다. 이때 그가 파견한 프랑스 기병대는 수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용감하게 돌격하여 2시간에 걸친 전투 끝에 적을 격퇴했다. 1692년 봄, 프랑스군은 플랑드르에 병력을 집중시켜 상브르 강과 뫼즈 강의 합류점에 위치한 나뮈르 요새를 포위했다. 이때 프랑수아는 별도로 6만 명을 이끌고 나뮈르 요새를 구원하러 올 적을 막는 임무를 맡았다.

1692년 6월 30일 나뮈르 요새가 함락된 후, 프랑스군은 병력을 둘로 나눠서 한 부대는 프랑수아의 지휘하에 스틴케르케로 진군하고, 다른 부대는 루이 프랑수아 드 부플레르의 지휘하여 앙기엥으로 이동해 브뤼셀을 위협했다. 이때 윌리엄 3세의 대동맹군은 인근의 할레에 위치했는데 프랑스군의 브뤼셀 진격을 견제하기 위해 먼저 스틴케르케로 가고 있던 프랑수아에게 "적군이 멀리 떨어져 있다."는 거짓 정보를 줘서 방심시킨 후 8월 3일에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스틴케르케 전투에서, 프랑수아는 위기에 직면했지만 전장이 숲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에 착안해 진지와 울타리를 설치해 적의 접근을 차단했다. 이렇게 해서 적의 기습효과를 최소한으로 줄인 프랑수아는 적극적으로 진형을 재편하고 응전에 나섰고, 전투는 난전으로 치달아 해질녘까지 이어졌다. 그러다가 저녁이 될 무렵 루이 프랑수아 드 부플레르의 프랑스군이 구원을 왔기 때문에 윌리엄 3세는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다만 프랑스군 역시 기진맥진한 상태였기 때문에 도망치는 적을 추격하지 못했다. 프랑스군은 이 전투에서 약 8천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대동맹군은 10,000명의 사상자를 입었다. 기습을 받았음에도 끝내 적을 격퇴한 프랑수아는 전쟁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1693년 봄, 프랑수아는 브뤼셀과 리에주를 목표로 공세를 개시했다. 윌리엄 3세는 이에 대응해 루벤에 추준해 적을 상대할 준비를 했다. 7월 23일 프랑수아가 리에주 서쪽의 위이를 함락시키자, 윌리엄 3세는 2만 여 명력을 증원하여 리에주에 대한 방어력을 높이는 한편, 자신은 위이 북쪽의 란덴에 머물렀다. 이에 프랑수아는 7월 28일 북상했고 이튿날인 7월 29일 양군이 란덴 서쪽의 네르빈덴에서 서로 격돌했다. 네르빈덴 전투에 투입된 프랑스군은 66,000명이었고 대동맹군은 50,000명이었다.

프랑스군은 대동맹군을 상대로 세번에 걸쳐 돌격을 감행한 끝에 네르빈덴을 공략했다. 이로 인해 대동맹군의 진형이 붕괴되었고 결국 윌리엄 3세는 퇴각을 명령했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9,000명의 피해를 입은 반면에 대동맹군은 14,000명의 피해가 발생했다. 하지만 프랑수아 역시 피해가 컸기 때문에 더이상 진군하지 못하고 10월 샤를루아를 저령하고 몽스-나뮈르-위이-샤를루아로 이어지는 방어선을 구축하는 데에 만족해야 했다. 이후 그는 파리로 귀환해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1694년 여름 프랑스의 재정 상황이 더욱 악화되어 각 전선에 대한 보급이 열악해지면서, 프랑수아는 위기에 직면했다. 그는 여전히 10만 명의 병력을 보유했지만 열악한 보급 상황 때문에 어렵게 구축한 방어선이 속절없이 무너져 9월 27일 위이를 상실했고 나뮈르까지 공격당했다. 그러던 중 그는 뜻하지 않은 최후를 맞이한다.

2.4. 사망

1694년 겨울 베르사유로 돌아온 프랑수아는 중병에 걸렸다. 그는 며칠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1695년 1월 5일 예수회 신부 부르달루예로부터 병자성사를 받은 뒤 숨을 거두었다. 향년 67세. 그후 윌리엄 3세는 자신을 여러번 물먹였던 프랑수아의 사망을 이용해 대대적인 공세를 개시해 나뮈르 요새를 공략했고, 프랑스는 심각한 재정 상태로 인해 더이상 전쟁을 벌이지 못하고 1697년 9월 20일 레이스베이크 조약을 체결했다. 이리하여 프랑스는 스페인에게 룩셈부르크, 시메, 몽스, 코르트레이크, 샤를루아, 아트를 반환하고 로렌 공국 역시 로렌 공작 샤를 5세의 아들 레오폴트 요제프에게 돌려줘야 했으며, 필립스부르크, 브라이사흐, 프라이스부르, 켈 등 라인강 우안 지역을 모두 포기하고 라인강 좌안으로 철수해야 했다.

3. 자식들

프랑수아와 마드렌 드 클레르몽-투네르는 1661년 3월 17일 결혼했다. 프랑수아는 여러 처녀들과 불륜 관계를 맺는 등 좋은 남편은 아니었지만 순종적인 여성이었던 마드렌은 프랑수아와 평생을 해로했다. 둘 사이에선 5명의 자식이 태어났다.
  • 샤를 프레데릭 드 몽모랑시-뤽상부르(1662~1726): 피니-뤽상부르 공작, 프랑스 원수(1757)
  • 피에르 앙리 드 몽모랑시-뤽상부르(1663~1700): 생미셸 오르캄프의 대수도원장
  • 파울 시지스몽 드 몽모랑시-뤽상부르(1664~?): 아프로몽 남작과 뤽스 백작, 샤티옹 공작.
  • 안젤리크 퀴네공드 드 몽모랑시-뤽상부르(1666~1736): 마드무아젤 드 뤽상부르와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루이 앙리 드 부르봉 바타르 드 수아송과 결혼.
  • 크리스티앙 루이 드 몽모랑시-뤽상부르(1675~1746): 뤽스 백작, 티그리 공, 프랑스 원수(1734)

4. 기타

프랑스 상원의 국회의사당으로 쓰이는 뤽상부르 궁전은 원래 그의 저택이였던 곳이다. 그래서 그 이름을 아직도 잇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