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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생년 미상 |
로마 왕국 로마 | |
사망 | 몰년 미상 |
로마 공화국 로마 | |
재임기간 | 고대 로마 집정관 |
기원전 505년 9월 1일 ~ 기원전 504년 8월 29일 | |
고대 로마 집정관 | |
기원전 503년 9월 1일 ~ 기원전 502년 8월 2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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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로마의 집정관.2. 생애
기원전 505년,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그는 동료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볼루수스와 함께 사비니족과 싸웠고, 티부르 근처에서 결정적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포스투미우스는 기원전 503년에 두 번째로 집정관이 되었다. 리비우스는 아우룬치족과 싸워 패배시켰고, 포메티아 마을을 점령하여 두 번째 승리를 거두었다고 기록한다. 다른 주장에서는 그가 사비니족과 다시 싸웠고, 처음에는 거의 성공하지 못했지만 결국 승리를 거두었고 기원전 503년 4월 3일에 오바티오[1]를 받았다고 말한다. 또한 히에로니무스에 따르면 포스투미우스와 그의 동료 아그리파 메네니우스 라나투스는 재임 기간 동안 인구 조사를 실시했다고 한다.기원전 493년, 포스투미우스와 메네니우스는 원로원이 파견한 10명의 대사 중 한 명으로, 성산 사건에서 성산에 모인 평민들과 협상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메네니우스가 이끄는 사절들은 귀족들이 평민들이 진 빚의 일부를 탕감해 주는 협정을 성공적으로 협상했다. 그런 업적의 결과로, 포스투미우스와 그의 후손들은 성벽 안에 묻히는 특권을 받았다.
[1]
ovatio, 박수로도 번역되는 이 행사는
개선식의 작은 버전으로 국가 차원에서 적들 사이에 전쟁이 선포되지 않았을 때, 적이 매우 열등한 전력을 가지고 있다고 간주되는 경우, 일반적인 갈등이 군대 자체에 대한 위험이 거의 또는 전혀 없이 해결되었을 때에 받았다고 한다. 오베티오를 받는 장군은 승리를 축하하는 장군들처럼 두 마리의 백마가 끄는 전차를 타고 도시에 들어가지 않고
집정관이 입는 토가를 입고 말을 타고 도시에 들어왔다. 이마에 월계관 대신
은매화로 만든 화환을 썼다고 한다. 원로원 의원들은 장군 앞에서 행진하지 않았고 군인들은 보통 행렬에 참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