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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게어트라우트 트라우들 융에 Gertraud "Traudl" Junge |
출생 |
1920년
3월 16일 바이마르 공화국 뮌헨 |
사망 |
2002년
2월 10일 (향년 81세) 독일 뮌헨 |
가족 | 한스 융에 (1943년 결혼, 1944년 사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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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본명은 게어트라우트 훔프스이며 트라우들(Traudl)은 그녀의 애칭이었다.[1]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아돌프 히틀러의 연설 원고와 인사만을 기록하는 담당관이었다. 흔히 비서로 알려져 있지만 타자수에 더 가깝다. 당시 유럽에서는 문서 작성 기술상 타자기를 이용하여 받아쓰는 것만 하더라도 특별한 숙련도가 요구되고 구술하는 것을 받아쓰는 것만 하더라도 어휘력 수준이 중등교육 이상 거쳐야 하기 때문에 타자 역할만을 전담할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나의 투쟁을 보면 알겠지만 애초에 히틀러는 공부에 대한 흥미가 없고 고등학교 과정을 자퇴한 데다 문법도 자주 틀렸다고 하며 권력을 쥐고 나서도 공문이나 보고서 같은 글을 읽는 것을 싫어했고 젊어서 그나마 흥미를 가지고 본 책들도 대부분 문법적으로 비문이 넘치고 앞뒤가 안 맞는 내용도 많은 데다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문구로 점철된 정치 팜플렛들이 다수였으니 문법상의 오류를 교정해 주고 편집할 비서들의 능력이 중요했다.
2. 생애
2.1. 유년기
1920년 뮌헨의 양조장을 운영하던 아버지와 장성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우익 활동을 했던 인물로 튀르키예로 이주했기 때문에 그녀는 외할아버지 밑에서 성장하게 된다. 무용가가 꿈이었지만 가정형편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독일의 실업학교에 진학해 그곳에서 비서직을 공부했다. 실업학교를 졸업하고 한 봉제회사의 비서로 일하던 그녀는 2차대전이 터지면서 1942년에 여동생과 함께 베를린으로 거주지를 옮겼다.2.2. 히틀러의 비서가 되다
1942년 12월 히틀러의 측근이자 그의 4명의 개인비서 중 한 명이었던 알베르토 보어만[2]과 알게 된 그녀는 히틀러의 여비서인 게르다 크리스티안[3]이 결혼하면서 6개월간의 장기 휴가를 떠나게 되자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동프로이센의 라스텐부르크에 위치한 볼프샨체(Wolfsschanze)[4]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무용수의 꿈을 완전히 포기하고[5] 히틀러의 비서직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때를 회상하며 그녀는 "히틀러의 비서생활을 시작할 때 나는 고작 22살이었고, 나는 정치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라고 했다.히틀러의 비서로 있던 1943년 7월 14일 히틀러의 전속부관들 중 한 명인 한스 융에(Hans Junge) SS 대위와 결혼했지만 결혼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는데 1년 후에 한스 융에가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 작전 때 전장에 투입되어 전사했기 때문이다. 융에 대위와 결혼을 준비할 때 독일 민법상 SS 장병과 결혼하기 위해 자신이 인종적으로 문제가 없음을 증명하는 것을 포함한 수십 통의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히틀러에게 슬쩍 "이렇게 복잡해선 결혼도 못하겠다"고 투덜대자 히틀러가 웃으며 전화 한 통으로 서류 제출을 일체 면제해 준 일화가 있다.
이후 베를린으로 연합군의 총공세가 이어지면서 전세가 급격히 불리해지자 베를린 총통관저의 퓌러붕커에서 히틀러의 유언장을 작성했다. 융에가 직접 작성한 그의 유언장을 보려면 여기로. 1945년 4월 30일 15시경 히틀러와 에바 브라운이 자살한 후[6] 지하 벙커에서 탈출을 시도했는데 이후의 행적에 대해 여러 설이 있다. 그녀의 자서전의 서술처럼 연합국 지역으로 넘어가던 중 소련군에게 억류되었는데 별 탈 없이 미군에 보내진 후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설과 탈출하던 도중 소련군에게 붙잡혀 강간을 당했는데 저항하다 부상을 당한 그녀를 소련군 장교가 치료를 받게 한 후 수개월간 그녀를 현지 종군처로 데리고 있었다는 설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블로그를 참조.
2.3. 전후
전후 게르다 알토라는 가명을 쓰면서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했는데 홀로코스트에 대해 "히틀러는 유대인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고, 홀로코스트가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7] 그녀의 증언에 따르면 히틀러는 개인적으로는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히 대해주었지만 동시에 거대한 이상과 충동에 사로잡혀 타인에 대한 동정심이나 공감능력을 잃어버리는 등 인격적인 문제도 많았다고 한다.그녀는 히틀러를 다룬 여러 다큐멘터리 등에 출연하여 1942~45년의 기간 동안 곁에서 지켜본 히틀러의 개인적인 면모와 사생활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한편 세간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여러 일화들을 증언하였다. 이런 작업들은 훗날에 말년의 히틀러를 묘사한 다운폴 등의 영화들을 제작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말년의 모습 |
2001년 생을 마감하기 직전에 다큐멘터리 영화인 《히틀러의 여비서(Im toten Winkel - Hitlers Sekretärin )》[8]에 본인 역으로 출연하여 히틀러의 여비서로 근무하던 시절에 대하여 인터뷰를 하였다. 여기서 그녀는 하얀 장미 단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자유와 진실을 위해 싸우다가 죽어간 그들에 비하여 나치를 합리화하며 젊은 시절을 보냈던 자신의 과거를 스스로 비판하고 성찰하는 말을 하기도 하였다. 이 다큐멘터리에 들어간 인터뷰의 내용은 영화 다운폴에 일종의 나레이션으로 삽입되기도 하였다.
2002년에 영화의 시사회가 끝난 후 병원에 입원 중이었던 그녀는 암으로 인하여 향년 81세로 세상을 떴다. 히틀러 마지막 여비서 트라우들 융에 사망 시사회 직후 감독이 병원으로 찾아와 그녀에게 시사회 이야기를 하자 "그럼 이젠 제가 할 일은 다 끝났군요. 한결 홀가분해지겠어요."라는 한 마디를 유언으로 남기고 영면했다. 사후인 2003년 Bis zur letzten Stunde. Hitlers Sekretärin erzählt ihr Leben.(마지막 순간까지 - 히틀러의 여비서의 회고)라는 제목으로 예전에 썼던 회고록의 개정증보판이 출간되었다.
재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에게 남편은 결혼 1년 만에 전사한 한스 융에 외에는 없었다.[9] 우연히도 그녀뿐 아니라 히틀러의 비서였던 사람들은 전쟁 후에 아무도 결혼/재혼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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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다운폴에서 주인공 격으로 등장했다. 그녀를 연기한 인물은 루마니아 출신의 독일 배우 알렉산드라 마리아 라라(Alexandra Maria Lara).
[1]
영어 이름 '거트루드(Gertrud/Gertrude)'와 어원이 같은 이름인데 영어로도 이 이름의 애칭은 '트루디'다.
[2]
히틀러의 비서인 일명 갈색의 배후자
마르틴 보어만의 동생. 형이나 동생이나 히틀러의 신임을 얻기 위해 서로 끊임없는 암투를 거듭했다.
[3]
1913~1997. 국방군 참모본부에서 근무하다가 공군 소령과 결혼하면서 장기 휴가를 신청했다. 1943년 복귀했고 히틀러가 자살하면서 벙커에 탈출했지만 소련군에 체포되었고 미군에 넘겨지게 되었다. 전후에는 이혼하고 호텔에서 일하다 1997년 뒤셀도르프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4]
늑대소굴이라는 뜻.
발키리 작전이 벌어진 장소로도 유명하다.
[5]
이때까지 그녀는 비서는 임시로 하는 직업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6]
이때 그녀는 옆방에서 요제프 괴벨스의 6명의 자식들과 식사하던 중이었다.
[7]
물론 이 증언은 히틀러에 대해 굉장히 군사적 부문에서 교류하지 않았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트라우들 융에가 비서로 있던 1942년부터 1945년사이 히틀러가 직접 유대인 학살을 지시한 것을 손에 꼽는데 그 이유는 히틀러가 진짜 몰랐던 게 아니라 전쟁 이전 히틀러가 연설과
나의 투쟁으로 제공한 유대인 말살론에 의거해
친위대와
국방군이 자발적으로 학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유대인에 대한 최종해결책(대량학살)을 결정한
반제 회의에 히틀러는 참석하지 않았다. 살아남은 주변 인물들의 증언에 따르면 식사 자리에서는 정치이야기보다 채식의 위대함이라던가 금연의 중요성, 개를 잘 키우는 법 같은 이야기를 주로 하여 동석한 장교들을 힘들게 했다고 한다.
[8]
또다른 제목은 "맹점 : 히틀러의 여비서"다.
[9]
하인츠 발트라는 사람과 약혼까지 가기도 했으나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기간이 길어지다 보니 마음도 멀어지는 바람에 흐지부지되었다고 자서전에서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