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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잭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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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mas Jonathan 'Stonewall' Jackson
1824. 1. 21 ~ 1863. 5. 10

1. 개요2. 출생3. 웨스트포인트 시절과 미국-멕시코 전쟁4. 남북 전쟁
4.1. 제1차 불 런 전투4.2. 셰넌도어 계곡 전투, 석벽 장군의 전설4.3. 챈슬러스빌 전투 이전4.4. 챈슬러스빌 전투4.5. 사망
5. 평가6. 여담

1. 개요

남북 전쟁 당시 남부연맹 장군. 남부연맹 군 인사들 중 로버트 리 장군 다음으로 인지도가 높은 인물로 탁월한 군사적 역량과 적에 대한 호전성, 종교적 광신성이 결합된 유능하고 엄격한 장군이었다. 그가 죽지만 않았어도 게티즈버그 전투는 남군의 승리로 끝났으리라는 주장이 많다.

2. 출생

'스톤월' 토마스 잭슨은 1824년 1월 21일 버지니아 주 클랙스버그에서 법조인이던 조너선 잭슨과 줄리아 베크윗 잭슨 사이에서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두 살 때인 1826년 3월 26일 장티푸스로 사망하고 그의 어머니는 과부가 되었는데 이때 그녀의 나이는 불과 28세였고 설상가상으로 많은 빚까지 물려받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는 친척들의 구제를 거부하였으며 가족의 재산을 팔고 뜨개질과 교사직으로 생계를 이어나갔다. 4년 후 토마스의 어머니는 재혼을 했으나 그의 새아버지는 그녀의 아이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여기에 그의 어머니는 그의 이복남동생을 출산하던 과정에서 얻은 합병증으로 인해 사망하고 만다. 토마스와 큰 형이었던 워렌을 제외한 나머지 형제들은 삼촌이자 방앗간 주인이었던 커민스 잭슨과 함께 잠시 거주하고 있었는데 삼촌이었던 커민스가 폐결핵으로 사망하자 어머니 곁으로 들어와 그녀의 임종을 지켜봤고 후에 이들 형제는 뿔뿔히 흩어져 살게 되었다. 그는 외갓집 방앗간으로 갔으며 삼촌들의 환대를 받고 그곳에서 7년을 지낸다.

3. 웨스트포인트 시절과 미국-멕시코 전쟁

18세가 되던 1842년 미국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으나 집안 형편상 교육을 받지 못했던 까닭에 성적은 좋지 못했다. 그러나 끊임없는 노력 끝에 무사히 졸업에 성공했다.

미국-멕시코 전쟁 때 제1포병연대 소위로 배속되어 1846년부터 1848년까지 복무했다. 이 기간에 베라크루즈 포위전, 콘트레라 전쟁, 차풀테펙, 멕시코 시티 전투 때 참전하는데 이때 훗날 남북 전쟁에서 자신의 상관이 될 로버트 리를 만나게 된다. 종전 후에는 뉴욕에 잠시 배속된 후 포트 캐이시로 영전하고 다시 플로리다 주 탬파에서 30마일 떨어진 포트 미드로 다시 영전한다. 이후에는 버지니아 군사학교에서 경험철학 및 포병교관으로 교사직을 맡게 된다.

4. 남북 전쟁

1861년 남북 전쟁이 터지자 그는 남부동맹군의 신입병 훈련교관으로 임명되었고 4월 27일 버지니아 주지사였던 존 레처의 명령으로 제 2, 4, 5, 27, 그리고 33 버지니아 보병연대로 이뤄진 '스톤월 여단'을 창설했다.

4.1. 제1차 불 런 전투

섬터 요새 전투 이후 첫 야전인 불 런 전투는 의미가 컸는데 이때는 남이나 북이나 모두 준비가 부족한 상황에서 모은 병력으로 벌이는 전투로 몇몇 경험자를 제외하면 지휘관이나 병사나 모두 초짜였다. 이 전투에서 승리하면 승리한 쪽이 전쟁의 전반적인 흐름을 쥘 수 있을 터였다. 북부는 이 전투에서 승리하면 바로 남부 수도 리치먼드까지 진격할 계획이었고 남부는 어떻게 해서든 이것을 저지해야 했다.

전투가 시작되자 3만 2천명의 북군은 2만 8천명의 남군을 밀어붙였고 이때 남군이 혼란에 빠지며 일부 후퇴하게 된다. 제3여단장 버나드 엘리엇 비 주니어(Barnard Elliott Bee, Jr.) 준장이 제1여단장 잭슨 준장에게 자기 부대가 후퇴하고 있다고 하자 잭슨은 태연하지만 단호하게 착검을 지시한다. 이를 본 비 준장은 후퇴하는 장병들 앞에서 외쳤다.[1]
"Look! There is Jackson standing like a stone wall. Let us determine to die here (today)[2], and we will conquer. Rally behind[3] the Virginians!"[4]
"저기를 보라! 잭슨 장군이 돌담처럼 굳건히 서계신다.[5] 우리가 여기서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반드시 이길 것이다. 버지니아인들을 지원하자!"

이는 영화 Gods and Generals(2003)에 잘 묘사되어 있다.[6]

여기서 잭슨이 지휘하는 제1여단만 헨리 고지에서 증원이 올 때까지 무려 5시간이나 굳건하게 버텼다. 이후 남군이 반격하면서 1차 불 런 전투의 승자는 남군이 되었다. 이 때 보여준 지휘로 잭슨은 스톤월(석벽)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이는 이후 북군에게 잊을 수 없는 별명이 된다.

4.2. 셰넌도어 계곡 전투, 석벽 장군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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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봄이 되자 북부는 인해전술로 남부를 밀어붙였는데 북군 사령관 조지 매클레런은 우세한 해군력을 이용해서 리치먼드 근방에 상륙했고 너새니얼 P. 뱅크스, 존 C. 프리몬트, 어빈 맥다월 등 3명의 장군 휘하 약 52,000명 정도의 북군이 셰넌도어 계곡으로 밀려왔다. 이때 잭슨은 셰넌도어 계곡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잭슨의 초기 병력은 4천 5백 명 정도에 불과했고 후에 이월이 참여한 후에도 1만 7천 명 정도 밖에 없었다. 단순하게 따져도 북군이 3배나 숫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워낙 전력 열세가 극명한 나머지 정부마저 리치먼드로 복귀하라고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잭슨은 경이적인 기동지휘를 보여주면서 북군 지휘관들을 완전히 가지고 논다. 적극적으로 공세에 나선 잭슨의 남군은 기습을 통해 북군 지휘관을 심리적으로 위축시켜 병력을 붙잡아 둔 다음 위싱턴 근교까지 올라가서 병기창을 잽싸게 부수고 퇴각하여 북군을 허탕치게 만들고 분산된 북군을 각개격파한다. 링컨은 잭슨을 상대하기 위해서 매클레런에게 보낼 부대까지 투입했지만 잭슨을 제압하는데 실패한다. 이렇게 잭슨은 2만도 안되는 병력으로 6만의 북군 병력을 붙잡아두는데 성공했고 이 덕분에 로버트 리는 반도 전역에서 뒤를 걱정 안하고 정면의 매클레런에게만 전념할 수 있었다.

스톤월 여단은 48일간 1000km여의 거리를 행군하면서 북군과 5차례의 전투를 벌였고 잭슨에게 패배한 북군은 셰넌도어 계곡에서 철수한다. 남군이 신발도 부족해서 맨발로 행군했다는 걸 감안하면 나폴레옹 빰칠만한 기동능력이었다. 이 때 보여준 경이적인 행군 능력과 기동전으로 스톤월 여단은 도보 기병대라고 불리고 석벽 장군의 명성은 높아졌다.

셰넌도어 계곡의 위험이 사라지자 잭슨은 리와 합류했고, 자신의 예상과 달리 더 많은 군대가 리에게 합류하자 남군의 새로운 예비병력이 합류한 걸로 판단한 매클레런은 반도 전역에서 물러난다. 이 때 잭슨은 리의 휘하에서 7일 전투를 치르면서 매클레런을 격파하는데 참여한다. 하지만 계곡 전투의 피로로 지휘가 평소와 같지 않아서 실수가 계속되고, 7일 전투의 막바지에는 계곡 전투로 인한 피로로 지휘를 방기한 탓에 북군이 포위망을 벗어나도록 허용했다. 이는 잭슨의 지휘 경력에서 가장 큰 실수였다.

4.3. 챈슬러스빌 전투 이전

리는 잭슨이 셰넌도어 계곡 전투에서 보여준 전역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을 높이 사 그를 북버지니아군 2군단장에 임명하고 오른팔로 중용하였다. 비록 7일 전투에서 실망스러운 지휘를 보여주었지만 제2차 불 런 전투에서 북군의 존 포프 장군을 상대로 우회 기동을 통한 보급창 점거 후 포위 작전으로 승리를 거두었고 앤티텀 전투에서는 하퍼스 페리를 점령하여 보급 후 위기에 빠진 리에게 도보 기병대라는 명성에 맞게 엄청난 속도로 증원을 해서 전멸로 끝날 수도 있던 전투를 무승부에 가깝게 돌리는데 성공한다. 이후에 프레데릭스버그 전투까지 리의 휘하에서 뛰어난 지휘를 보이면서 남군의 승리에 일조한다.

4.4. 챈슬러스빌 전투

조셉 후커 소장이 이끄는 포토맥군의 위협을 타파하기 위해 리 장군은 휘하 부대를 분할하기로 하는데 잭슨의 부대는 우익을 맡게 된다. 잭슨은 피츠거 리 소장에게 북군의 우익과 후방 정찰을 맡겼는데 리 소장은 북군의 우익이 노지의 중앙에 위치한 데다 무장 수준도 허술하고 거의 무방비 상태라는 점을 파악한 뒤 이를 잭슨에게 보고하고, 잭슨은 이 척후를 바탕으로 해당 지역을 공격해 작전을 성공시켰다.

4.5. 사망

1863년 5월 10일 제18 노스캐롤라이나 보병연대가 작전 종료 후 밤이 되어 주둔지로 복귀하던 잭슨의 부대를 북군으로 오인해 공격했고 잭슨은 총상을 입었다. 게다가 후송 중 포격으로 들것에서 떨어지기도 했다. 왼팔을 절단하는 수술까지 감행했지만 이미 폐렴까지 앓고 있었고, 결국 총상 후유증과 폐렴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유해는 렉싱턴에 위치한 묘지에 안장되었다.

5. 평가

로버트 리, 제임스 롱스트리트와 함께 북버지니아군의 주요 남군 지휘관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롱스트리트와 함께 리의 양팔로 맹활약했다. 저 3인방이 동부에서 한참 활약할 때 북군은 거의 남군의 샌드백 수준이었다. 셰넌도어 계곡 전투의 결과로 인한 '스톤월' 장군의 명성은 리가 등장하기 전까지 남부와 북부를 통틀어서 가장 유명했다.

전술적으로 대단히 공격적이었으며 본인의 성격도 굉장히 적극적이고 선두에 나서길 선호했다. 또한 엄격한 지휘로 휘하 장군들을 강하게 통제해서 기회를 포착하면 주저없이 공격해 승리를 얻어냈다[7]. 이런 적극적인 공세와 독립된 전역 지휘관으로 능력 덕분에 리의 다소 애매모호한 공격 명령을 받고도 성공적인 결과를 낸다. 잭슨의 후임자들인 A.P. 힐과 유얼이 머뭇거리거나 어쩔 줄 몰라하다 승기를 놓치는 모습을 보여줬기에 후세에 이때 잭슨만 있었으면 달라졌을 거라고 평가받는 사례가 여럿이고 그 중에서도 게티즈버그 전투는 잭슨의 부재가 가장 뼈저리게 나타난다[8].

셰넌도어 계곡 전투로 독립된 전역 지휘관으로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음에도 리 휘하에서 군말없이 종군했던 점도 높이 평가받는다. 이미 한 번 독립 전역을 지휘한 명성높은 지휘관이 다른 사람 밑에 들어가서 일하는 게 쉽지는 않기 때문이다. 본인의 명성이나 실력이라면 남군 총사령관이라도 노려볼만한데 전혀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리를 적극 지지하며 그의 작전을 도왔다.

리는 잭슨의 죽음에 크게 상심했는데 둘 다 전술적으로 공세 지향적이었기 때문에 견해가 다를 때가 많았던 롱스트리트보다 훨씬 의지할 수 있었고 후임자들이 하나같이 리를 만족시키지 못했기에 잭슨의 부재가 더 크게 나타났기 때문이다[9].

6. 여담

  • 사망 직전에 남긴 말들이 상당히 인상적이다. 누가 독실한 기독교인 아니랄까봐, 주치의 맥과이어(Dr. McGuire)에게 오늘이 무슨 날이냐고 물어본 후 그가 일요일이라고 답하자, 이렇게 말한다. "내 소원이 이루어졌군. 늘 일요일(주일)에 죽고 싶었는데." 병상에 누워서 마취제에 취해 맛이 간 채로 부하들한테 돌격 명령을 내리다가, 죽기 바로 직전에 정신을 차리고, 미소를 지으면서, "이제 강을 건너, 나무 그늘 아래에서 쉬도록 하지(Let us cross over the river, and rest under the shade of the trees)." 라고 말한 후 사망한다.는 대중 입맛에 맞게 편집된 것이고, 실제로는 저렇게 말한 후 한참 있다가 "물(water)" 한마디 하고 숨을 거두었다 한다.
  • 부하들에게는 매우 엄격했다고 한다.
  • 어머니가 사망한 뒤, 잭슨은 고모인 폴리의 집에 맡겨졌는데 고모부의 폭언에 시달리다 결국 뛰쳐나왔다. 이후 사촌이 그에게 다시 돌아오라고 말하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돌아가긴 해야겠지. 하지만 그러지 않을래."
  •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던 까닭에 사관학교 시절 바닥에서부터 시작해야 했지만 독종같은 그의 성격 덕에 석차를 올려 59명 중 17등을 기록했다. 일년만 더 있었어도 먼저 졸업했을 것이라고 그의 학급동료가 증언.
  • 버지니아 군사대학 포병교관으로서의 평가는 그리 좋지 못했다. 교과서 내용을 통째로 암기하고 한치의 오차도 없이 강의하는 것도 그렇거니와 학생들이 와서 도움을 구하면 같은 설명만 반복하고 그래도 알아듣기 힘들어 다시 온 학생들에게는 불복종이라 간주하여 벌을 내린 탓에 '바보 톰'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거기다 유머감각도 꽝이다 보니 자신에게 무해한 장난을 좀 쳤다는 이유로 해당 학생을 퇴교시키기도 했다. 그래서 동문회에서 그를 교직에서 끌어내리려고 했을 지경이었다. 유명한 일화로 '잭슨: 기계의 3요소가 뭔가? 생도: 사면, 축, 바퀴입니다. 잭슨: 아냐, 축, 바퀴, 사면(교과서에 적힌 순서)이야. 다시 암기하도록.' 매사 이런 식이었으니 평가가 좋을 수가 없었다.
  • 소화에 도움이 된다고 여겨서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를 레몬을 챙겨와 전투 중에도 수시로 먹었다.
  • 굉장히 독실한 신자여서 일요일에 전투하는 걸 꺼렸다고 한다. 광신적인 면도 약간 있었는데 그래도 전투에 돌입하면 현실적으로 돌변하여 전투 전 기도하겠다는 부하에게 공격 나팔 부는 걸 잊지 말라고 농을 던질 정도였다.
  • 기면증이라도 있었는 지 툭하면 잠에 들곤 했다. 예배 중이나 작전 회의 중에도 잠에 들었고 심지어 전투 중에도 잠에 들었다.
  • 남북 전쟁은 그에게도 의미있는 때였는데 바로 그의 가족도 이 전쟁의 희생자들이었기 때문. 그의 누나였던 로라 잭슨은 연방지지자였는데 그의 죽음에 복잡한 감정을 내비쳤다고 한다. 잭슨은 그의 회고에서 '누나는 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 것이 내가 남부연맹군 장교가 됐다는 소식을 들은 것보다 낫다고 했다.'라고 할 정도. 이러한 그녀의 연방지지는 결국 그녀와 그녀의 남편이 이혼하는 것에도 영향을 미쳤다.
  • 노예제에 관해서는 중립을 지켰으나[10] 실생활에서는 언제나 공정하게 대했다고. 특히 주일학교를 흑인에게도 개방한 주인공이다. 주일학교 교사를 했던 그와 그의 부인은 주일학교 교육에 흑인도 제외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많은 흑인 노예들을 인격적으로 대했으며 그의 흑인 노예들도 그를 잘 따랐다고 한다.
  • 메릴랜드 주의[11] 프레드릭을 공격할 때 연방기를 공격해 내리려는 중 할머니 한 분이 나와 손질을 하려하자, "저 할머니를 공격하는 자는 즉결처분을 면치 못할 것이다. 계속 전진하라!"고 명령했다.
  • 그의 별명은 남부연합이 주문한 철갑선 CSS 스톤월에 붙었지만 이 배가 대서양을 건너왔을 때 전쟁은 끝난 뒤였다.
  • 2003년 영화 신의 영웅들에서 스티븐 랭이 배역을 맡았다.


[1] 비 준장은 이 날 총탄에 맞아 전사한다. [2] 기록마다 다르다. [3] rally behind 라는 어구는 뒤에 사람이 나왔을때, '~뒤에 집결하다'라는 뜻보다는 '그 사람을 응원하다', '지원하다', '지지하다'라는 뜻이 더 강하다. 영어사전 [4] Virginians는 버지니아 출신 병사들로 이루어진 제1여단을 말한다. 제1차 불 런 전투는 북군(북동버지니아군)과 남군(포토맥군, 섀넌도어군)이 맞붙었다. 섀넌도어군은 다시 4개의 여단으로 나누어졌으며 잭슨이 지휘하는 제1여단은 다른 여단과는 다르게 모두 버지니아 출신이었다. 그러므로 정황상, 제3여단장인 비(Bee) 준장이 매튜 고지(Mattew's hill)에서 북군에게 개털리고 퇴각중인 자신의 여단(제3여단의 보병들은 앨라배마, 미시시피 출신) 병사들을 불러 세워서 아직 대열이 건재하던 제1여단(다른 여단이 먼저 싸울 동안 뒤에 예비로 대기하고 있었다)을 가리키며 '저기 버지니아인들은 돌담처럼 서있는 잭슨 장군과 같이 굳건히 버티고 있는데 우리도 버지니아인들과 같이 다시 싸워보자!' 라는 의미이다. [5] 다만, 이 말은 아군이 후퇴 중임에도 불구하고 잭슨이 태연하게 가만히 있었기 때문에 복장이 터진 비 장군이 비아냥대는 말이었다는 주장이 있어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논란 중이다. 왜 논란중이냐면, 비 장군이 그 말을 한 직후에 피격당해 중상을 입고 쓰러져 후송되었으며 그 다음날 죽었기 때문이다. 살아남았다면 진의가 무엇이었는지 기록하거나 물어볼 수도 있을텐데... 게다가 부하 장교 중 아무도 그 일에 대해서 자세히 기록해놓지 않았다. [6] 전쟁이 시작된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잭슨과 비 모두 아직 미 연방군(Union army), 즉 북군 옷을 입고 있다. [7] 이는 초기 북군 사령관들의 어이가 없을 정도로 지나친 신중함과 대비되는데, 병력의 압도적인 우세 속에서도 남군이 전략적으로 자신들을 유인하기 위해 쓰는 기만술이라고 오판하거나 상대는 분대이고 본대는 정작 따로 있을것이라 여겨 선공을 자제하여 결정적 승기를 놓치는 사례가 빈번했다. 이는 율리시스 S 그랜트가 동부 전역으로 부임할 당시까지도 변하지 않던 현상이었다. 그나마 그랜트가 총사령관으로 임명되면서 일선 장군들을 교체, 자신의 휘하 장군들로 메꾼 이후에야 나아지게 된다. [8] 다만 이는 리가 명확하게 명령을 하달하지 않은 탓도 있으며 느닷없이 기습을 당해 뚜껑이 열려버린 젭 스튜어트가 본연의 임무를 시행하지 않고 엉뚱한 행동을 한 탓에 북군에 대한 상세한 첩보를 받지 못한 것 역시 한 이유다. [9] 특히 이후 남아있는 리의 휘하 장교들, 롱스트리트, 그리고 스튜어트등의 부재가 심각하게 다가왔고 이 중 스튜어트는 게티스버그 전투가 치러지고 난 이듬해인 1864년 전투 중에 전사하고만다. 롱스트리트 역시 아군의 오인공격으로 중상을 당해 한동안 전선에서 이탈해 있어야 했다. 게다가 아메리카 연합국의 수장인 제퍼슨 데이비스 또한 리를 들볶는 통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10] 성격 탓인지 죽을 때까지 노예제뿐 아니라 정치적인 견해 자체를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다만 남부연맹에 가담한 걸 보면... [11] 메릴랜드는 노예주였으나 연방에 잔류했고 게티스버그 전투 전, 리의 북버지니아군이 메릴랜드로 들어왔을때도 환영은 커녕, 냉담하게 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