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채에서 내려다 본 시가지
토론 성채
1. 개요
아랍어 تبنين영어 Tebnine / Tibnine
레바논 남부의 도시. 티브닌, 토론 등으로도 알려져 있다. 자발 아멜 산지의 중심지로, 티레에서 동쪽으로 15km 떨어진 해발 700 ~ 800m 대의 언덕에 위치한다. 사실상 십자군 전쟁기에 세워진 도시로, 다양한 인종이 섞인 결과 현재까지도 주민들 중 자연 금발 등 서유럽계 형질을 보이는 경우가 꽤 있다. 주민들은 대부분 쉬아 무슬림이고, 일부는 그리스 정교회 기독교도이다. 십자군 시기의 토론 성채가 주요 볼거리이다.
2. 역사
신석기 시대부터 인류가 거주했고, 청동기 시대부터 타원형 모양의 언덕에 마을 형성되었다. 탈무드에서는 유대 왕국의 북쪽 국경 마을 타프니스로 등장한다.2.1. 십자군 전쟁기
토론 성채 유적
1차 십자군 이후 1106년, 갈릴리 공 위그 드 팔켄베르그가 성채를 세워 토론이라 명명하였다. 성채에는 12개의 사각 성탑이 있었고, 그중 남쪽 탑은 감옥이었다. 다만 같은해 위그는 다마스쿠스 인근을 약탈하다 전사했고, 1107년 초엽 티레 총독 이자 알 물크가 일대를 습격하며 주민들을 학살했다. 이후 예루살렘 왕국의 보두앵 1세는 토론 영주령을 신설해 노르만인 기사 옹프루아 1세를 봉하였다. 1140년 그를 계승한 아들 옹프루아 2세의 치세에 토론은 안정을 누렸고, 아크레 및 티레와 다마스쿠스를 잇는 무역 거점이자 비옥한 토지에 기반한 농업 도시로 번영했다. 1185년 아랍 지리가 이븐 주바이르는 현지 무슬림들이 자치를 인정받았음을 증언한다. 옹프루아 3세 시기에는 자체 동전이 주조되었고, 토론의 위상은 영주들이 잇따라 왕국 내에서 중요한 위치에 오르며 함께 부상했다.
1187년 하틴 전투에서 옹프루아 4세를 사로잡은 살라흐 앗 딘은 조카 알 무자파르 우마르를 파견해 토론을 포위하게 했고, 영주가 사로잡힌 데다 준비가 덜 되어 있던 수비대는 3일 후 항복 의사를 밝혔다. 살라딘은 십자군 인사들을 인질로 두는 대가로 성내 인원이 재산을 챙겨 티레로 철수할 5일의 기간을 허락했고, 무슬림 포로들은 석방되었다. 점령 후 살라딘은 알 무자파르에게 성채를 재건하고, 자신과 친한 (무함마드 가계의) 사이드 가문과 수피를 신봉하는 파와즈 부족을 정착시키게 하였다. 그러던 1197년 11월, 시돈과 베이루트를 점령한 독일 십자군은 티레의 배후 확보를 위해 토론을 포위했다.
십자군의 공세로 성벽에 틈이 생기자, 마라트 알 누만의 학살이 재현될까 우려하던 주민들은 성주 후삼 앗 딘 베샤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표단을 내려보내 협상하게 하였다. 협상단은 기독교도 포로 5백의 석방을 대가로 한 안전 보장 (아만)을 제안했으나, 십자군 측은 단호히 거부했다. 또한 독일 십자군의 성공을 시기하던 현지 십자군 제후들은 술탄 알 아딜에게 포로 석방이 되어도 학살이 벌어질 것이라 경고했고, 이에 그는 구원에 착수하며 전서구를 통해 토론에 원군 소식을 전했다. 수비대 역시 필사적으로 저항했고, 포위측 갱도를 파괴했다. 이에 십자군은 진영으로 철수했고, 1198년 알 아딜의 원군이 다가오자 결국 티레로 철수했다. 동시에 신성 로마 제국에서 벌어진 오토 4세와 필리프 간의 내전 소식이 당도하자, 독일 십자군은 완전히 레반트를 떠났다.
1229년, 술탄 알 카밀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시칠리아 왕국 국왕 프리드리히 2세와의 협상에서 예루살렘 대여와 함께 토론 성채를 반환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독일계 튜튼 기사단에 성채를 넘기길 원했지만, 예루살렘 왕국 평의회가 옹프루아 4세의 조카이자 레몽 4세의 과부 알리스가 주인이라 결정하자 마지못해 그에 따랐다. 1236년 알리스가 사망하자 그녀의 손녀이자 전 예루살렘-키프로스 국왕 아모리 2세의 손녀이기도 한 마리가 계승했다가, 1240년 그녀와 결혼한 발리앙 디블랭의 증손자이자 시몽 드 몽포르의 사촌인 필립 드 몽포르가 토론의 영주가 되었다. 그는 성채 아래의 샘을 이용하는 대상들에게 세금을 부과했고, 1246년 필립은 현지 제후들과 함께 독일 영향력 하에 있던 티레를 뺏은 후 그 영주가 되었다. 점차 티레에 집중하게 된 필립은 1257년 아들 장 드 몽포르를 토론 영주로 봉했다.
1266년 여름, 사페드를 점령한 맘루크 왕조의 술탄 바이바르스는 더욱 북상해 토론을 포위했다. 소수의 수비대는 목숨 보장 및 안전한 철수를 조건으로 항복했고, 사페드의 경우와 달리 바이바르스는 약속을 지켰다. 이후 바이바르스는 성채를 파괴했고, 살라딘과 마찬가지로 사이드와 파와즈 부족을 정착시켜 티레의 십자군을 견제하게 하였다. 한편 티레의 필립 드 몽포르는 1270년 바이바르스가 보낸 자객에게 암살되었다.
2.2. 오스만 제국기
오스만 제국 시대인 1596년 기준 지명은 나프스 티브닌 혹은 빌라드 비샤라였고, 사파드 리와 산하 티브닌 나히야에 속했다. 주민은 150여 가구에 전부 무슬림이었고 매년 8900 악체의 세금을 납부했다. 1639 ~ 1649년 무렵 알리 및 후세인 앗 사기르가 슈크르, 문카르, 사아브 등의 가문들을 누르고 자발 아멜 (티브닌, 후닌, 마아라케, 카나)의 주도권을 확립했다. 18세기 전반 쉬아 셰이크 나시프 앗 나사르가 성채를 재건했고, 이후 티브닌은 나시프가 속한 아사드 가문의 본거지가 되었다. 메타왈리 쉬아 세력의 자치는 1780년경 제자르 파샤와 바쉬르 쉬하브 2세의 침공으로 무너졌고, 앗 사기르 가문은 티브닌에서 축출되었다. 1783년 앗 사기르 가문은 유수프 쉬하브와 함께 티브닌을 수복했지만, 곧 후자에게 배신당하고 아크레로 압송되어 처형되었다.2.3. 근현대
20세기 초엽 티브닌 전경
1920년 무렵 아랍 민족주의자 아담 칸자르는 프랑스령 시리아의 고등판무관 앙리 구로를 암살하기 위해 레바논과 시리아 각지에서 동지들을 모았다. 티브닌에서도 호응이 있었으나, 점차 그가 이슬람주의를 나타내자 지지를 거두고 아담의 당파를 축출했다. 1921년 앙리 구로는 자발 아멜의 쉬아 공동체에 대한 공격을 명하였고, 프랑스군은 인근에서 약탈한 물건들을 티브닌의 시장에 유통시켜 아사드 가문의 위신을 추락시키려 하였다. 또한 프랑스 당국은 티브닌에만 면세 혜택을 주며 현지인 간의 갈등을 부추겼다. 1922년 아담 칸자르의 처형 후에는 그 지지자들에 대한 체포가 이루어졌다.
레바논 내전기 티브닌은 다종교 도시임에도 큰 충돌이 없었다. 주민들은 본래 PLO를 지지하다가 그 부패함에 철회하고, 19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 이후 티브닌 출신의 나비흐 베리가 수장인 아말 운동을 지원했다. 다만 70년대 후반부터 남레바논 군의 지속적인 포격에 시달리며 헤즈볼라에 대한 지지가 높아졌다. 내전 이후 티브닌에는 캠프 샴록이 설치되었고, 아일랜드 유엔 평화유지군이 주둔하였다. 주민들은 평화 유지군을 환영하고 환대했다. 1993년 7월, 티브닌은 이스라엘의 포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2006년 레바논 전쟁 당시 티브닌은 재차 이스라엘의 포격을 당했고, 구도심의 상당 부분이 파괴되었다. 이후 레바논 정부군이 주둔하며 안정이 점차 회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