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4 00:17:33

테르마에 전투


제1차 포에니 전쟁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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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1. 개요

제1차 포에니 전쟁 시기인 기원전 259년 로마군 고대 카르타고군의 전투. 카르타고군이 로마군을 지상전에서 격파한 첫 전투다.

2. 상세

기원전 260년 밀레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지중해의 해상권을 확보한 로마 공화국은 이제 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는 희망이 부풀었다. 기원전 259년, 집정관 가이우스 아퀼리우스 플로루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각각 2개 군단을 이끌고 공세를 개시했다. 스키피오는 코르시카에 상륙해 알레리아 시를 초토화한 뒤 섬 전체를 별다른 어려움 없이 장악했다. 이후 사르다니아로 건너가 올비아 시를 포위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는 스키피오가 코르시카 뿐만 아니라 사르데냐에서도 성공적으로 싸웠다고 밝혔고,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와 나이우스 플로루스는 그가 올비아를 공략하고 육지와 바다에서 카르타고인들을 제거해서 아프리카 그 자체 외에는 아무것도 남은 게 없게 만들었다고 밝혔다.[1] 요안니스 조나라스는 그가 올비아를 포위했지만 강력한 적군 함대의 등장으로 승산이 없어지자 이탈리아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고 기술했다. 현대 학자들은 공략되었다는 울비아가 이후 기록에도 카르타고의 영역으로 나온 것을 볼 때 올비아는 이 시기에 로마군에게 공략되지 않았다고 추정한다. 그 후 스키피오는 로마로 돌아와 개선식을 거행했다.

동료가 이렇듯 큰 성공을 거두자, 플로루스 역시 시칠리아에서 카르타고군을 모조리 몰아내서 군사적 영광을 얻고 싶어했다. 그는 병력을 둘로 나눠서 한 부대는 카르타고의 지배를 받다가 밀레 해전 후 로마의 편에 섰고 현재 카르타고군의 공격을 받고 있는 마켈라 시를 구원하는 임무를 맡았고, 다른 부대는 테르마에 시로 진격했다. 한편 파노르무스(현재 팔레르모)에 주둔하고 있던 하밀카르는 마켈라와 테르마에 중 어느 쪽을 도울 지 고심한 끝에 테르마에로 향했다.

하밀카르가 테르마에 인근에 도착했을 때, 로마군이 이미 테르마에에 도착하여 도시를 포위 공격하고 있었다. 그는 군대를 매복시켜 놓고 정탐꾼을 풀어서 적의 정보를 파악했다. 얼마 후, 중요한 정보가 들어왔다. 보조 군단으로서 로마군과 함께 하던 이탈리아 동맹군이 전쟁이 끝난 뒤 전리품을 어찌 분배할 지를 놓고 분쟁을 벌인 끝에 파로포스와 테르마에 사이에 숙영지를 따로 세우고 로마군과 교류를 끊어버렸다는 것이다.

하밀카르는 즉시 이탈리아 동맹군을 급습했다. 이탈리아 동맹군은 적의 갑작스러운 습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여 4,000 내지 6,000명이 궤멸되고 나머지는 패주했다. 테르마에를 한창 포위 공격하던 로마군은 동맹군이 궤멸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급히 철수했다. 그 후 테르마에에서 겨울을 보낸 하밀카르는 기원전 258년 봄 가까운 곳부터 되찾으려 들 거라는 로마군의 예상과는 달리 시칠리아의 중심부인 엔나를 급습해 내부의 호응에 힘입어 가볍게 함락시켰다.

하밀카르는 여세를 몰아 시라쿠사 남동쪽 해안 도시인 카마리나로 진격해 역시 손쉽게 공략했다. 카마리나는 전쟁 발발 때 카르타고와 연합해 로마를 대적했다가 로마의 편으로 돌아선 시라쿠사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하밀카르는 아마도 시라쿠사를 압박해 카르타고와 손잡게 하려고 카마리나를 공략했던 것으로 보이나, 시라쿠사 참주 히에로 2세는 끝까지 로마를 지지했다. 이렇듯 하밀카르의 역습으로 큰 타격을 입었지만, 로마군은 전열을 재정비한 뒤 기원전 258년부터 반격했다.
[1]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에 따르면, 스키피오가 올비아를 점령했을 때 카르타고 사령관 한노가 전사하자, 스키피오는 그의 유해를 수습한 뒤 명예롭게 묻었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기록과는 교차검증이 되지 않기 때문에 신빙성은 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