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리아기에 세워져 오스만기에 증축된 탈아파르 성채. 2003년 이라크 전쟁 이래로 한동안 관공서가 입주하기도 했다. 2014-15년 다에시가 일부를 폭파했다.
1. 개요
아랍어 تلعفر튀르크멘어 Telafer
영어 Tal Afar
이라크 북서부의 도시. 텔아파르, 텔레페르로도 표기된다. 모술에서 서쪽으로 50km, 신자르에서 동쪽으로 40km 떨어진 해발 400m의 고원에 위치한다. 인구는 약 21만 5천명으로, 대부분 튀르크멘이며 특이하게도 시아파 비율이 25%나 나온다. 이는 이라크 최북단의 쉬아 공동체이자 자지라 지방의 드문 쉬아 주민이고, ( 알레비파 외에는) 대부분 순니인 튀르크인 사이에서 보기 드문 사례이다.
시가지 남쪽 외곽에 탈아파르 공항이 있다. 도시의 동쪽과 남쪽 평원의 언덕들에는 기원전 5천년 경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청동기 시기 도시 유적들이 남아있다. 1차, 2차 이라크 내전 시기 인구가 8만대까지 줄기도 했지만, 전후 회복되었다. 시내의 여러 쉬아 모스크 및 영묘들은 2014-17년 다에시 강점기에 모두 파괴를 겪었고, 탈아파르 성채 역시 일부 폭파되는 등 훼손되었다.
2. 역사
서남쪽 외곽의 야림 테페에서는 기원전 6천년경 할라프, 우바이드기 도시 유적이 발굴되었다. 성경 이사야서에서 하란 근처에 있다 한 텔라세르가 이곳일 수도 있다.[1] 아시리아 시기에 성채가 세워졌고, 8세기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파 마르완 2세가 카와리지 반란을 진압하며 증축하여 마르완 성채 (قلعة مروان)로 불리게 되었다. 11-12세기 셀주크 제국과 13세기 모술의 바드렛딘 룰루 정권 하에서 일대에 튀르크멘 부족들이 정착했고, 1534년 오스만 제국령이 되었다.오스만 시기에 현존하는 언덕 위 성채가 세워졌다. 19세기 들어 탈아파르는 바그다드 정권에 의해 3차례 포위되었고, 그때마다 주민들은 강력히 저항했다. 알리 파샤, 하피즈 파샤, 인제 바이락타르 모하메드 파샤의 포위 중 후자는 탈아파르를 함락한 후 주민 중 2/3을 학살하고 생존자들의 재산도 몰수했다고 한다. 그는 엄청난 금은보화를 얻어 병사들에게 분배하였다. 1837년 하피즈 파샤의 원정 후 탈아파르는 영구적인 오스만 군의 주둔지가 되었고, 신자르의 야지디 부족들을 제어하는 거점으로 활용되었다. 1880년대 탈아파르는 신자르 카자 (군) 산하의 행정 치소였다.
오스만 군과 함께 둘라디 튀르크멘 부족도 성내에 주둔했고, 1918년 오스만 군의 철수 후 탈아파르를 접수했다. 1920년, 탈아파르의 튀르크멘 부족들은 타지역의 아랍/쿠르드 인들과 함께 대대적으로 반영 봉기를 일으켰지만 다수의 사상자를 진압되었다. 당시 메소포타미아 주둔군 사령관이던 에일머 홀데인은 탈아파르가 4개의 언덕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각의 언덕 사이에는 1만 주민들의 수자원으로 활용되는 깊은 도랑이 있다고 묘사했다.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봉기 후 영국은 주둔군을 대폭 감축하고 이라크 왕국을 세워 형식상의 독립을 주는 등 유화책에 나서게 된다.
2.1. 현대: 종파 분쟁지
2007년, 탈아파르 성채의 영국군
이라크 전쟁 후 벌어진 1차 이라크 내전에서 탈아파르는 주요 격전지 중 하나가 되었다. 2004년 9월부터 수니파 민병대와 미군-정부군 간의 전투가 있었고, (튀르크멘들의 보호자를 자처하는) 튀르키예 정부는 그 과정에서 50여 튀르트멘 주민이 사망했다며 규탄하였다. 2005년 9월에는 탈아파르를 장악한 이라크 이슬람 국가 (ISI) 소탕전이 벌어졌다. ISI는 160여 전사자를 내고 패퇴했는데, 이때 그 지휘관이던 아미르 모하메드 압둘라흐만 알마울리 앗살비는 후일 아부 이브라힘 알하셰미 알쿠라시로 개명하고 다에시의 지도자에 오른다. 아무튼 미국 내에서 탈아파르를 평정한 '권리 회복 작전'은 매우 성공적으로 평가되었다.
하지만 2006년 가을부터 쉬아 구역 및 이라크 군경에 대한 테러가 줄을 이었고, 2007년 3월에는 트럭 테러로 무려 150여명이 사망했다. 이에 대한 쉬아 군경의 보복 학살로 50여명이 추가 피살되었고, 이로써 종파 갈등은 극에 달하게 되었다. 이후 거의 매주 폭탄 테러가 있었고, 도로변 혹은 차량 테러에서 점점 미사일 공격 등 규모가 커졌다. 가장 많은 테러가 있던 2008년에는 수백의 민간인 사망자가 나왔고, 2009년 들어 점차 줄긴 했지만 2010년 ISI가 쉬아 공동체를 대상으로 피에 젖은 나날이 올 것이라 위협하는 등 갈등은 지속됐다.
2.2. ISIL의 강점과 해방
2014년 다에시가 파괴한 쉬아 성지들. 셰이크 자와드 앗-사디크 모스크 (좌), 후세인 빈 알리의 사촌 사드 빈 아킬의 영묘 (우) |
그리고 2014년 6월, 다에시가 이틀 간의 전투 끝에 탈아파르를 점령했다. 그 직후 다에시는 시내의 쉬아 모스크 및 영묘들을 파괴했다. 당시 파괴된 곳들로는 셰이크 자와드 앗-사디크 모스크 (물라 마흐무드 후세이니야), 장기 왕조기인 1142년에 건립된 사드 빈 아킬의 영묘, 사이드 알 마흐무드 영묘, 캅도 모스크, 샤히드 모스크 등이 있다. 한편 다에시는 탈아파르를 거점으로 신자르를 점령하려 했지만 쿠르드 민병대의 결사 항전으로 실패했고, 분풀이로 2014년 12월 탈아파르 성채 일부를 폭파시켰다.
탈아파르는 다에시가 마지막으로 점유한 이라크 내의 주요 도시였다. 하지만 2017년 8월, 모술 수복에 이어 6만의 이라크군과 페쉬메르가는 7일 간의 격전 끝에 2천의 다에시 군을 괴멸시키고 탈아파르를 해방하였다. 그 과정에서 115명이 전사했고, 다에시 측은 1200여명이 전사했다. 이후 페쉬메르가가 일대에서 사로잡은 400여 다에시 포로들을 총살하여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전후 다에시가 파괴한 쉬아 시설들은 복원되었다.
[1]
19세기 후반 주오스만 영국 대사 오스틴 헨리 레이야드의 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