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검은머리 미군 대원수의 등장인물.원 역사의 클로드 오킨렉에서 따온 인물이다.
2. 작중 행적
유진이 북아프리카 전역에 막 건너올 당시(1939년 10월) 인도에서 영국군 사령관으로서 일본군의 공격을 막고 있다고 언급된다. 본작에서 유진과 몽고메리의 북아프리카 전역 부임 시기가 비슷하고,[1] 이때 이미 일본군이 진주만 공습을 기점으로 동남아시아와 인도 일대를 공격하고 있었음을 고려하면[2] 처칠에 의해 몽고메리와 교체당하고 인도로 가자마자 일본군과 붙은 모양이다.당시 영국 식민지 중에서 제일 중요한 인도를 일본군에게서 지키는 임무를 맡은 거니 오히려 북아프리카 전역보다 중요한 임무를 맡았다고 봐야 한다. 이집트 수에즈 운하 사수도 중요하지만, 북아프리카 전역은 당시 롬멜이 이집트까지 도달하지 못한 반면 당시 인도는 일본군이 인도차이나 반도를 휩쓸고 인도 직전까지 몰려오고 있었다.[3] 다만 본작에서 언급되지 않는 루이 마운트배튼이 원 역사처럼 총사령관을 겸하고 있었다면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았을 수는 있다.
이후 몽고메리의 삽질로 벨기에에서 포위망에 갇힌 21집단군을 분리한 저지대 집단군의 사령관으로 등장한다. 원 역사에서는 인도로 좌천된 이후 버마,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전선에서 활동했고 이탈리아의 몬테카시노 전투에서 이름을 날렸는데, 본작의 이탈리아 전선은 미군이 빠지고 이탈리아 왕국군과 영국군만 싸웠음을 고려하면 인도에서 일본군 관련으로 성과를 내고 이탈리아 전선에서 활약해서 승진한 모양이다. 제21집단군 예하 제2군 사령관이 저지대 집단군 사령관을 겸한다는 지령을 보아 2군 사령관이었다 저지대 집단군 사령관으로 승진한 모양이다 롬멜에게 깨져 멘탈붕괴한 영국군을 추슬러 반격 작전을 고안한 사람임을 고려하면 적절한 인선이다.
마켓 가든 작전이 평범하게 칼레와 됭케르크를 확보하기 위한 작전이었으면 이 참사는 안 났을 거라 한탄하는데, 포위망에 갇히자마자 벨기에 각지에 틀어박혀 결사의 방어태세를 구축하고 있었고 마켓 가든 작전 때 몽고메리가 미군에게 빼앗은(...) 물자 때문에 다행히 물자에 여유는 남아있었는 데다 오킨렉과 저지대 집단군도 유능해서 주력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다. 저지대 집단군은 원 역사에서도 본작에서도 서부전선 연합군 중에서 가장 강력한 전투력을 갖고 있었다.
복귀한 유진이 파리 사수 연설로 히틀러가 파리를 공격하도록 유도해 저지대 집단군을 향한 독일군의 압박이 다소 약해진 상태였는데, 저지대 집단군 구출에 대한 언급이 하나도 없어 걱정했지만 포위망 안으로 벨기에 망명정부 주요 인사들이 파견되어 다소 안도하고 포위망의 압박을 덜기 위해 앤트워프와 스켈트강 일대를 장악 가능한지 시도해보라는 지령을 받자 일단 시도해보기로 한다. 알기 쉽게 설명하면 남쪽 탈출구를 만드는 걸 포기하고 북상해서 앤트워프 항구 장악을 노린 것이다.
이후 영국군을 구출하기 위해 영국 해군이 임시 항구 하나 설치하거나 공중 수송으로 물자를 뿌리는 등의 방안이 고안되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했기 때문에 유진은 우연히 모델과 만났을 때 페이크를 친 뒤 B집단군 본대를 강제로 아미앵에 붙잡고 남은 제21집단군과 미군을 동원해 칼레와 됭케르크를 장악하고 저지대 집단군을 육상으로 연결시켜 B집단군을 C자 형태로 포위하기로 한다.
유진이 비행기 타고 벨기에 포위망 안에 들어오자 유진과 만나고, 유진은 아직까지도 저지대 집단군이 소멸하지 않은 것을 두고 그 역량을 칭찬했다. 브뤼셀 방어에 실패한 책임을 지겠다며 해임은 자신의 선에서 끝내달라고 했지만, 유진은 오킨렉의 공적을 치하하며 육군 원수직을 주었다.[4]
독일군이 아미앵에 정신 팔린 사이 알렉산더가 이끄는 제21집단군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북상하여 베를린의 수뇌부가 상황을 깨닫기 직전 저지대 집단군 구출에 성공하고, 저지대 집단군은 지친 상태라 구출된다고 바로 움직일 수는 없지만 저지대 집단군은 수십만이 넘기 때문에[5] 덩치 자체로 B집단군에게 압박을 가했다.
동시에 신편된 미 제6집단군은 패튼의 제7군이 점령한 메츠를 인수받아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방면에 나서 B집단군을 양익으로 포위하고, 프랑스 1군은 알자스-로렌 지역인 스트라스부르를 공격하였다. 알자스-로렌 일대 방어선이 제법 견고해서 프랑스군을 고기방패로 쓴 거지만, 독일에게 3공화국이 멸망당하고 3년 동안 나치강점기를 겪다(1938년 11월~1941년 6월 25일) 파리가 해방된 지 2달만에(8월) 파리가 다시 노려지는 상황에서 알자스-로렌 일대의 수복은 프랑스의 위신과 직결된 문제라 많은 희생을 감수해서라도 (독일과의 오랜 국경분쟁을 끝내기 위해서라도) 꼭 점령해야 했다.
스트라스부르는 당시 B집단군 주력이 있던 벨기에와 아미앵 일대에 비해 너무 동쪽 아니냐 의아할 수도 있는데, 당시 독일군은 베네룩스를 거쳐 파리를 공격했던 B집단군 본대만이 아닌 알자스-로렌을 포함한 프랑스 동부 일대에도 많은 독일군이 있었다. 이 때문에 변수를 줄이고자 조공으로 스트라스부르 공격을 행한 것이다. 파리 사수 연설과 동시기에 패튼에게 메츠 점령을 지시한 것도 그 때문이다.
당연히 독일군은 상태가 상대적으로 나쁜 저지대 집단군부터 노리려고 했기에 유진은 시간벌이를 하고자 브래들리에게 아미앵시(市)를 감싼 작은 포위망 하나를 더 만들라 지시했고 제9군이 시간벌이를 맡았다. 당시 브래들리가 지휘하던 미 12집단군은 1군, 7군, 9군, 15군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7군은 메츠 함락으로 힘이 다 빠져 후방으로 물러났고 15군은 한창 편성 중이라 제외, 1군은 저지대 집단군을 구출하러 간 영 제21집단군을 호위하러 동쪽으로 진격해서 9군이 아미앵시를 포위하고 1군은 SS 제1사단을 포함한 독일군을 사정없이 궤멸시키며 진격했다. 당시 독일군은 차량이 아닌 우마(牛馬)에 보급하는 열악한 보급 상황, 지속적인 격전으로 인한 소모, 끝없는 폭격으로 인해 역량이 소진된 상황이라 막을 수 없었다.
결국 B집단군은 고민 끝에 히틀러의 명령을 씹고 아미앵에서 아헨(독일 본토)까지 걸어서 도주(!)하기로 결심하고,[6] 히틀러는 벨기에의 영국군을 소멸시키면 전황을 역전시킬 수 있을 거라며 왈롱 집단군과 국민돌격대를 파견해 저지대 집단군을 쓸어버리라 지시한다. 하지만 왈롱 집단군은 아직 편성이 끝나지 않은 상태였고, 제대로 된 무장도 없는 국민돌격대의 전투력은 형편없었기 때문에 저지대 집단군은 오히려 서부전선 최강 전투력의 명성에 걸맞게 오히려 앤트워프를 공격한 왈롱 집단군과 국민돌격대를 궤멸시켜 버리고(정확히는 캐나다군) 포위망의 결정타인 브뤼셀을 총력을 다해 두들겼다.
모델이 이끄는 B집단군 본대는 브뤼셀과 샤를루아가 함락당하기 직전에야 브뤼셀 남부의 작은 마을, 워털루에 도달하고,[7] 결국 워털루를 빠져나가기 적전 저지대 집단군이 브뤼셀을, 미 제3군이 샤를루아를 함락시키고 포위망을 완전히 닫아버리는데 성공하자 모델은 B집단군 본대에게 항복을 허락하고 자살한다.
모델이 죽은 워털루가 과거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군이 유럽의 정복자 나폴레옹에게 최후를 안겨주었던 바로 그 장소임을 고려하면 영국군의 입장에서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이후 저지대 집단군은 다시 제21집단군에 통합되었고, 알렉산더 장군은 이탈리아 전선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서부전선의 영국군은 전부 오킨렉이 담당하게 된다. 8월부터 11월까지 3개월에 걸쳐 마켓 가든-독일의 파리 공격-아미앵 대포위까지 일어난 전투로 인해 서부전선 연합군은 한동안 강제 휴식에 들어가야 했고, 그나마 여력이 있던 포위를 안 당한 제21집단군 남은 병력으로 네덜란드 공세를 시도하는 일을 맡게 된다. 독일의 1개 집단군을 궤멸시키고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해방하는데 성공한 상황에서 현재 독일 본토인 아헨을 공격하는 건 무리지만 이 시점에서 마지막 남은 농경지인 네덜란드를 해방시키면 순무의 겨울이 재림하기 때문.
영 제21집단군이 북상하자 네덜란드 식량 생산의 중심인 네덜란드 남부가 전장이 되고, 독일군은 네덜란드인 수백만을 모조리 가두어 굶겨 죽이려 했지만 유진과 스탈린의 공갈포에 의해 아사자 수를 원 역사보다 크게 줄이는데 성공한다. 유진이 식량을 공중 수송하는 동안 독일군이 건드리지 않으면 그곳을 폭격하지 않을 테니 이걸 거절하면 유고에서 1명당 백 명 죽였듯 아사자 1명당 나치당원 10명 처형하겠다 엄포를 놨고, 그 말을 들은 스탈린은 "일단 만 명 총살하고 시작해야 할 거 아니냐"고 대답하자 결국 독일군이 물러났다.
이때는 여력이 충분치 않아 네덜란드는 도중에 멈췄다고 하는데, 1942년 2월 독일 본토 진격 명령 당시 네덜란드 남부 점령은 성공했다고 언급된다. 네덜란드 북쪽 독일군을 밀어내기 위한 양동이 필요하다고 의욕을 보였다고. 이후 서부전선 연합군의 독일 본토 공세 당시에는 영 제21집단군은 네덜란드 북부 해방 대신 남쪽으로 내리꽂아 루르를 북쪽에서 포위하라는 지시를 이행하고 루르 전역에서 마지막 서부전선 독일군 주력을 격퇴한다.
이후 베를린과 프라하 정복 명령이 떨어지자 유진은 영국군은 네덜란드 북부를 먼저 해방하고 이후 함부르크를 장악한 뒤 덴마크로 북상해 노르웨이 방면 추축군을 견제하며 여유가 되면 베를린에 내려오라고 명령한다. 이후 베를린 전투 당시 오킨렉이 네덜란드 북부에서 블라스코비츠 장군의 항복 문서에 서명을 받아냈다고 하며, 히틀러가 자살하기 얼마 전 괴링과 되니츠가 노르웨이 주둔군과 함께 있다고 언급되는 걸 보면 노르웨이 방면으로 갔을 것으로 보인다. 베를린 전투에는 합류하지 못했지만, 마켓 가든 작전을 기점으로 영국군은 베네룩스 일대에 주둔하고 있었고 북유럽에 남은 독일군 수십만 문제도 있어서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긴 했다.
3. 기타
서부전선 후반에 유진의 밑에서 연합군의 한 축으로서 활약했기 때문에 원 역사의 몽고메리의 위상을 대신할 2차대전 영국 육군의 대표가 될 가능성이 높다. 사실 원 역사에서도 오킨렉은 비운의 명장 소리를 들었던 인물인 만큼 고증이다.주인공의 행동으로 인한 나비효과로 인해 원 역사의 몽고메리 대신 수혜를 입었다.
[1]
몽고메리가 막 북아프리카로 파견될 당시 처칠 앞에서 그 눈 찢어진 스키타이인(유진)은 여우 면상도 못 볼 거라 의기양양하는 장면이 있다. 당시 유진은 북아프리카 전역 파견이 확정된 상태였으니 거의 같은 시기다.
[2]
본작에서는 1939년 6월 25일 바르바로사 작전과 진주만 공습이 동시에 일어났고 유진과 몽고메리가 북아프리카 전역에 파견된 건 1939년 10월이다.
[3]
태국은 점령당하진 않았지만
과달카날 해전에서 일본군이 미군에게 패배하기 전까지 친일에 가까웠다.
[4]
원 역사에서는 전후인 1946년에 원수가 되었다. 이때의 유진은 미영 연합군 총사령관으로서 전권을 쥐고 있었기에 가능했거나 영국군을 설득한 모양이다.
[5]
마켓 가든 전투 시작 당시 영국군 50만, 캐나다군 10만이었고 이 시점에서 영국군과 캐나다군 합쳐 50만 있었다고 한다.
[6]
다른 곳에 있던 독일군이야 낫지만, 아미앵에서 아헨까지 가는 데만 330~350km다.(...)
[7]
퇴각 당시 아미앵이 아니라 릴, 몽스, 아라스, 캉브레에서 시작해 탈출 난이도가 상대적으로 낮았던 만토이펠을 비롯한 일부 부대는 탈출에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