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7-13 18:29:11

크림시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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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비명 くりぃむしちゅー크림시츄
약칭 くりぃむ|크림
구콤비명 海砂利水魚|카이쟈리스이교
멤버 우에다 신야 (上田晋也)
아리타 텟페이 (有田哲平)
출신 일본 구마모토
결성년도 1991년 12월
데뷔년도 1992년
소속사 Natural Eight
예풍 만자이, 콩트
동기 나인티나인 (ナインティナイン)
요이코 (よゐこ)
캬잉 (キャイ〜ン), 코사카대마왕 (古坂大魔王)
주요 연표
1986년 구마모토 세이세이코우고등학교(済々黌高等学校) 럭비부에서 첫 만남
1991년 콤비 ‘카이쟈리스이교’ 결성
1992년 ‘쇼바이한죠(笑売繁盛)’[1]에서 TV 첫 출연
1994년 ‘보캬부라텐고쿠(ボキャブラ天国)’[2]에 레귤러 출연하면서 인기를 얻기 시작
2001년 ‘신 운난노키분와죠죠(新・ウンナンの気分は上々。)’[3]에서 ‘크림시츄’로 개명
2004년 개명 후 첫 칸무리 방송 ‘크림난토카(くりぃむナントカ)’ 시작
2004년 우에다 결혼[4]
2006년 크림시츄의 올나이트닛뽄 (くりぃむしちゅーのオールナイトニッポン) 시작
2006년 첫 골든타임 방송 ‘크림시츄의 타리라리데이키마스!(くりぃむしちゅーのたりらリでイキます!!)’[5] 시작
2006년 ‘24시간테레비(24時間テレビ)’ 사회자로 첫 발탁
2008년 ‘샤베쿠리007 (しゃべくり007)’ 시작
2009년 프라임에서 Natural Eight로 이적
2016년 아리타 결혼[6]
2016년 구마모토 지진 부흥 지원 채리티 라이브 개최[7]

1. 개요2. 멤버3. 콤비 결성
3.1. 첫 만남3.2. 세이세이코우 럭비부 – 와라이의 원점3.3. 콤비 결성 – 운명의 밤
4. 경력
4.1. 콩트 야마구치군과 타케다군의 심부름꾼4.2. 1991~1994: 라이브 시절4.3. 1994~1996: 보캬부라 붐4.4. 1996~2000: 보캬부라 중기~후기4.5. 2000~2001: 크림시츄로 개명4.6. 2001~2004: 운치쿠4.7. 2004~2009: 전성기4.8. 2009~2013: 미디어왕으로 부상4.9. 2013~현재: 부동의 인기콤비
5. 개그풍6. 콤비애7. 주변 인물8. 출연
8.1. 현재 출연작8.2. 서적8.3. DVD8.4. 게임8.5. 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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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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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이 츳코미 역의 우에다 신야, 오른쪽이 보케 역의 아리타 텟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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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비명이 크림시츄(크림스튜)인만큼 크림스튜 전속모델을 평생 해도 이상하지 않을 거 같지만 의외로 크림시츄로 개명한지 10년 만에(2011년) 처음으로 광고모델로 발탁되었다

우에다 신야 아리타 텟페이 2명으로 구성된 일본의 오와라이 콤비. Natural Eight 소속

2. 멤버

2.1. 우에다 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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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아리타 텟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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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콤비 결성

3.1. 첫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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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에서 1,2위를 다투는 명문고등학교인 세이세이코우고등학교(済々黌高等学校) 럭비부에서 처음 만났다. 고등학교 1학년때 아리타가 먼저 럭비부에 입부하고 뒤이어 우에다가 입부를 했다. 두 사람을 연결시켜준 사람은 같은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던 아리타와 초, 중학교 시절부터 친구인 아카기.[11] 같은 럭비부였던 아카기가 선배들의 시합에 응원 차 갔다가 응원석에서 우연히 우에다의 옆에 앉아 먼저 우에다에게 말을 걸었다고 한다. 우에다는 중학교 때부터 반쵸 출신인데다 강한 남자 코스프레에 여념이 없었기 때문에 아카기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심드렁한 반응에 대화가 좀처럼 이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우에다의 입을 열게 만든 주제가 바로 프로레슬링. 아카기가 프로레슬링에 대해 언급하자마자 우에다가 갑자기 돌변하면서 프로레슬링에 대한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보고 아카기는 초등학교 때부터 프로레슬링을 좋아한 아리타를 우에다와 연결시켜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카기로부터 우에다가 프로레슬링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아리타는 바로 우에다를 찾아가서 이노키 마에다 중 누가 더 세다고 생각해?”라고 질문. “이노키일려나”라는 우에다의 대답에 아리타가 “나는 전부터 쭉 마에다”라고 하자 우에다가 “아 그래”라고 한 게 두 사람이 처음 나눈 대화였다.

그런데 사실 우에다는 아리타의 첫 인상이 별로 좋지 않았다고 한다. 럭비부에서 처음으로 집합한 날에 아리타를 만났는데, 1학년생들은 원래 흰 색 추리닝을 착용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리타 혼자서만 팔에 선이 두 줄 들어간 추리닝을 입고 왔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보고 저런 식으로 자기 어필을 하는 녀석이랑은 절대 안 맞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게다가 아리타의 눈매도 마음에 안 들어 생리적으로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고 한다. 아리타가 이노키와 마에다 질문을 했을 때도 그냥 예의상 이노키라고 대답해준 것이라고 한다.

위 내용이 방송매체 등에서 두 사람이 주로 이야기하는 에피소드고, 카이쟈리스이교 시절에는 첫 만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었다: 중학교 시절을 쭈구리로 지낸 아리타는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는 반쵸가 되어 화려한 고교데뷔[12]를 하기로 결심한다. 초장부터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입학식 당일 체육관에서 옆에 서 있던 학생을 무작정 손등으로 가격했는데, 자신이 휘두른 손등에 맞은 사람이 바로 중학교 시절 진짜 반쵸였던 우에다였던 것. 이 사실을 깨달은 아리타는 당황해서 만난 지 3분만에 잽싸게 우에다에게 주스를 사다 바쳤고, 그 때부터 한 동안 우에다의 셔틀 노릇을 했다고 한다. 라디오에서도 두 사람의 첫만남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우에다는 어디까지나 ‘설’이라고 한다.[13]

3.2. 세이세이코우 럭비부 – 와라이의 원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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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레슬링을 계기로 말을 튼 이후에 두 사람을 한 층 더 가깝게 만든 것이 있는데 바로 ‘오와라이스타 탄생(お笑いスター誕生)’[14]이다. 이 방송은 구마모토에서 일요일 오후 3시쯤에 방송됐기 때문에 그 당시 두 사람의 주변에는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아리타의 첫 인상이 그다지 안 좋았던 우에다는 아리타가 오와라이도 좋아한다고 하자 속으로 ‘분명 뻔한 방송이나 보는 거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오와라이스타 탄생’을 좋아한다는 소리를 듣고 아리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고. 오와라이 센스도 비슷하고 대화를 할수록 서로 통하는 게 많다는 걸 느낀 두 사람은 더욱 더 친해지게 된다. 같은 럭비부[15] 소속인데다 취미도 같아 절친이 된 이후로는 기본적으로 하루 종일 붙어 다녔는데, 럭비 연습 전의 프리토크, 연습 중의 프로레슬링 놀이, 귀가 길에 식당에 들러 밥 먹으면서 프리토크, 아리타네 집에 가서 오와라이스타 탄생을 같이 보는 일상이 럭비부를 그만둘 때까지 매일같이 이어졌다. 럭비부실에서는 선생님[16], 럭비부 감독[17], 선배, 후배 할 거 없이 모든 사람들의 성대모사를 하면서 웃기는 게 일상이었고[18], 운동회에서 우에다가 단장, 아리타가 부단장을 맡아 분위기를 띄우기도 했다. 3학년 때는 학교 문화제인 ‘노래 제전(歌の祭典)’의 사회를 맡게 되어 처음으로 전교생 앞에서 네타를 선보일 뻔했다.[19] 두 사람은 고등학교 럭비부 생활을 크림시츄의 ‘와라이의 원점’이라고 평한다.

‘오와라이스타 탄생’을 보면서 ‘둘이서 나중에 저기 나가자’라는 말을 하기도 했는데 구체적으로 실천에 옮기지는 않았다. 고등학교 때부터 장래희망이 프로레슬링 기자 아니면 오와라이 게닌이었던 우에다에 반해, 아리타는 엄격한 집안에서 자라 어릴 때부터 치과의사가 되라던 부모님의 말을 그대로 따를 생각이었으며, 오와라이를 좋아해도 그걸 직업으로 삼을 생각이 이때 당시에는 없었다고 한다.

3.3. 콤비 결성 – 운명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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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졸업 후, 원래 아리타는 메이지대학 법학부 2부[20]에 합격했었는데, 재수가 확정된 우에다가 아리타한테 1년 재수해서 같이 와세다에 가자고 꼬셨다. 야간 수업을 듣기 싫었던 아리타는 우에다의 말에 따라 같이 재수하기로 결정. 1년간의 재수생활 끝에 우에다는 와세다대학 교육학부에 붙었는데, 아리타는 떨어졌다. 아리타는 내심 우에다가 1년 더 재수해주기를 바랬지만 “너는 릿쿄가 맞아”라는 우에다의 말에 결국 릿쿄대학 법학부에 입학했다.

릿쿄대학에 입학한 아리타는 화려한 대학생활이 펼쳐지길 기대했지만 현실은 시궁창. 릿쿄대학 부속고등학교 출신들끼리 이미 자기들만의 리그를 형성해버려서 잘 나가는 애들 그룹에는 낄래야 낄 수가 없었다. 아웃사이더 생활이 1년간 지속되다가 어차피 연애도 못 할 바에야 남들 놀 때 공부나 열심히 해두자는 생각에 2학년 때부터 변호사자격시험을 본격적으로 준비했다. 그러다 2학년 때 우연히 친목모임에 나가게 됐는데, 그 자리에 나온 사람들 대부분이 릿쿄고등학교와 릿쿄여학원 출신들이라 무슨 말을 해도 싸한 반응에 혼자 소외감을 느끼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어떤 여자애로부터 “아리타군은 법학부지? 나중에 변호사 될거야?”라는 질문을 받게 되는데, 그 자리에서 어울리지 못 하고 재미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고 있던 게 분해서 그만 “아니, 변호사 따위 안 해. 나는 오와라이 게닌이 돼서 스타가 될 거니까. 니들 다 깜짝 놀라게 만들 거야.”라고 센 척을 하고 만다. 그 말을 들은 여자애는 “진짜 썰렁하다”며 가볍게 실소. 풀이 죽은 아리타는 2차는 패스하고 그냥 집으로 가기로 하는데, 그 때 당시 살던 곳이 위치가 애매해서 전철을 여러 번 갈아타야 했다고 한다. 집에 가기 귀찮아진 아리타는 마침 우에다가 그 근처에 사는 걸[21] 떠올리고 그 집에서 자고 갈 생각으로 약 1년만에 우에다에게 연락을 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우에다의 집에서 1년 만에 재회를 하게 되는데, 오랜만에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니 우에다 역시 아리타와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아 친구도 못 사귀고 대학생활에 적응을 못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동아리 신입생 환영회에 20번 이상 참석해서 참석할 때마다 분위기를 띄웠지만 끝날 때가 되면 항상 선배들로부터 ‘우리 동아리와 맞지 않는 거 같다’며 가입 거부를 당했다고 한다. 참고로 신입생인 주제에 매번 본인이 모임을 진행하려고 들어서 번번히 까인 것이라고 한다.

아리타와 달리 우에다는 재수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게닌이 되는걸 목표로 삼고 있었다. 게닌이 되더라도 우습게 보이지 않기 위해 일부러 와세대에 간 거였고, ‘와세다 출신’이라는 타이틀을 얻는 게 목적이라서 졸업할 생각도, 공부할 생각도 전혀 없었다고 한다. 막상 게닌이 되려고 마음은 먹었는데 되는 방법을 몰라 일단 닥치는 대로 공연이나 보자는 심산으로 일주일에 다섯 번쯤 연극이나 영화를 보러 갔었다고 한다. 그러다 우연히 공연 정보지에서 콩트 야마구치군과 타케다군이 하는 연극 광고를 접하곤 ‘오와라이스타 탄생’에서 봤던 게닌들이라 재미있을 거 같아서 공연을 보러 갔다. 공연 후, 직원이 나눠주는 찌라시를 받았는데 극단원을 모집한다는 내용을 보고 콩트 야마구치군과 타케다군의 기획사에 지원을 하기로 결심한다. 그런데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몰라서 일반 취준생이 취준하듯이 이력서를 작성하고 면접을 준비했다고 한다. 면접의 달인이라는 면접 공략서도 구입하고 취준생이 기업 정보 공부하듯 기획사 정보(자본금이 얼마인지, 회사 비전 등)를 달달 외었다고. 원래 우에다는 핀게닌이 될 생각이었다. 게닌이 되겠다고 결심했을 때 프로 게닌으로서 손색이 없을 거 같은 사람으로 아리타를 떠올리긴 했으나, 자기 자신의 인생에 다른 사람을 끌어들일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 아리타에게 연락을 하지는 않았다. 우선 혼자서 오와라이계에 뛰어든 다음에 아이카타를 찾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게닌이 되기 위해 이력서를 쓰고 있던 차에 우연히 아리타로부터 연락을 받게 된 것. 그 날 밤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를 하다가 아리타가 “예전에 둘이서 오와라이 게닌이 되자고 했었지”라고 언급. 그 말을 들은 우에다가 “나는 진짜로 할 마음이야. 이력서도 쓰고 있었어 오늘. 너도 같이 보낼래?”라고 말하자 아리타가 “나도 같이 보낼래!”라고 해서 콤비를 결성하게 되었다. 후에 아리타는 우에다가 그 말을 하기를 계속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고 회상했다.[22]

운명의 밤으로부터 2주 후에 프라임원 사무소에 면접을 보러 갔는데, 둘 다 연예기획사 면접 경험이 처음이라 정장을 입고 갔다고 한다. “자네는 장래희망이 뭔가?”라는 면접관의 질문에 우에다는 “꽁트나 만자이 같은 네타를 만드는 오와라이 게닌이 되고 싶습니다.” 라고 대답했는데, 그 당시 릿쿄대학 법학부에 재학 중이던 아리타는 아무 생각 없이 “훌륭한 변호사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듣고 놀란 우에다가 무심코 “그게 아니잖아!”라고 진짜 츳코미를 넣었는데, 그 일련의 대화를 네타로 착각한 면접관이 “재미있는 녀석들이네. 좋았어, 채용!”이라며 합격시켰다고 한다.

4. 경력

4.1. 콩트 야마구치군과 타케다군의 심부름꾼

1991년말에 콤비 결성을 한 이후 아리타와 우에다는 오와라이 콤비인 콩트 야마구치군과 타케다군(コント山口君と竹田君)의 야마구치가 대표로 있던 예능프로덕션 프라임원에 소속되었다. 처음에는 극단원으로 소속되어 무대 미술 보조를 돕는다던지 도시락을 사 오는 등 잔심부름을 하다가, 콩트 야마구치군과 타케다군의 전담 심부름꾼이 되었다. 아리타가 야마구치, 우에다가 타케다의 심부름꾼을 하면서 게닌활동을 시작했다. 야마구치군에 의하면 우에다를 타케다군에게 붙여준 이유는 우에다처럼 눈치가 빠르고 머리 회전이 빠른 성격이 아니면 타케다군을 챙길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타케다군에 의하면 그 당시 우에다는 자신을 선배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라이브 연습 중 타케다군은 실수가 잦아 야마구치군으로부터 종종 핀잔을 듣곤 했는데, 그 때마다 우에다가 ‘그런 것도 못 하냐’는 듯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장래희망이 뭐냐고 물어봤을 때는 "타케다상 같은 코미디언은 되고 싶지 않아"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심부름꾼 생활은 약 1년간 이어졌는데, 개인적인 자잘한 심부름이나 기사 노릇은 일절 시키지 않았고, 시간이 나면 영화나 라이브를 보면서 오와라이 감을 기르게 했다고 한다.

심부름꾼 시절에는 둘 다 돈이 없어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활했다. 아리타는 웨이터, 공사현장 막노동, 핫도그가게의 사쿠라[23]아르바이트를 했다. 사쿠라 알바를 할 때는 한 손에 핫도그를 들고 주변을 돌면서 “이런 곳에 이런 가게가 생기다니 너무 편하다~!”라고 큰소리로 외쳤다고 한다.[24] 한 편, 우에다는 편의점, 웨이터, 공사현장 막노동 아르바이트를 했다. 편의점[25]에서는 손님이 계산을 할 때마다 출납계에 손님의 성별과 연령 버튼을 눌러야했는데, 외모만 봐서는 나이가 분간이 안 되는 여자 손님에게 무심코 나이를 물어보는 실수를 한 적이 있다.

정식으로 데뷔하기 전엔 ‘시마바라카사이류도세키류(島原火砕流土石流)’, ‘콩트 샴푸와 린스’ 등 다양한 이름으로 활동했다. 결성 후 3개월이 된 시점에서야 제대로 된 콤비명이 있어야겠다고 판단한 야마구치가 아리타에게 ‘제니가메(銭亀)’, ‘캔디포트(キャンディポット)’와 ‘카이쟈리스이교(海砂利水魚)’가 적힌 종이를 보여주며 콤비명을 골라보라고 했다. 아리타가 곤란한 얼굴을 하며 이름을 못 고르고 있으니까 야마구치군이 “그럼 카이쟈리스이교다”라고 말하면서 일방적으로 결정. 아리타가 “아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서”라고 반항하니 “바보자식. 카이쟈리스이교는 운수가 좋은 이름이야. 바다의 자갈(砂利)도, 물 속에 있는 물고기도, 잡아도 잡아도 끝이 없으니까 오래오래 간다는 뜻이라구. 바보자식 거절할 셈이냐!”라고 호통을 쳤다. 집에 가자마자 우에다한테 전화해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더니 우에다도 “그게 뭐야?”라고 했다고. 나중에 알고 봤더니 ‘제니가메’와 ‘캔디포트’는 선배 게닌의 예전 콤비명이었고 처음부터 콤비명이 ‘카이쟈리스이교’로 정해져 있었다고 한다. 야마구치군이 이즈에 갔을 때 우연히 발견한 식당 ‘ 씨푸드카레전문점 카이쟈리스이교(シーフードカレー専門店海砂利水魚)’[26]를 보고 두 사람의 콤비명으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참고로 카이쟈리스이교는 라쿠고 수한무(寿限無)에 나오는 단어다.

심부름꾼을 하면서도 둘 다 한 동안 계속 학교에는 나갔다. "학교를 다니면서 게닌을 하는 건 힘드니까 학교를 그만두거나 아니면 졸업한 다음에 다시 게닌에 도전하라"고 야마구치군이 권하자 우에다는 바로 집에 연락하고 자퇴를 했는데, 아리타가 진심으로 게닌을 할 생각이 있는지 확신이 없었던 우에다는 아리타가 스스로 결정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아리타에게 자신의 자퇴 사실을 일부러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후에 그 사실을 알게 된 아리타가 “왜 그런 중요한 일을 알리지 않는 거야? 우리 콤비잖아!”라고 하면서 화를 냈다고 한다.

그 무렵, 아리타는 어머니로부터 아버지와 이혼한다는 전화를 받는 것을 시작으로 집안에 줄줄이 악재가 겹치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버지의 회사가 도산 직전으로 집까지 넘어가게 생겼고, 갑자기 조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남동생은 카드빚 때문에 빚더미에 앉게 되고, 아리타 앞으로도 빚이 몇 천만 엔이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나중에는 명문대 명예교수였던 외삼촌마저 성추행으로 고소 당했다는 소식까지 들려왔다. 그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집에 전화를 걸어 아버지에게 학교를 그만두고 게닌이 되겠다고 털어놓았다. 그러자 아버지가 도쿄로 와서 “학비를 내지 않아도 된다니 효자로구나. 게다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훌륭하다”고 혼내기는커녕 칭찬을 하고 빚 갚으라고 50만엔까지 주었다고 한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아버지가 사채를 써서 50만엔을 마련해준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얼마 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리타는 그 전까지 자신이 유복하게 자란 것에 대해 게닌으로서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는데, 힘든 일을 줄줄이 겪고 나서는 드디어 그 콤플렉스에서 벗어난 기분이었다고 한다. 아리타에 의하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우에다에게 전했을 때 우에다의 첫마디가 “잘 됐네”였다고 한다. 아리타가 드디어 오와라이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으로 그 말을 했다고. 아리타 역시 장례식 직후에 라이브에서 한 네타가 굉장히 만족스러워서 지금까지도 우에다가 “그게(그 공연이) 우리의 지금을 있게 한 거지”라고 하면서 아리타를 기쁘게 만들어준다고 한다. 두 사람은 아리타의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고 난 1993년 중반에 드디어 정식으로 콤비 시작을 하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4.2. 1991~1994: 라이브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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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성 직후에는 네타를 만들 줄도 모르고 다쟈레(말장난)로만 가득한 네타를 만들거나 해서 선배 게닌들에게 ‘신선미가 없다’는 소리를 들었다. 데뷔초에는 우에다가 보케고 아리타가 츳코미였는데, ‘쇼바이한죠(笑売繁盛)’를 통해 TV에 첫 출연하여 네타를 선보였다. 그 전설의 네타가 바로 이 것:
우에다가 보케, 아리타가 츳코미 시절의 네타


우에다: 오늘은 나를 위해 모여줘서 고마워
아리타: 널 위해 모여준 게 아니지만 말야
우에다: 감사의 표시로 한 곡 부를게
아리타: 부를 필요 없지만 말야
우에다: 유민의 곡부터, 1, 2, 3, 4 네에 유민 와우 이쪽을 봐
아리타: 바보자식

이 무대에서 의외로 좋은 반응을 얻은 바람에(?) 한 동안 이 상태를 계속 유지했다. 이 때 아리타는 우에다가 보케 천재라고 생각했고 그런 우에다의 보케를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했다고. 심지어 이 네타로 천하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우에다의 보케는 다쟈레나 개그 위주고 아리타의 츳코미는 ‘바보녀석’, ‘바보가 아니니까’, ‘너는 바보냐?’ 세 패턴뿐이라 점점 현실의 냉혹함을 깨닫게 되고, 기분전환을 위해 6개월 후에 포지션을 바꿔 아리타가 보케, 우에다가 츳코미가 되었다. 포지션 변경 이후에는 짧은 시간 안에 두각을 나타내어 라이브 공연계에서 일약 인기 콤비가 되었다. 인기를 얻고 네타가 좋은 평가를 얻으면서 TV에도 출연하기 시작했다.

1993년에 출연한 ‘GAHAHA킹(GAHAHAキング)’ [27]에서는 4주 연속으로 우승했다. 1994년에 와카테 게닌들이 다쟈레를 겨루는 ‘보캬부라 천국(ボキャブラ天国)’에 레귤러 출연자로 합류했을 때는 자신들이 다른 게닌들보다 몇 보 앞서나간 위치에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 방송을 통해 한 층 더 인기를 얻게 되었는데, 다른 게닌들이 웃길 때도 절대 웃지 않고 자신들이 웃긴 말이 떠올랐을 때만 앞으로 나가서 웃기고 바로 빠지는 탓에 동료들로부터 ‘잭나이프의 뾰족함(ジャックナイフの切れ味)’이라 불렸다. 이 시절에는 특히 아리타가 까칠하기가 이루말할 수 없어서, 네타 방송에서 심사위원들이 네타를 혹평하거나 하면 불만스러운 표정을 얼굴에 그대로 드러냈었다.

4.3. 1994~1996: 보캬부라 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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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캬부라천국’의 ‘보캬부라 발표회·더 히트 퍼레이드(ボキャブラ発表会・ザ・ヒットパレード)’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게 되면서, 두 사람은 비록 폭소문제나 넵츈만큼의 존재감은 없었어도 실력 있는 레귤러 멤버로서 활약을 했다.

이 시절에도 여전히 까칠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는데, 동료 게닌들과 겉으로는 잘 지냈지만 둘 다 속으로는 비록 지금은 인기가 많을지언정 언제까지나 이 상태가 지속될리가 없다고 생각해, 인기에 취해서 들떠있는 것을 한심하게 생각했다. 아리타는 방송 시작과 동시에 준비한 보케를 다 치고 나면 더 이상 말을 안 했기 때문에 후반부엔 거의 우에다 혼자서만 말을 하는 식. 게다가 이지리[28]를 당하는 것도 싫어해서 이지리를 당하면 싫은 티를 내면서 썩소만 지을 뿐이라 큰 존재감을 드러낼 수 없었다.
아리타: 그 때는 다른 게닌들 따위 게닌으로 인정하지도 않았고 우리가 제일 웃기다고 생각했어요. 어떤 선배 게닌이든 간에, 우리가 만든 방송에 게스트 출연하는게 아니면 굳이 어울리려는 생각이 없었죠.
우에다: 대기실에서는 동료들과 마음을 터놓고 지내도 최종적으로는 모두 적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일에 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지금도 아리타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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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캬부라’에서 보여준 네타나 연기는 다크한 계열이 많았고 오치[29]보다는 그 후의 우에다가 치는 사악한 츳코미로 웃기는 패턴이 많았기 때문에 출연 당시 ‘사악한 형님들(邪悪なお兄さん)’이라는 캐치프레이스가 붙었었다. 본인들도 이 캐치프레이스를 마음에 들어 해, 방송에서 의식적으로 사악해 보이는 연출을 했다고 한다.

‘보캬부라 천국’에서 일약 인기 게닌이 되어 데뷔한지 3년밖에 안 된 시점에서 이미 레귤러 출연을 몇 개씩이나 하고 있었다. 1995년 3월에 첫 단독라이브를 개최, 여러 게닌들과 유닛을 구성하여 합동 라이브도 개최하는 등 라이브 공연 활동을 활발히 펼쳤다.

데뷔 4년 차, 두 사람이 아직 24~5세였을 때부터 이미 미래 방향에 대한 대비를 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주로 오와라이 라이브 게스트 출연을 통해 기반을 다지고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는 길어야 1, 2년 버티겠다고 생각해 라디오와 TV 출연을 위한 기반을 다져야겠다고 판단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토크 실력을 기르는 게 우선인데, ‘보캬부라’ 내에서는 토크 할 기회가 없었다. 그 때, 프로덕션 진리키샤에서 ‘바보폭주(バカ暴走)’라는 라이브를 시작했는데, 진리키샤 소속 게닌들은 그 당시 아직 와카테 게닌들 뿐이라, 두 사람을 통해 관객을 동원할 요량으로 라이브 참여를 요청했다. 관객이 20명밖에 없는 소규모 공연이라 토크 연습을 하기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 둘은 출연 조건으로 네타 대신 프리토크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고, 그 요구가 받아들여져 네타 대신 토크 공연을 하면서 토크 실력을 쌓았다. 참고로 두 사람은 이 때 언터쳐블과 만나게 되어 아리타가 야마자키, 우에다가 시바타와 친분을 쌓았다.

4.4. 1996~2000: 보캬부라 중기~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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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는 보캬부라 붐을 타고 ‘올스타 감사제(オールスター感謝祭)’에도 출연하고, ‘와랏테 이이토모(笑っていいとも)’ 코너에 게스트 출연도 하고, SMAPxSMAP에서 꽁트도 하고, 라이브 영업도 다니는 등 바쁘게 활동을 했다. 특히 눈에 띄는 활동은 1996년부터 2000년까지 중계리포터로 활약을 한 ‘오우사마노브런치(王様のブランチ)’. 그 때 당시엔 브런치 스탭들이 오와라이 경험이 별로 없어서 두 사람한테 배우면서 일을 했다고 한다. 중계리포터로 발탁이 되었지만 단순히 중계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우에다가 진행을 하고 아리타가 상황극을 하거나 해서 마치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꽁트 같았다고 한다. 두 사람 다 무조건 웃겨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현장에서 스탭들에게 종종 “그런 식으로 하면 안 웃겨!”라고 화를 내는 통에 중계는 웃기게 나와도 현장 분위기가 좋지 않아 중계 담당 감독이 되려는 스탭이 없었다고 한다.

보캬부라 천국에서도 사악한 네타와 아리타의 폭로 토크로 서서히 인기를 얻게 되었다. 이 시절의 아리타는 조금씩 TV에 익숙해져서 성격이 조금 둥글어졌지만, 이지리를 당하기 싫어하는 건 여전히 남아 있어 토크방송에 나가면 우에다가 대부분의 멘트를 가져갔었다.

1998년~2000년 사이에는 첫 꽁트 방송인 ‘오와라이향상위원회(お笑い向上委員会 笑わせろ!)’와 언터쳐블, 안잣슈와 같이 한 ‘게바루토일족(ゲバルト一族)’ 라이브로 높은 평가를 받는 등 오와라이 실력을 부지런히 갈고 닦았다. 그 덕분에 골든타임대의 방송에도 자주 출연하게 되었고, 이 시기에 이미 인기 콤비로서 잘나가고 있었다.

그러다 2000년 7월에 아리타가 게닌으로서의 태도를 바꾸게 만든 일이 일어났는데, 그 당시 아리타는 하기모토 킨이치(萩本欽一)[30]의 연극‘86의 13(86の13)’에 출연 중인 동시에 우에다와 함께 친한 게닌들인 언터쳐블, 안잣슈‘게바루토 일족(ゲバルト一族)’[31]이라는 유닛을 꾸려 라이브 공연을 하고 있었다. 킨짱의 연극에서는 다들 진지하게 리허설을 하는 분위기였는데, 어느 날 아리타가 ‘게바루토’에서 하던 대로 가벼운 텐션으로 리허설에 임했다고 한다. 그러자 킨짱이 “아리타군은 그대로 하면 돼”라고 조언. 그 말을 들은 아리타는 혼나는 줄 알고 “본방에서는 제대로 할 거에요”라고 변명을 했더니 “아리타군은 원래 대충대충하는 성격이니까 제대로 연기를 하겠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편하게 대충해.”라고 했다. 킨짱의 조언에 따라 공연에서도 리허설 때처럼 편하게 했더니 센스 있는 오와라이 공연이라고 자부한 ‘게바루토’ 라이브보다 연극쪽이 훨씬 더 좋은 평가를 받아 충격을 받게 된다.

그 때부터 아리타는 독기 가득한 캐릭터에서 지금의 능글 맞은 캐릭터로 노선을 변경. 자신이 즐기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으로 어깨에 힘을 풀고 방송에 임하게 되면서 선배 게닌들의 츳코미도 달라지고 방송을 온전히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의 ‘어른스러운 우에다’와 ‘서투른 아리타’ 구도가 정착하게 된다. 이 일을 계기로 방송 스타일이 완전히 달라진 아리타에게 예전 보캬부라 시절 때부터 아리타를 알아온 동료들은 ‘예전엔 잭나이프 같더니 이젠 방아깨비(米つきバッダ)[32] 가 다 됐네’라고 한다.

4.5. 2000~2001: 크림시츄로 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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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부터 웃짱난짱(ウッチャンナンチャン)의 ‘신 운난노키분와죠죠(新・ウンナンの気分は上々。)’에 출연하면서 두 사람의 콤비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일이 일어났다. 두 사람이 합류하기 전에 바카루디(현 사마~즈)가 먼저 출연하고 있었는데, 하이쿠 짓기 코너에서 주로 자신들의 인기 없음에 관한 자학적인 하이쿠[33]를 선보이고 있었다. 뒤이어 카이쟈리스이교가 투입되면서 바카루디와 하이쿠 짓기 대결을 펼쳤다. 우에다는 국문과 출신답게 매번 하이쿠 다운 하이쿠를 짓는 걸로도 모자라 각 행의 세로드립까지 완벽해 하이쿠 챔피언이라는 칭호까지 얻었다. 그러다 2000년 2월 25일자 방송에서 우에다가‘두 번 다시 오지 않아도 돼 바카루디(もう2度と/来なくていいぞ/バカルディ)‘라는 하이쿠로 바카루디를 도발하는 바람에 두 콤비의 라이벌 구도가 형성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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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5월 26일 방송에서 두 콤비의 첫 번째 대결의 막이 올랐다. ‘지는 쪽이 은퇴’를 건 첫 번째 탁구 대결에서는 초반 분위기가 카이쟈리스이교가 이기는 쪽으로 흘러갔지만, 막판에 바카루디가 12:10으로 역전 승리. 하지만 분위기 파악을 못 하고 이겼다는 이유로 우치무라의 독단에 의해 패배한 카이쟈리스이교는 은퇴가 면제되고 대신 바카루디에게 은퇴/보류 중 선택하라고 한다. 당연히 보류를 선택한 바카루디. 이겼지만 복수하게 해달라는(?) 바카루디의 요청에 의해 2000년 8월 11일 방송에서 두 번째 대결이 펼쳐졌는데, 이번에는 축구 페널티 킥 대결을 해서 바카루디가 지면 사마즈(さまぁ〜ず)[34], 카이쟈리스이교가 지면 더 트라이(ザ・トライ)[35]로 개명을 하기로 한다. 우에다의 막판 활약으로 바카루디가 패배해 사마즈로 개명을 하게 되었으나, 개명 확정/원래 콤비명으로 원상복귀를 걸고 추가 대결할 기회가 다시 한 번 주어졌다. 두 달 후인 2000년 10월 20일 방송에서 세번째 대결로 육상경기 대결(3단 멀리뛰기, 역기 들기, 2인3각 달리기 후 뛰어서 빵먹기)을 하는데, 여기서 지는 바람에 6개월간 사마즈라는 콤비명으로 활동이 확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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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 후 생방송 중 대결을 통해 사용기간을 6개월 더 연장해 총 1년간 개명 상태를 유지한 사마즈는 2001년 9월 28일 방송에서 원래 콤비명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고민을 토로. 이에 따라 우치무라는 사마즈가 지면 개인명을 비치 미무라(ビーチ三村)와 오오타케 스이카와리(大竹すいか割り)[36]로 개명, 카이쟈리스이교가 지면 크림시츄로 개명을 걸고 마지막으로 대결을 시켰다. 크림시츄로 개명을 하는 이유는, 웃짱난짱의 우치무라가 이동 중에 아리타에게 좋아하는 음식이 뭐냐고 묻자[37] 아리타가 크림시츄(クリームシチュー)[38] 라고 대답해 그대로 ‘크림시츄(くりぃむしちゅー)’[39]가 최종 개명 후보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카이쟈리스이교가 패배하여 6개월간 크림시츄로 활동이 결정. 카이쟈리스이교의 콤비명을 지어준 콩트 야마구치군과 타케다군은 동 방송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두 사람이 브레이크를 못 하고 있는 게 본인이 지어준 이름 때문인가 싶어서 걱정했는데 개명을 해서 오히려 잘 되었다고. 거기다 한 술 더 떠 기왕이면 캐롯 아리타, 포테이토 우에다로 바꾸는게 어떨지 제안까지 해 아리타와 우에다가 극구 반대했다.

‘크림시츄’로 개명을 했으나 ‘사마~즈’가 개명했을 때만큼의 파급효과는 없어 개명 후에도 계속 ‘카이쟈리스이교’와 ‘크림시츄’ 를 병용하며 활동했다. 반년 후, 우에다가 콤비명을 그다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은 점과 콤비명을 바꾸는 것에 대한 부담감을 느끼기 시작해, 원래 콤비명인 ‘카이쟈리스이교’로 돌아갈지 ‘크림시츄’를 그대로 사용할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고민 끝에 팬들을 모아 토론회까지 열었는데도 결론이 나질 않아, 결국 우치무라가 당구를 쳐서 당구공이 짝수가 나오면 ‘크림시츄’로 영구 개명, 홀수가 나오면 ‘카이쟈리스이교’를 유지하는 게임을 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14번 공이 나오는 바람에 그대로 ‘크림시츄’가 정식 콤비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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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명 후 사마~즈의 라이브에서 마에세츠(前説)[40]를 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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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운난노키분와죠죠는 2003년에 폐지됐는데, 크림시츄와 사마즈 두 콤비의 개명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2010년 12월 21일에 특방 형식으로 부활했다. 웃짱난짱, 사마즈와 크림시츄 세 팀이서 대결을 펼쳤는데, 이 중 가장 와카테인 크림시츄가 가장 체력이 부진해서 졌다.[41]

한 편, 크림시츄는 2004년에도 또 한 번 개명의 위기(?)를 겪은 적이 있는데, 점술인 호소키 카즈코(細木数子)와 함께 한 레귤러방송 ‘즈바리이우와요!(ズバリ言うわよ!)’에서 호소키가 두 사람에게 콤비명을 ‘그린&핑크(グリーン&ピンク)’[42] 또는 우에다가 좋아하는 오코노미야키를 넣어서 ‘오코노미시츄(お好みしちゅー)’로 바꾸라고 권한 적이 있다[43]어느 쪽이 그린이고 어느 쪽이 핑크냐고 두 사람이 묻자, 호소키가 크림시츄의 리더가 누구냐고 질문. “정해진 건 아니지만, 일단 아이카타 쪽이” 라고 아리타가 답하자 “그럼 저쪽(우에다)이 그린이고 너는 핑크네”라고 해서 ‘그린 우에다’ 와 ‘아리타 핑크’가 된 적이 있었다. 물론 두 사람은 전혀 바꿀 의사가 없어서 호소키의 제안은 묵살 당했다.[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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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 우에다와 아리타 핑크

4.6. 2001~2004: 운치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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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명 이후로 브레이크[45]한 것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본인들에 의하면 개명 후에 인기가 높아진 것처럼 보이는 건 우연히 타이밍이 그렇게 맞아 떨어진 것일 뿐이고, 개명하고 나서 한 참 지나서 브레이크를 했다고. 개명 직후에는 ‘제니가타킨다로(銭形金太郎)’에 레귤러로 출연하기 시작, 런던 하츠에서 아리타가 ‘쿠루통(クルトン)’ 아리타로, 우에다는 신사적인 캐릭터로 주목을 받고, ‘황금전설(黄金伝説)’에 출연해서 크림스튜 500 그릇 먹기에 도전하는 등 인기 방송 출연을 통해 전국적인 인지도를 높여나갔다.

2001년에 출연한 ‘토라노몬(虎ノ門)‘이 브레이크 하게 된 계기라고 볼 수 있다. 처음에는 우에다 혼자서 이토 세이코(伊藤 正幸)가 진행하는 ‘아사마데 나마돗찌(朝まで生どっち)’라는 토론 코너에 참가자로 투입이 됐다. 토론 주제는 ‘요코야마 야스시와 카츠신타로, 둘 중 어느 쪽이 더 카리스마 있는가?’였는데, 우에다는 어느 쪽에 대해서도 자세히 아는 게 없어 스탭에게 자료를 요청했더니 종이 두 장 분량의 얄팍한 정보만 주어졌을 뿐이라 별 보탬이 안 되었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경제효과나 삼단논법 등을 억지로 끼워 맞춰서 진지하게 토론에 임하는 캐릭터를 연기해봤더니 예상 외로 좋은 반응을 얻었다. 우에다는 사실 한 번만 출연하고 말길 바랬는데, 계속해서 출연해달라는 오퍼를 받아, 얄팍한 지식으로 대충 얼버무리는 데에는 한계가 있겠다는 생각에 본격적으로 잡학서적을 구입해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2003년부터는 제한 시간 안에 사회자가 제시한 단어에 관한 잡학지식을 최대한 알기 쉽고 설득력 있게 서술하는 사람이 승리하는 ‘운치쿠왕 결정전(うんちく王決定戦)‘ 코너에 출연하게 되었는데, 초대 운치쿠왕인 게닌 이쥬인 히카루(伊集院光), 평론가 야마다 고로(山田五郎), 탤런트 마츠오 타카시(松尾貴史), 가수 나기라 켄이치(なぎら健壱) 등을 제치고 우에다가 3대 운치쿠왕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게 되었다. 운치쿠왕 결정전에서의 활약상이 화제를 불러일으켜 그 때부터 TV, 라디오 등에 출연 빈도가 급상승했다.

우에다가 혼자 출연할 당시에 아리타는 출연하지도 않으면서 매번 스튜디오에 왔었다. 우에다가 방송하는 모습을 아리타가 모니터로 감상하는 모습이 매회마다 2초 정도 방송되었는데, 출연료를 주면 안 나올 거라는 식으로 농담을 했었다고 한다. 우에다의 폭발적인 인기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잠시 격차가 발생하긴 했는데, 아리타의 독특한 캐릭터와 토크 실력이 점점 인정을 받기 시작해 나중엔 둘 다 인기콤비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사회자 역할을 담당하는 레귤러방송에 참여하게 되면서부터 두 사람은 의상을 캐쥬얼에서 수트로 바꾸게 되었다. 우에다는 그 전까지 금발머리를 한다던가 빡빡머리를 하는 등 헤어스타일에 많은 변화를 보여주다가 이 때부터는 단정한 스타일을 정착시켰고, 아리타는 그 전까지 머리를 내리고 다니다가 올백 스타일을 고정시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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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2004~2009: 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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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치쿠붐은 금방 사그라들었지만, 이 때부터 파죽의 기세를 보인 덕분에 개명 후 첫 칸무리 방송인 ‘크림난토카(くりぃむナントカ)’를 시작했다. 2004년부터 시작된 크림난토카는 두 사람이 전코너의 기획에 참여하는 등 스탭들과의 합도 좋아 매우 애착을 가진 방송이다. 참고로 방송명은 시청자들이 이름을 제대로 기억해주지 않기 때문에 ‘난토카(뭐든지)’로 충분하다는 아리타의 제안으로 지어졌다. 2008년부터 골든타임 시간대로 바뀐 후로부터 그 당시 붐이었던 퀴즈방송 ‘헥사곤(ヘキサゴン)’에 시청률이 밀려 결국 2008년 9월부로 종영되었다. 종영된 이후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부활을 시도, 2009년부터 2013년까지 부활 특방 형식으로 연 1회 이상 방송되었다.[46] 그 후 4년 반만인 2017년 4월에 인터넷방송 AbemaTV에서 부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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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외에도 2005년부터 시작한 라디오 ‘올나이트닛뽄(オールナイトニッポン)’은 중, 고등학생 리스너들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끌어 아이튠즈 팟캐스트 랭킹에서 1위를 하기도 했다. 2008년에 종영된 이후 2016년 6월에 구마모토 지진 부흥 지원 채리티 라이브 개최를 계기로7년 반 만에 부활했다. 2016년 12월에는 아리타 결혼, 2017년 5월에는 구마모토 지진 성금 전달 및 구마모토 라이브 개최를 계기로 부활했다.

이 시기에는 골든타임 레귤러인 ‘와라이노킨메다루(笑いの金メダル)’, 꽁트방송 ‘리차드홀(リチャードホール)’, 그리고 지금까지도 계속 방송 중인 ‘세카이이치우케타이쥬교(世界一受けたい授業)’, ‘샤베쿠리007(しゃべくり007)’ 등 수많은 방송에 고정출연, 사회를 맡게 되면서 안방극장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4.8. 2009~2013: 미디어왕으로 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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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에 프라임원에서 매니저 오오하시가 독립하여 차린 내츄럴 에이트(Natural Eight)로 이적했다. 이 시기부터 골든타임 출연 방송이 늘어나서, 스케줄 조정을 위해 다수의 심야방송이나 라디오를 그만두게 되었다. ‘샤베쿠리007(しゃべくり007)’, ‘세카이이치우케타이쥬교(世界一受けたい授業)’, ‘시루시루미시루(シルシルミシル)’, ‘페케퐁(ペケポン)’, ‘크림퀴즈미라클9(くりぃむクイズミラクル9)’ 등 방송을 통해 안정적인 인기를 누렸다.

또한, 우에다는 2012년부터 2년 연속으로 오리콘의 ‘좋아하는 사회자 랭킹’에서 1위를 하는 등 이 시기부터 사회왕이라는 타이틀을 갖게 된다.
오리콘 좋아하는 사회자 랭킹
(好きな司会者ランキング)
연도 회차 순위
2019년 제11회 5위 (▲2)
2018년 제10회 7위 (▲1)
2017년 제9회 8위 (▼3)
2016년 제8회 5위 (▼3)
2015년 제7회 2위
2014년 제6회 2위 (▼1)
2013년 제5회 1위
2012년 제4회 1위 (▲3)
2011년 제3회 4위 (▲3)
2010년 제2회 7위 (▲2)
2009년 제1회 9위

둘이서 같이 사회를 보기도 하지만, 주로 우에다가 사회를 보고 아리타가 우에다와 가장 가까운 위치에 앉아 우에다의 진행에 적절한 보케를 넣으면서 분위기를 띄우는 구도가 많다. 이 때부터는 각자 핀 방송이 늘어나면서 더욱 더 활약하게 된다.

우에다는 원래부터 운치쿠왕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아리타는 방송에서 철저하게 보케를 치는 쪽이었기 때문에 스마트하거나 똑똑한 이미지를 그다지 어필한 적이 없었다. '크림퀴즈미라클9’을 하면서는 미라클9팀 캡틴으로서 퀴즈를 막힘 없이 풀어내는 모습을 보여 지적인 이미지가 붙기 시작했다.

크림난토카 종료 이후, 2011년부터 오와라이 방송 ‘소프트크림(SOFTくりぃむ)’ 을 시작으로 ‘고리고리크림(GORIGORIくりぃむ)’→ ‘가리가리크림(GARIGARIくりぃむ)’→ ‘구리구리크림(GURIGURIくりぃむ)’을 진행, 이 방송에서는 여타 레귤러들과 달리 주로 아리타가 사회를 보고 우에다가 플레이어로서 기획에 참여하는 경우가 많았다.

4.9. 2013~현재: 부동의 인기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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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부터 현재까지도 여전히 인기 게닌 콤비로서 다수의 레귤러 방송을 보유하고 있다. 2017년 현재 같이 출연하는 레귤러 방송이 6개, 우에다 개인 출연방송이 7개, 아리타가 4개로 부동의 인기를 유지하고 있다.

‘소프트크림’을 시작으로 한 ‘크림(くりぃむ) 시리즈’는 2013년부터 ’GIRIGIRI크림기획공장(GIRIGIRIくりぃむ企画工場)’으로 리뉴얼, 2014년에 다시 ‘크림난챠라(くりぃむナンチャラ)’로 리뉴얼된 이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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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다의 경우 개인 출연 방송이 7개나 되는데, 오샤레이즘(おしゃれイズム)’ 같은 예능 방송 외에도 ‘Going! Sports & News’, ‘일본 메달이야기(日本メダル話)’, ‘스트롱 포인트(ストロングポイント)’ 등 스포츠방송, 그리고 '새터데이 저널(サタデージャーナル)'과 같은 시사방송 등 다양한 분야로 진행영역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아리타도 이전에 비해 사회를 맡는 방송이 늘어나긴 했으나, 우에다에 비하면 좀 더 오와라이 느낌이 강한 방송을 맡고 있다. 와카테 게닌들의 네타 방송인 ‘아리타 제너레이션(有田ジェネレーション)’‘전력! 탈진 타임즈(全力!脱力タイムズ)’가 그러하다. 또, 본인의 취미나 관심사를 반영한 방송도 잘 맡는 편인데,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에서 프로레슬링 방송 ‘아리타와 주간프로레슬링과(有田と週刊プロレスと)’를 진행 중이며, 평소에 연예계 가십이나 연애사에 관심이 많아서 그런지 의외로 ‘와타시노 나니가이케나이노?(私の何がイケないの?)’‘아리타텟페이의 꿈이라면 깨지말아줘(有田哲平の夢なら醒めないで)’ 같은 방송도 꾸준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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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부터는 고향인 구마모토 지진 재해 성금 지원을 위해 한 달에 한 번씩 자선 토크라이브를 실시하고 있다. 2017년 6월에 1년간 토크라이브를 통해 모은 성금 1120만5786엔을 구마모토현에 전달했다. 토크 라이브에서는 관객의 과반수가 라디오 리스너들이라 타방송에 게스트 출연할 때처럼 사골 네타[47]를 들려주진 않는다. 라이브에서는 주로 근황토크, 연예계 뒷얘기를 많이 들려주고, 가끔 우에다가 같은 소속사 후배게닌 하마론과 만자이를 할 때도 있다.

5. 개그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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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초에는 꽁트 위주로 네타를 짜다가, 나중에 만자이도 같이 하면서 꽁트와 만자이를 병행했다. 네타는 기본적으로 두 사람이 같이 만든다. 만자이나 토크를 할 때 아리타의 질린듯한 보케에 우에다가 예를 들거나 설명을 하는 ‘타토에츳코미(たとえツッコミ)’‘설명츳코미(説明ツッコミ)’가 특징적이다. 아리타가 다소 모호하거나 분명하지 않은 보케를 치면, 우에다가 설명하는 듯한 츳코미를 넣어 웃기는 패턴이 많다. 아리타의 보케는 ‘다소 부족한 보케’, 우에다의 츳코미는 ‘다소 넘치는 츳코미’라는 평가를 듣기도 한다.

6. 콤비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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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 처음 만났을 때부터 현재까지 별 다른 기복 없이 쭉 사이가 좋은 걸로 유명하다. 생일 때마다 서로의 선물을 챙겨주는 걸로 유명하며, 보통 오와라이 콤비끼리는 대기실에서 대화를 잘 하지 않지만 크림시츄는 둘이서 몇 시간씩이나 수다를 떠는 걸로도 유명하다.

* 과거 모 토크 방송에서 한 이야기. 예전에 아리타가 슬럼프에 빠져 보케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을 때, 우에다가 눈치를 채고 아리타가 한 말이 보케처럼 보이게 츳코미를 쳐줘서 그 순간을 넘겼다고 한다. 또, 우에다가 츳코미가 잘 안 될 때도 아리타가 신경써서 보케를 쳐서 우에다의 츳코미를 끌어냈다고 한다. 그 밖에도, 아리타가 컨디션이 좋아서 방송이 잘 된 날은 대기실에서 우에다가 “오늘도 컨디션 좋더라”라고 아리타를 칭찬한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아리타도 우에다가 방송을 잘 하면 칭찬을 해준다고 한다.
* 보캬부라천국의 시청률이 하락세를 타고 있을 때, MC인 히로미가 파이레츠 등과 보캬부라천국 베스트 특집 같은걸 하고 있을 때의 이야기. 히로미가 사이 안 좋은 콤비가 인기 얻을 확률이 더 높다는 식으로 말하자, 파이레츠의 하루카가 “카이쟈리는 사이 엄청 좋아요!”라고 하면서 대기실에서 서로의 머리를 세팅해 주는걸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그랬더니 히로미가 “그럼 그 녀석들은 안 팔리겠네”라고 농담조로 말했다고 한다.
* 생방송 중 너무 긴장한 나머지 좌불안석이 된 아리타를 보고 우에다가 ‘인간이란 자기 본모습보다 더 잘 보이려고 하기 때문에 긴장하는 거야. 너는 충분히 재미있으니까 하던 대로 하면 돼’라고 말하며 긴장을 풀어주었다고 한다.
* 두 사람이 모 방송 오디션을 보러 갔을 때의 이야기. 그 오디션은 사회 볼 사람 한 명만 뽑는 오디션이라 둘 중 한 명만 뽑아야 해서 방송 스탭이 여러 번 설명을 했지만, 두 사람은 완고하게 ‘콤비니까 핀[48]은 싫습니다’라고 버텨서 결국 사회 자리는 다른 게닌에게로 넘어갔다.[49] 지금은 각자 개인활동도 활발히 하고 맡고 있는 개인방송도 여러 개 있지만, 신인 시절에는 무조건 둘이서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 부득이하게 어느 한 명이(주로 우에다가) 개인적으로 일을 하게 되고 그걸 파트너에게 보고하지 않으면 ‘파트너 몰래 핀 활동을 했다’ 하여 ‘코소핀(こそピン)’[50]이라고 불렀다.
* 우에다가 결혼식에서 신랑측 스피치를 할 때, 아리타에게 “지금까지 고마웠고 앞으로도 잘 부탁해”라고 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아리타가 오열하면서 우에다와 얼싸안았다고 한다.
* 크림시츄의 후베 게닌이 마에세츠에서 한 이야기. 우에다의 결혼식 날, 아리타가 거액의 축의금을 건네자, ‘아이카타끼리 이렇게 많이 필요 없어’ ‘내 성의를 봐서 넣어둬’라며 한참을 실랑이를 하다가 결국 우에다가 답례품으로 아리타가 평소에 갖고 싶어하던 침실용 티비를 사주는 걸로 타협. 며칠 뒤, 후배 게닌이 아리타와 같이 있을 때 어마어마하게 큰 티비가 도착했다. 그걸 보자마자 바로 우에다에게 전화한 아리타. ‘이렇게 큰 거 안 사줘도 되는데.’라고 말하자 수화기 너머로 ‘무슨 상관이야!’라고 외치는 우에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 2008년, 2009년에 24시간 테레비에서 우에다가 2년 연속으로 돗키리(몰카)를 당한 적이 있는데, 아리타에 대한 애정이 흘러넘쳐 크림시츄의 콤비애가 화제가 됐었다.
2008년 24시간 테레비 돗키리
하마론: 해산 위기같은 건 없었어요?
우에다: 없어. 아니 나만 없다고 생각하는걸지도. 근데 아마 없다고 생각해. 그 녀석도 없지 않았을까?
하마론: 근데 열 받을 때는 있죠?
우에다: 그거야 있지. 너 뭐야~ 싶을 때도 있긴 하지만, 가장 죽지 않았으면 싶은 사람이기도 하잖아. 아이카타는 아마 그런 게 아닐까? 서로 콤비로 뭉친 이상 마지막까지 그 녀석의 인생에서 내가 질 수 있을만큼의 책임은 져야지 같은.
하마론: 그런데 혼자서 일하거나 하고 있잖아요 지금.
우에다: 내 안에서 결코 나 자신을 위해서 일을 한다는 생각은 정말로 없어. 두 사람을 위해서 하고 있는거야. 이 쪽의 바보같은 일만을 하게는 해주지 않을테니까 ‘그럼 이쪽 (진지한 일)도 할테니까 이쪽 (바보같은 일)도 (하게 해주세요)’ 같은 거지. 나는 별로 이쪽 (진지한 일)을 아리타가 하게 하고 싶지 않아. 아리타는 바보같은 일만 했으면 좋겠어. 그런 방향으로 갔으면 좋겠어 그 녀석은.
2009년 24시간 테레비 돗키리
언터쳐블 시바타: 아리타상 남자다운 점 있지 않아요?
우에다: 없어 없어. 그 녀석의 좋은 점은 그런 게아니니까. 남자답다거나 그런 점이 아니잖아. 말하자면...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아이같은 점이랄까. 이렇게 순수하게 웃을수가~ 싶을 때가 있다고. ‘그 여자애가 아리타상 멋있다던데’ 라고 말했다고 쳐. 보통은 ‘에? 진짜로? 어차피 거짓말이지?’하고 나같은 사람들은 반응하잖아 싸하게. 속으로는 기쁘더라도. 그 녀석은 그런 감정을 순수하게 드러낸다니까. 엄청 알기 쉽게! ‘에~ 응 응 응 진짜로~’ 이런 식으로. 이 녀석 어쩜 이렇게 귀여울까! 싶다니까.
물론 관객들을 웃기고 싶어서 이 일을 하고 있지만, 누가 웃을 때가 제일 기쁘냐고 물어보면 아이카타가 웃을 때가 제일 기뻐. 궁극적으로 말하면, 아리타가 웃는 얼굴이 보고 싶어서 이 일을 하는 걸지도 몰라. 그 녀석이 웃을 때가 가장 기쁜 걸.
2015년 '오오타우에다'
내 파트너는 뭔가 역시 아직 소년같은 구석이 많아. 그런 의미에서는 귀염성이 있잖아.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애같은 구석이 있어.

7. 주변 인물

  • 오오하시 유카(大橋由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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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림시츄의 소속사 Natural Eight의 돌싱 사장. 2000년 7월부터 2009년 프라임원에서 독립해서 Natural Eight 사무소를 차릴 때까지 크림시츄의 매니저를 담당했다. 매니저 일을 하기 전에는 TV 방송제작사 사원이었는데, 크림시츄가 카이쟈리스이교 시절 출연한 ‘더 스타볼링(ザ・スターボウリング)’에서 스탭과 출연자로서 처음 만났다. 아직 소속사에서 차를 지원해주지 않을 때, 녹화 후 전철을 타러 가는 길에 팬들에게 둘러싸여 곤란한 상황에 빠진 두 사람을 차로 집까지 바래다주면서 친해졌다. 그로부터 3년 후, 프라임원에 입사하여 크림시츄의 매니저를 담당했다. 라디오에서 크림시츄가 매니저 욕을 하면서 팬들 사이에서 유명해진 인물. 라디오에서 언급을 하도 많이 해서 나중에는 ‘아줌마는 정말 아줌마로구나!(ババァは本当にババァだな!)’라는 코너까지 만들어졌다. 스케줄을 자주 깜빡하고, 이름을 미묘하게 틀리게 부르는 등 어리버리한 면이 많으며, 넉살 맞고, 뻔뻔스러운 구석이 있어서 별명이 바바아(ババァ). 가끔 크림시츄가 열 받을 때는 쿠소바바아(クソババァ)라고 불렀다. 두 사람이 하도 바바아라고 부르니까 신입 매니저들 앞에서 체면이 안 선다고 오오하시한테 한 소리를 듣자 나중에는 예의를 갖추는 의미로 바바상(ババァさん)이라고 불렀다. 비록 크림시츄와 팬들 사이에선 바바아로 통하지만 누가 뭐래도 지금의 크림시츄가 있게 만든 일등 공신.
  • 고토부키 츠카사(コトブキツカ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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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명은 사노 타다히로(佐野 忠宏)로 크림시츄의 소속사 후배 게닌. 후배지만 사실은 크림시츄보다 일찍 데뷔했다. 고토부키 츠카사를 칸지로 쓰면 寿司(스시)가 돼서 스시라고도 불린다. 게닌활동을 하면서 아리타의 심부름꾼 겸 운전수를 담당, 아리타가 쉴 때 같이 게임을 하거나 여행을 하는 등 아리타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 크림시츄와 마츠코 디럭스가 하는 방송의 마에세츠를 주로 담당해서 많을 때는 일주일에 20번 넘게 할 때도 있다. 아리타가 카지노를 하러 한국에 갔다가 비행기를 놓쳐서 올나이트닛뽄 방송을 펑크[51] 냈을 때 아리타 대신 우에다와 방송을 진행한 적이 있다.[52] 자기소개가 장황하기로 유명하다. 영화 코멘테이터로 활동 중이며, '전력! 탈진타임즈'에도 가끔 패널로 출연한다.
  • 하마론(浜ロ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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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명은 하마구치 료(浜口 亮). 크림시츄의 또 다른 소속사 후배 게닌이자 우에다의 운전사 겸 심부름꾼. 우에다로부터 받는 고정수입 15만엔 외에 식비를 비롯한 경비, 심지어 여행비용까지 우에다가 다 대준다고 밝혔었다. 우에다가 있는 곳마다 하마론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대부분의 시간을 우에다와 함께 보낸다. 최근에는 ‘우에다채널’과 ‘오오타우에다’를 통해 노출도를 높이고 있다. 가끔 토크라이브에서 우에다와 네타를 할 때도 있다.
  • 마츠코 디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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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림시츄와 같은 소속사 탤런트. 마츠코가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던 시절, 예능인이 아닌 자신이 어중간한 느낌으로 예능에 출연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껴 예능 출연 섭외 요청을 계속 거절했었다고 한다. 그렇게 마츠코가 계속 거절을 해도 스무번 이상 끈질기게 섭외 요청을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크림시츄의 후지티비 방송 ‘페케퐁’의 담당 디렉터. 끈질긴 섭외 요청에 결국 출연[53]을 하게 되고 그 곳에서 크림시츄의 매니저인 오오하시를 만나게 되었다. 그 당시 오오하시는 프라임원에서 독립해서 내츄럴에이트를 차릴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 때까지 기획사 소속이 아니었던 마츠코는 오오하시의 소속사라면 괜찮겠다라고 생각해서 2009년 9월 내츄럴에이트 창립과 동시에 그 곳에 소속이 되었다. 내츄럴에이트에는 원래 크림시츄 이외에 오오하시가 프라임원에서 데리고 나온 고토부키 츠카사와 하마론만 소속될 예정이었는데, 오오하시가 마츠코와 만난 후 크림시츄에게 “그 뚱보 데리고 오고 싶은데” 라고 하자 두 사람이 “그거라면 괜찮지 않아?”라고 해서 영입하게 되었다고 한다. 마츠코는 크림시츄와는 물론 오오하시와 특히 사이가 좋은데, 아리타에 의하면 둘이 절친 사이라고 한다. 마츠코도 크림시츄와 마찬가지로 오오하시를 ‘바바아’라고 부른다. 아리타와는 ‘아리타와 마츠코와 남과 여’, ‘전력! 탈진 타임즈’를 같이 했었고, 아리타의 핀방송 ‘와타시노 나니가 이케나이노?’에서는 아리타의 대타를 뛴 적도 있다. 크림시츄와는 ‘스타 드래프트 회의’, ‘시루시루미시루선데이’, ‘빗쿠리무’에 같이 출연. 드라마도 같이 한 적이 있는데, 아리타와는 ‘파파돌’ 3회에 같이 까메오 출연했고, 우에다 주연의 ‘천재 바카본’에도 특별 출연했다.
  • 우에다 케이스케(上田啓介)
    파일:keisuke.jpg
    우에다의 세 살 터울 형. 예명이 우에다형(上田アニ)이다. 구마모토에서 로컬탤런트, 라디오 진행, 사업가[54]로 활동하고 있다. 크림난토카의 민감선수권에 우에다의 닮은꼴로 출연하면서 알려졌다. 2012년에 우에다가 성대폴립 수술로 방송 출연을 못 했을 때 우에다 대신 페케퐁 사회를 본 적도 있었다.[55] 그 밖에도 샤베쿠리007, 시루시루미시루 등 크림시츄의 레귤러 방송에 종종 출연. 아리타와도 고등학교 때부터 친하다. 아리타는 특히 케이스케의 딸들과 한 때 친하게 지냈었는데, 쉬는 날에 야마자키와 구마모토에 일부러 만나러 가기도 했었다. 일반인인 주제에 연예인병에 걸려서 질 나쁜 일반인(タチの悪い素人)로 알려져 있다.

8. 출연

8.1. 현재 출연작

  • 비정기 특별 방송
    • 후지 테레비 산마&크림의 예능계 개인정보그랑프리(さんま&くりぃむの芸能界㊙個人情報グランプリ)
    • 테레비 아사히 제니가타킨타로 빈보상 축제(銭形金太郎 ビンボーさん祭り)
    • 닛폰 테레비 크림시츄의 휴먼룰렛(くりぃむしちゅーのヒューマンルーレット)
    • 테레비 아사히 크림VS하야시오사무!퀴즈 서바이버(くりぃむVS林修!クイズサバイバー)

8.2. 서적

  • 카이쟈리스이교의 작문 (海砂利水魚の作文)
    • 카이쟈리스이교의 첫 에세이집. 잡지에서 연재한 글들을수록 (1998년 7월)
      파일:sakubun.jpg
  • 카이쟈리스이교의 교과서 (海砂利水魚の教科書)
    • 카이쟈리스이교의 다양한 네타들을수록 (1999년 6월)
      파일:kyokasho.jpg
  • 크림시츄어 입문 (くりぃむしちゅー語入門)
    크림시츄의 실화 에피소드를 수록. 방송에서 주로 이야기하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데뷔초 에피소드가 거의 대부분 이 책에 들어있다 (2004년 9월)
    파일:book.jpg
  • 크림시츄의 당신은 어느쪽? (くりぃむしちゅーのあなたはどっち?)
    인기 웹사이트 ‘MY DIRECTORY’의 7만인 설문조사 결과에 대해 크림시츄가 오와라이 및 운치쿠 토크를 전개 (2004년 9월)
    파일:docchi.jpg
  • 크림시츄의 인간관계의 말썽을 둥글~게 얼버무리는 오와라이 호신술 (くりぃむしちゅーの人間関係のゴタゴタを
    まる〜くごまかすお笑い護身術)

    불쾌한 상사, 칠칠 맞은 선임, 짜증나는 고객들이 유발하는 재난에서 적극적으로 벗어나는 95가지 못된 꾀를수록 (2005년 7월)
    파일:ningenkankei.jpg

8.3. DVD

방송제작사에서 발매한 DVD로는 '크림난토카', '리차드홀', '소프트크림', 'GORIGORI크림', '타리라리란', '페케퐁' 등이 있으며, 프라임원 소속 당시 소속사에서 낸 DVD는 1998년 8월에 개최된 카이쟈리스이교 단독 라이브 Ver.ex「海砂利水魚~Best Album~」의 공연 내용을 수록한 '안토니오'와 '자이언트'뿐이다.
  • 카이쟈리스이교 단독 LIVE ‘안토니오’ (海砂利水魚 単独LIVE 「アントニオ」) (2007년 4월)
  • 카이쟈리스이교 단독 LIVE ‘자이언트’ (海砂利水魚 単独LIVE 「ジャイアント」) (2007년 4월)
    파일:livedvd.jpg

8.4. 게임

  • 크림시츄의 와라이 수련생 L사이즈 (くりぃむしちゅーも観ながらいろいろゴチャゴチャ言ってますけど・・・笑いのタマゴLサイズ)
    와카테 게닌 13팀의 만자이, 콩트 영상을 90분 수록. 각 네타에 대한 크림시츄의 해설도 들어있다
    파일:tamagolsize.jpg
  • 파칭코슬롯 크림시츄 (パチスロ くりぃむしちゅー)
    크림시츄를 캐릭터로 한 파칭코 슬롯 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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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음반

  • 코코로바나 (ココロ花)(2005년 8월 24일 발매)
    ABC방송의 ‘와라이의 금메달(笑いの金メダル)’에서 결성된 와라킨 올스타즈[57]가 발매한 싱글 [58]
    파일:warakin.jpg


[1] 1991년 10월 6일부터 1992년 9월 27일까지 닛테레에서 방송된 네타 방송. [2] 1992년 10월 14일부터 2008년 9월 29일까지 후지테레비에서 방송된 버라이어티. 카이쟈리스이교, 폭소문제, 넵츈, X-GUN, Take2, 안잣슈, 언터쳐블 등 동 방송 출신 게닌들을 ‘보캬부라 게닌’ 또는 ‘캬부라’라 부른다. [3] 1996년 7월 19일부터 2003년 9월 26일까지 TBS에서 방송된 버라이어티. [4] 크림난토카 2004년 12월 21일 방송분에서 12월 14일에 결혼한 사실을 발표했다. [5] 2007년에 폐지. [6] 샤베쿠리007 2017년 12월 5일 방송분에서 11월 29일에 입적한 사실을 발표했다. [7] 2016년 6월부터 시작하여 월1회 개최 중 [8] 우에푱에서 변형된 별명. 샤베쿠리007(2009년 3월 30일 방송)에 동방신기가 출연했을 때 준수의 이름을 따라 타이조가 푱스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9] 보캬부라 시절부터 친한 넵츈의 호리켄이 이렇게 부른다. [10] 공식 프로필에도 ‘?형’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본인은 굳이 알려고 하지 않는 듯. [11] 아리타와 우에다의 고교 동창인 아카기로부터 직접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적은 구체적인 에피소드를 여기서 볼 수 있다. [12] 중학교 시절에는 교실에서 존재감 없던 애가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내외적으로 이미지 변신을 꾀하거나 불량아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13] 자세한 내용은 크림시츄의 올나이트닛뽄 2008년 12월 16일 방송분 참조. [14] 1980년부터 86년까지 닛테레에서 방송된 네타 배틀방송. 톤네루즈, 웃짱난짱 등을 배출해냈다. [15] 우에다는 플랭커 포지션으로 레귤러 선수였고, 아리타는 윙으로 보결이었다. [16] 쿠로세 나오쿠니(黒瀬直邦) 선생님. 럭비부의 고문이었다. 성격이 이상해서 두 사람이 ‘세구로’, ‘지키세’, ‘춋쿠니’, ‘시로세’ 등 다양한 별명으로 부르면서 씹었었다. ‘뭔가!’,‘술인가?’ 등 다수의 명언 보유. [17] 마사키요 감독. ‘다시 한번 집합!’‘나는 너희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해’ 등 다수의 명언 보유. [18] 크림시츄의 올나이트닛뽄에서 ‘세이세이코우고등학교 럭비부 축제(済々黌高等学校ラグビー部祭り)’ 특집방송을 했었다. 자세한 내용은 2006년 6월 6일 방송분 참조. [19] 그 당시 천황의 병환으로 인해 전국적으로 행사를 중지하거나 규모를 축소하는 자숙 모드에 돌입했는데, 문화제도 덩달아 중지되면서 결국 콤비 결성 전에 두 사람이 처음 만든 네타를 볼 수 없게 되었다. [20] 예전에는 1,2부로 나뉘어 1부가 오전수업, 2부가 야간수업이었다. 메이지대학 법학부 2부는 2004년 4월에 폐지되었다. [21] 여러 매체에서 우에다네 집이라고 했는데 라디오에서는 두 사람의 고등학교 동창인 ‘브리프’의 집에서 만났다고 한다. [22] 잡지 QuickJapan 55호의 크림시츄 특집기사에 자세한 인터뷰가 실려있다. [23] 손님의 구매욕을 부추기기 위해 손님인 척 하면서 제품을 칭찬하거나 고가의 제품을 구매하는 척 하는 행위. [24] 그 핫도그 가게는 금방 망했다고 한다. [25] 세븐일레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한다. [26] 현재는 폐점 상태. [27] 1993년 10월3일부터 1994년 3월 27일까지 테레비 아사히에서 방송된 네타 방송. [28] 장난으로 조롱하거나 놀리는 행위. [29] 꽁트나 만자이에서 마지막에 웃음을 만들어내는 부분. [30] 킨짱(欽ちゃん)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오와라이계의 거물 게닌. [31] 2000년 7월부터 2001년 11월까지 3회 공연했다. [32] 다른 사람에게 머리를 굽실굽실 굽히는 사람을 조소하는 표현. [33] 대표적으로 ‘천하 잡기/무리인걸 깨달은지/7, 8년(天下取り/無理だと気づき/7、8年)’ ‘올해는/일을 한 듯/안 한 듯(今年って/仕事したような/しないような)이 있다. [34] 아리타가 사마~즈라는 콤비명을 생각해냈다. 이유는 두 사람이 좋아하는 계절이 여름이라서. [35] 아리타와 우에다가 고등학교 때 럭비부 소속이었던 점을 고려해 사마즈가 제안한 이름이다. [36] 아리타가 제안한 이름이다. [37] 이 질문을 우에다에게 했다면 콤비명이 ‘오코노미야키’가 될 뻔 했다. [38]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크림시츄는 아니다. 편식이 심해서 크림시츄에 들어있는 채소를 다 걸러내기 때문에 우에다가 ‘니가 좋아하는 건 크림시츄가 아니라 크림스프’라고 한 적이 있다. [39] 가타카나 クリームシチュー가 아닌 히라가나 くりぃむしちゅー로 표기를 한 건 글자 모양이 더 재미있어 보여서. [40] 극장이나 공연, 공개방송 등에서 관객에게 관람 매너 등 주의사항을 설명하거나 박수치거나 웃는 타이밍을 설명하는 행위. 본 공연이나 방송 녹화 전에 신인 게닌들이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만자이나 꽁트 등 자신들의 네타를 공연하는 것도 마에세츠에 해당한다. [41] 녹화 끝나고 소품을 정리하는 게 벌칙이었다. 아리타가 10년 전보다 체중이 16~7키로 증가하고 녹화 전에 술을 마셔 술냄새를 풍긴 게 주요 패인. [42] 호소키는 지쵸카쵸(次長課長)에게도 ‘핑크&그린(グリーン&ピンク)’으로 개명하라고 한 적이 있다. [43] 호소키 때문에 여러 연예인들이 개명을 했었는데, 그 중 크림시츄와 친한 바츠군(X-GUN)도 쵸한코로코로(丁半コロコロ)로 개명을 했었다. 개명 후에 일이 잘 되기는커녕 오히려 전보다 더 못 알아보는 등 역효과만 나자 다시 바츠군으로 돌아갔다. [44] 일부 주간지에서는 우에다가 ‘(개명하게 만들면) 방송 그만두겠다’며 격노했다는 식으로 보도를 했는데 확인된 사실이 아니다. [45] 연예계에서 탤런트나 게닌이 급격하게 주목 받기 시작해 인기 스타가 되는 것을 뜻한다. 영어의 breakthrough에서 유래한 말. [46] 2009년부터 2013년까지 12번 부활했다. [47] 방송에서는 주로 고등학교 시절 에피소드나 데뷔초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대부분의 에피소드들을 라디오에서 이야기했다. [48] 혼자서 활동한다는 의미. 주사위의 1을 ‘핀‘이라고 부르는 도박용어에서 유래. [49] 조단즈(ジョーダンズ)의 둘 중 한 명에게 넘어갔다고 한다. [50] 콧소리 핀 활동(こっそりピン活動)의 줄임말. 라디오에서 아리타가 우에다의 코소핀을 고발하거나, 서로 핀밍아웃 할 때 사용했다. [51] 방송 처음부터 끝까지 전화통화를 하면서 벌칙을 수행했기 때문에 사실상 출연한 것과 다름 없다. [52] 올나이트닛뽄 2007년 5월 8일 방송분. [53] 2007년 7월 10일자 방송분. [54] 주식회사 이미지 크리에이티브 센터-POEM의 대표 [55] 결과는 폭망. 게스트가 하필이면 이즈미 핑코(泉ピン子)여서 엄청 깨졌다. [56] 유일하게 MC가 아닌 방송이다. [57] 크림시츄, 로버트, 페널티, 레귤러, 컨닝타케야마, 히로시가 참여. [58] 오리콘 인디즈 싱글 1위, 오리콘 싱글 종합 24위 기록 보유. 이 곡으로 Heyx3, 뮤직스테이션에도 출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