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인천광역시 부평구에 위치한 옛 주한미군기지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의 병참기지화 정책에 따라 무기를 공급하는 조병창이었으며, 광복 이후 미군이 조병창을 접수해 전국의 미군부대에 물자를 보급하는 군수기지로 사용하였다. 지난 2023년 12월 모두 반환되었다.2. 구성
전체 넓이는 604,938 제곱미터 이며, 용도에 따라 4개의 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A구역: 군수 보급품 재활용 및 저장 시설로, 109,961 제곱미터 규모이다.
B구역: 숙소, 식당, 체력시설 등으로, 100,804 제곱미터 규모이다.
C구역: 오수 정화조 부지로 도시재생사업 추진 중이며 부지 활용계획에서도 제외된다. 5,921 제곱미터 규모이다.
D구역: 제빵공장과 유통시설, 저장시설 등으로, 229,235 제곱미터 규모이다.
[1]
3. 역사
3.1. 인천육군조병창 시기(1939~1945)
인천육군조병창은 조선에서 유일하게 무기를 만드는 공장으로, 조선의 병참기지화 정책을 실현하는 곳이었다.[2]일제는 1938년 총동원체제를 선포하고 중일전쟁에의 무기 조달을 위해 1939년 부평에[3] 조병창 건설을 시작하였다. 이후 1941년 5월 개창식을 가졌으며, 매달 방대한 분량의 무기를 생산하여 전장에 공급하는 역할을 하였다. 1945년 조선군 잔무정리부가 작성한 인천육군조병창의 주요 생산물에 따르면, 월마다 소총 4천정, 총검 2만 진, 소총 실탄 70만 발, 대포용 환 3만 발, 군도 2천 진, 차량 200량 등이 생산되었다고 한다.
조병창이 생기면서 지역사회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조병창이 가동되기 시작하면서 필요한 노동력이 증가했고, 조병창에서 일할 조선인의 모집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기술을 배우고자 하는 조선인들, 징병을 피하고자 하는 조선인들이 다수 이주해 와서 부평 이주민 1세대를 형성했다. 뿐만 아니라, 미쓰비시 중공업을 비롯한 군수기업들이 진출하면서 외지인의 유입에 기여하였다.[4]
인천육군조병창은 1945년 태평양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본의 전쟁물자 보급기지로 활용되었다. 패전 이후 일제는 인천육군조병창 관련 서류와 장부를 불태워 없애고자 했다.
3.2. ASCOM City 시기(1945~1973)
1945년 광복 이후, 미 24군단이 조병창 일대를 접수하였고 이때부터 국내 주한미군기지들에 군수물자를 공급하는 역할을 하였다. 지금의 캠프 마켓 부지를 포함한 약 7개 구역를 ASCOM City(Army Service Command City)로 명명하였다.일제강점기 조병창과 마찬가지로 애스컴 시티 역시 부평 지역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애스컴 사령부 산하 부대에서 1962년 일하던 한국인 종업원은 약 8천 명이며, 같은 시기 부평 소재 공장의 직공이 1,495명이었다. 따라서 애스컴 시티는 부평지역 내 고용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것이다. 또한 부대 주변에는 미군을 겨냥한 상업구역이 형성되어 일자리 창출과 지역경제 활성화에 큰 도움을 주었다. [5]
“미군부대가 아니었으면 부평이 그렇게 크지 못했을 거예요. 그 전에 농사짓다가 미군부대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졌고요. 외지 사람들 많이 들어오지. 신트리 사람, 고니새말 사람, 부개동 사람들이 주로 미군부대 많이 다녔어요. 수입이 좋았죠."
[6]3.3. 캠프 마켓 시기(1973~2021)
1969년 닉슨 대통령이 재임하기 시작하면서 데탕트 정책을 펼치며 미소 갈등 관계가 완화되기 시작하였으며, 이에 따라 애스컴 시티는 1973년 6월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미8군 의료지원을 담당하던 121후송병원 등 애스컴시티 내 대부분의 미군기지가 용산, 평택, 김천의 미군기지로 이전했다. 그렇게 부평에는 캠프 마켓만이 남게 된다. 이후 약 50년간 헌병대와 통신대, 제빵공장만 운영되다가 2021년 가동을 중단하고 이마저도 평택 미군기지로 이전한다.4. 반환 관련 역사
4.1. LPP 협정 이전 시민 운동
1996년 5.18 16주기 기념식에서 민주주의 민족통일 인천연합에 의해 ‘우리땅 부평미군기지를 되찾자’는 운동이 시작되었다. 같은 해 '우리 땅 부평미군기지 되찾기 및 시민공원 조성을 위한 인천시민회의'가 발족되었다. 이후 1996년 8월 11일 캠프 마켓을 둘러싸는 ‘인간띠잇기’ 행사를 추진했으나 경찰의 불허로 충돌이 있기도 했다. 결국 2000년대 초반 1천 500여 명이 참여한 '인간띠잇기' 행사에 성공하는 등 적극적인 시민운동을 진행하였다.4.2. LPP 협정
2002년 한미연합토지관리계획(Land Partnership Plan) 협정에 의해 캠프 마켓의 반환이 결정되었다. 기존의 주한미군기지는 수도권에 밀집되어 있어 그 공여지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민원이 많았다. 따라서 이 협정은 주한미군의 기지체계를 조정하여 국토를 효율적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체결되었다. 주한미군의 수는 줄이지 않되, 시설을 통합하여 주한미군기지 중 일부를 시민에게 반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때 반환된 토지의 양은 7,400여만 평의 주한미군 공여지 중 4,100여만 평이다.4.3. 이후 과정
2009년 정부에서 「주한미군공여구역주변지역등 발전종합계획」을 발표함에 따라 인천시는 「도시관리계획결정 및 지형도면 작성」 을 고시하였다. 이후 한미 정부간, 중앙정부와 인천시 간 협의가 진행되었다. 이와 동시에 A~D 구역의 반환 시기에 대한 결정, 문화재 조사, 환경정화 작업 등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2019년 8월 C구역, 2019년 12월에 A구역과 B구역, 2023년 12월 D구역까지 모두 반환이 완료되었다.이러한 반환의 전 과정에는 시민들의 참여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2012년에는 '부평미군기지(캠프마켓) 시민참여위원회'가 발족하였다. 이들은 캠프마켓 조기반환, 오염토양정화, 활용방안 모색 등을 위해 활발한 의견을 내고 있다. 인천광역시 캠프마켓 홈페이지
5. 논쟁
5.1. B구역 내 조병창 건물의 존치 여부[7]
5.1.1. B구역 1780번 건물의 용도
캠프 마켓 B구역의 1780번 건물은 일제강점기 조병창 병원으로 사용되었다. 당시 서무과 직원으로 근무했던 지영례의 증언에 따르면, 이 건물은 일제에 의해 강제동원된 조선인이 군수물자를 만들다가 다치면 치료받는 공간이었다고 한다. [8]조병창에 강제 동원되었던 조선인들은 충분히 안전교육을 받지 못해 다치는 경우가 잦았다. 국민학교를 겨우 졸업한 어린아이들이 기계를 미숙하게 사용하다가 팔이 잘리는 경우도 있었다.해방 이후 주한미군기지로 사용될 때는 다목적저장시설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유적으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2020년 문화재청에서는 이 건물에 대해서 정밀조사 및 고증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건물 아래에 위치한 토양에서 토양환경보전법을 위반하는 TPH(석유계 총탄화수소. 피부 접촉이나 공기 흡입 등으로 장기간 노출될 경우 장애를 유발할 수 있음) 농도가 확인되었다. 특히 이 건물의 철거 없이 하부 토양의 정화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시민들의 건강을 위해 철거해야 한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이렇듯 1780번 건물의 존치 여부를 두고 역사유산 보존과 토양오염 정화라는 두 가치가 팽팽하게 대립해 왔다.
그러던 중 2024년 10월, 부평구는 조병창 병원 건물에 해당하는 1776번과 1780번, 체육관인 1538번 건물을 해체하기로[9]하였다. 이중 1780번 건물에 대해서는 벽면을 절단해 존치하는 등 일부는 보존하기로 결정하였다.
5.2. 환경오염
5.2.1. 환경오염의 원인
캠프 마켓 중 A구역은 DRMO(미군 군수품 재활용처리장)으로, 타 미군 기지들에서 사용된 군수 물자를 처리하는 공간이다. 따라서 처리 과정에서 주변 환경이 미군에 의해 오염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또한 2011년 5월 퇴역한 주한미군의 증언과 <미8군과 주일미군의 위험폐기물 최소화 방안> 보고서를 통해 캠프 마켓에서 수은폐기물, 석면, 폴리염화비폐닐(PCB) 등이 처리되었음이 밝혀졌다.5.2.2. 환경오염 조사와 정화 과정
환경부에서는 「주한미군 공여구역주변지역 등 지원 특별법」에 따라 캠프 마켓 주변 지역에 대해서 2011년과 2015년에 각각 1단계 환경기초조사를 2단계에 걸쳐 실시하였다.[10]그 결과 토양오염의 경우 TPH(석유계총탄화수소), 납, 아연 항목이 토양오염우려기준을 초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이옥신의 경우, 일부 지점에서 전국 평균을 2.6배 웃도는 수치가 검출되었다. 이때 3m~5m 깊이에 해당하는 하부토에서까지 다이옥신이 허용 기준을 웃도는 수치임이 확인되었다. 지하수 관측정 중 일부에서 TPH와 납 항목이 오염지하수 정화기준의 3.1배와 2.9배로 검출되었다.
각종 환경 단체들은 특히 하부토에서 다이옥신의 농도가 높게 검출된 것을 근거로 하여 불법 매립이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추정하였다.[11]
2017년, 환경부는 캠프 마켓 내부 조사결과 일부를 발표했고 다이옥신 오염이 존재함을 밝혔다. 이후 2019년 5월부터 한국환경공단과 현대건설 컨소시엄이 맡아 A구역에 대한 다이옥신 오염토양 정화사업이 시작되었다. 정화 방식은 다이옥신이 열을 받으면 탈착되는 성질을 이용해서 밀폐된 공간에서 토양 내부에 가열된 금속 봉을 넣어서 정화하는 열탈착 방식(In Pile Thermel Desorption)을 사용하였다.
시민단체와 부평구, 인천시가 협력하여 2018년 오염 토양 정화 방안을 논의하는 '캠프마켓 다이옥신류 등 복합오염토양 정화를 위한 민관협의회'를 구성하였다. 이 민관협의회는 정화설비 설치와 정화를 모니터링하고, 결과를 검증하는 등의 역할을 하였다.
결국 2021년 11월 A구역의 다이옥신 농도가 목표치였던 100 피코그램을 훨씬 밑도는 2.18 피코그램으로 낮아진 것을 확인하며 정화가 완료되었다. [12]다이옥신 토양의 정화는 민관이 협력하여 환경 문제를 잘 해결한 우수 사례이기도 하다.
이렇게 A구역과 C구역의 경우에 기지 내부의 토양오염 정화는 완료되었고, 주변 지역 정화가 이루어지는 중이다. B구역의 경우 2023년 12월 토양오염 정화가 마무리되었으나 추가 오염 토양이 발견되면서 정화 작업이 재개되었다. 한국환경공단은 정화 작업을 2026년 1월까지 마무리할 예정이다.D구역의 경우 2023년 12월에 반환이 완료되어 2024년 12월까지 토양오염 정밀 조사가 국방부를 주체로 진행될 예정이다. 인천시는 전반적인 토양 정화가 모두 마무리되는 시점은 2029년일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정화는 국방부가 주체가 되어 진행한 것이고 정작 미군에게는 반환되는 기지의 환경오염에 대한 책임을 묻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아래 목차와도 관련이 있다. 현재는 ‘선반환 후협의’ 방침에 따라 정부가 정화비용과 관련해서 미국과 계속해서 협의 중이다.
5.2.3. SOFA의 환경보호에 관한 특별양해각서 및 KISE 기준
1953년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는 법적인 근거가 되는 한미 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었고, 미군 주둔에 관한 세부 절차와 미군의 법적인 지위를 SOFA(States of Forces Agreement)를 통해 1966년 체결하였다. 그러나 SOFA에는 환경 관련 조항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2000년 용산미군기지에서 포르말린을 무단 방류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주한미군기지에서 일어나는 환경 문제에 대한 추가 조항이 필요하다는 사회적 요구가 커지게 되었다.이에 2001년 한미 양국은 SOFA의 환경보호에 관한 특별양해각서를 추가적으로 체결하였다. 이 각서는 두 국가가 미군기지 주변의 환경문제에 대한 정보를 주기적으로 교환하고, 환경관리 표준을 검토할 것을 약속하는 등 환경보호에 관한 합의된 내용을 주로 담고 있다.
특히 KISE 기준[13]은 Known, Imminent, Substantial, Endangerment to Human Health 이 4가지 사항이 충족되면 환경 정화를 하겠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이 조항은 정량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 않아서 명확한 책임을 묻기 쉽지 않다는 문제점이 있다. 이 조항이 도입되고 나서 약 54곳의 주한미군기지가 반환되었으나, 그 중 25곳은 환경법령에 의해 정화조치가 필요한 곳이었다.
하지만 이 기준의 모호성 때문에 지금까지 미국이 반환 기지의 오염 정화 비용을 부담한 적은 없었다. 캠프 마켓의 경우에도 먼저 정부가 비용을 부담한 이후에 미군과 협의하겠다는 입장이다. 이처럼 SOFA의 환경 관련 조항은 한국의 환경법을 반영하지 않기에, 주체성과 강제성을 누리지 못한다는 문제점이 있다.
6. 가치
6.1. 역사적 공간
인천육군조병창은 일제가 운영했던 8개 조병창 중 조선에 설치되었던 유일한 조병창이자, 현재까지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유일한 조병창이기도 하다. 이는 해방 이후 미군이 이 조병창을 그대로 넘겨받아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주한미군기지에 군수물자를 공급하는 애스컴 시티로서 활용되었기에 냉전 시기의 역사를 담고있기도 하다. 따라서 이 공간은 일제강점기와 냉전 시기, 탈냉전시기 근현대사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높다.또한, 캠프 마켓을 포함하는 애스컴 시티는 해방 직후부터 1960년대까지 부평의 경제적 발전의 중심이 되었다. 따라서 캠프 마켓에 대한 연구는 부평의 도시사, 생활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6.2. 민관 협력의 결실
캠프 마켓은 반환 과정에서 시민 단체의 큰 기여와 관공서와의 협력이 있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1990년부터 반환을 원하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고 시민단체들, 환경단체들이 힘을 합쳐서 인간띠잇기, 단식 농성 등을 진행하였다. 이러한 시민 운동은 2002년 LPP에 캠프마켓을 포함시키는 결과를 얻어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후 발견된 환경오염 문제에 있어서도 시민 단체와 관공서가 협력하여 민관협의회를 구성하고 우리나라 최초로 대규모 다이옥신 오염토의 정화에 성공하기도 하였다.
지금까지도 부평미군기지(캠프마켓) 시민참여위원회와 같은 협의체를 통해서 추후 이용 방안에 대해 활발한 의견을 시민들로부터 듣고, 이를 반영하고 있다. 이는 향후 유사한 경우에 대한 모범 사례가 될 수 있다.
[1]
김정욱, 안지선. 「캠프마켓 시민공론화 운영 방안」,인천연구원,(2022)
[2]
이연경, 「1940년대 인천 일본육군조병창의 설치와 군수산업도시 부평의 탄생」, 도시사학회, 2022년
[3]
부평은 공업이 발달한 인천과 서울의 중간에 있었으며 100만평 가량의 넓은 평야 지대이기 때문에 공장을 짓기에도 유리하다는 이유로 선정되었다.
[4]
오미일, 조관연, 「부평 로컬리티와 이주민 -1945년~1960년대를 중심으로-」, 인문과학, 46(2007), pp. 111-116
[5]
오미일, 조관연, 「부평 로컬리티와 이주민 -1945년~1960년대를 중심으로-」, 인문과학, 46(2007), pp. 111-116
[6]
범선규, 「부평사」, 부평사편찬위원회, 제2권(2007), pp.470-471
[7]
김정욱, 안지선. 「캠프마켓 시민공론화 운영 방안」,인천연구원,(2022)
[8]
이상의, "구술로 보는 일제하의 강제동원과 '인천조병창'". 동방학지, 2019. no.188, pp. 107~160
[9]
이재희, "일제 침략역사 품은 부평 캠프마켓 조병창 병원 철거 수순", 인천투데이, 2024년 10월 15일, https://www.incheontoday.com/news/articleView.html?idxno=254932
[10]
한국환경공단. “캠프 마켓 주변지역 2단계 환경기초조사 결과보고서.” 2015년 2월.
[11]
김원진, “부평 캠프마켓, 고엽제 ‘불법매립’ 됐나.”, 인천일보, 2017.10.31, https://www.incheo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785232
[12]
이정하. "열탈착 기술로... '다이옥신 범벅' 부평미군기지, 오염토 정화 끝내", 한겨레, 2021년 11월 29일, https://www.hani.co.kr/arti/area/capital/1021210.html
[13]
최영진. "주한/주일 미군 주둔기지 환경오염과 환경정화 쟁점:초국가적 다층 거버넌스 모색" 평화학연구 20, no.4 (2019), pp.8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