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8-11 23:41:54

카밀로 예루살렘

파일:Camillo Jerusalem.jpg
이름 카밀로 예루살렘
(Camillo Jerusalem)
생년월일 1914년 4월 3일
사망년월일 1989년 8월 1일 (향년 75세)
국적 파일:오스트리아 국기.svg 오스트리아
출신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포지션 포워드
신체조건 172cm
소속팀 FK 아우스트리아 빈 (1931-1938)
FC 소쇼몽벨리아르 (1938-1939)
FK 아우스트리아 빈 (1939-1945)
FC 소쇼몽벨리아르 (1945-1946)
CO 루베투르쿠앙 (1946-1947)
SR 콜마르 (1947-1949)
라싱 베장송 (1949)
세르베트 FC (1949-1951)
FC 그렌첸 (1951-1953)
국가대표 12경기 6골 (1936-1945)
감독 FC 그렌첸 (1951-1953)



1. 개요2. 생애
2.1. 선수 생활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4. 수상
4.1. 선수
4.1.1.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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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의 전 축구 감독

2. 생애[1]

2.1. 선수 생활

2.1.1. 클럽

군소클럽의 유스에서 뛰던 예루살렘은 1930년, FK 아우스트리아 빈의 영입 제안을 받고 팀에 합류했다. 1931년부터 성인팀에 합류한 예루살렘은 아우스트리아에서 마티아스 신델라, 요제프 슈트로와 공격 편대를 이뤘고 1935년, ÖFB컵 우승 트로피를 손에 넣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병합으로 오스트리아의 축구계가 재편되자 예루살렘은 프랑스 FC 소쇼몽벨리아르로 팀을 옮겼다. 1년 후에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졌고 전쟁 기간에 예루살렘은 서류상으론 아우스트리아 소속이었지만 주로 프랑스에 머물렀다.

전쟁이 끝나고 예루살렘은 으로 돌아왔고 잠시 빈에서 머무르다가 다시 소쇼로 돌아갔다. 1946년부터 예루살렘은 RO 루베투르쿠앙(RO Roubaix-Tourcoing)에서 리그 1 챔피언이 되었고 SR 콜마르(SR Colmar)의 1년을 거쳐 1949년에 RC 베장송(RC Besançon)을 끝으로 프랑스 생활을 마무리했다.

1949년, 예루살렘은 카를 라판의 도움으로 세르베트 FC에서 스위스 생활을 시작했고 1950년에 나치오날리가 A 타이틀을 차지했다.

1951년에 예루살렘은 FC 그렌첸 선수 겸 감독으로 첫 시즌에 다시 나치오날리가로 팀을 끌어올렸고 2년간 팀을 지휘했다.

2.1.2. 국가대표

1936년, 예루살렘은 이탈리아를 상대로 데뷔전을 치렀다.

예루살렘은 라트비아와의 지역 예선 최종전에서도 동점골을 넣어 2대1 역전승을 이끈 것을 포함, 9경기 6골을 넣어 오스트리아 대표팀에서 주축 공격수로 1938년 월드컵에서 좋은 활약을 할 것이 기대되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병합으로 조국이 사라졌고 예루살렘은 독일의 최종 명단에 들지 못해 그의 월드컵 출전은 무산되었다.

오스트리아 대표팀에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마자 복귀한 예루살렘은 3경기를 더 뛰었지만 그가 프랑스로 이주하면서 대표팀과는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예루살렘은 훌륭한 기술과 좋은 신체 조건을 통해 지능적으로 공격과 수비의 연결 고리를 만들었다. 그는 박스 안을 적절한 시간에 침투해서 득점하는 데에 능했고 특히 헤더로 중요한 골을 넣기도 했다. 강력한 슛을 구사할 수 있었고 프리킥에서도 득점할 수 있었다.

4. 수상

4.1. 선수

4.1.1. 클럽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