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카를 치셰크 (Karl Zischek) |
생년월일 | 1910년 8월 28일 |
사망년월일 | 1985년 10월 8일 (향년 75세) |
국적 | 오스트리아 |
출신지 | 빈 |
포지션 | 아웃사이드 라이트 포워드 |
신체조건 | 171cm / 68kg |
등번호 | -[1] |
소속팀[2] | SC 바커 빈 (1929~1948) |
국가대표 | 40경기 24골 ( 오스트리아 / 1931~19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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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3]
1.1. 선수 생활
1.1.1. 클럽
치셰크는 1929년 바커 빈의 1군에 데뷔했다. 국가대표팀에서는 나름 입지를 다지고 명성을 얻었지만 클럽팀에서는 그 명성을 이어가지 못했다. 요한 발츠호퍼와 발에 땀이 나도록 뛰었고 개인 스탯 역시 통산 150골을 넣을 정도로 좋았지만 리그 우승을 못하는 것이 문제였다.안슐루스 이후 바커 빈은 가울리가 오스트마르크에서 3년 연속 준우승을 차지한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발츠호퍼는 이미 은퇴했고 치셰크마저 은퇴를 앞둔 1947년, 바커 빈은 ÖFB-컵 결승에서 SK 라피트 빈을 4대3으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고, 리그에서도 우승하며 더블을 기록했다. 이렇게 치셰크는 명예롭게 은퇴할 수 있었다.
1.1.2. 국가대표팀
1931년, 오스트리아는 축구 종가 스코틀랜드를 5대0으로 깨박살을 냈는데 치셰크는 이 경기에서 2골을 넣으며 인상적인 데뷔전을 치렀다. 이 승리로 오스트리아는 1930년대 초반의 전성기를 열어젖혔으며 수많은 유럽팀들보다 한 수 위의 기량을 뽐냈다. 1932년에는 당시 자타공인 최강이었던 잉글랜드와 스탬퍼드 브리지와 시합에서 대등한 시합 끝에 3대4로 아깝게 패했다. 이 시합은 당시를 기준으로 매우 높은 수준의 경기였으며 잉글랜드 기자들 역시 오스트리아 선수들의 기량을 인정했다.분더팀의 위세는 1934년 2월, 월드컵 개최국 이탈리아를 원정에서 신델라없이도 꺾으면서 물이 올랐는데 치셰크는 이 경기에서 해트 트릭을 기록하며 이탈리아를 큰 패닉에 빠뜨린 1등 공신이 되었다.
우승의 기대를 갖고 출전한 월드컵. 치셰크는 1라운드와 8강전에 모두 출전했고 8강에서 쐐기골을 넣으며 오스트리아의 4강 진출을 이끌었다. 결승 문턱에서 만난 상대는 개최국 이탈리아. 이탈리아는 3달 전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독을 품고 있었고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의 투지와 심판의 편파 판정으로 인해 무릎을 꿇었다. 치셰크는 후반전에 콤비와의 1대1찬스 직전에 심판의 파울로 기회가 날아가는 불운을 겪었다. 치셰크는 오스트리아의 4경기에 모두 출전했고, 오스트리아는 최종 4위의 성적을 거두었다.
1937년까지 오스트리아 대표팀에 소집된 치셰크는 안슐루스 이후 독일 대표팀에 소집되지는 않았고, 1945년에 헝가리를 상대로 2경기를 더 뛰고 국가대표팀 경력을 마무리했다.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치셰크는 빠르고 공간 이해 능력이 좋아서 침투에 능한 윙 플레이어였다. 그 침투 능력을 이용해 득점을 많이 올렸고 헤딩 경합 능력과 크로스도 수준급이었다.3. 수상
3.1. 클럽[4]
- 오스트리아 1부 리그 우승 1회: 1946-47
- ÖFB-컵 우승 1회: 1946-47
- 오스트리아 1부 리그 준우승 1회: 1947-48
- 가울리가 오스트마르크 준우승 3회: 1938-39, 1939-40, 1940-41
[1]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
[2]
커리어 마감 시기는
트랜스퍼마크트 기준이다. 위키피디아는 1946년부터 1949년까지 다양하다.
[3]
출처: 위키피디아, 11v11
[4]
치셰크는
SC 바커 빈의
원 클럽 플레이어이므로 팀 이름 기입은 생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