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16 23:40:49

최초의 5인

※ 1936년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이 생기자마자 처음으로 입성한 5명의 선수.
파일:external/baseballhall.org/Cobb%20Ty%20Plaque_NBL_0.png 파일:external/baseballhall.org/Wagner%20Honus%20Plaque_NBL.png 파일:external/baseballhall.org/Ruth%20Babe%20Plaque_NBL.png 파일:external/baseballhall.org/Mathewson%20Christy%20Plaque_N_0.png 파일:external/baseballhall.org/Johnson%20Walter%20Plaque_NBL_0.png
타이 콥
(98.23%)
호너스 와그너
(95.13%)
베이브 루스
(95.13%)
크리스티 매튜슨
(90.71%)
월터 존슨
(83.63%)
※ 퍼센트는 투표 당시 투표율.
파일:external/images.fineartamerica.com/first-five-baseball-hall-of-famers-retro-images-archive.jpg
차례대로 타이 콥, 월터 존슨, 베이브 루스, 크리스티 매튜슨, 호너스 와그너
1. 개요2. 소개3. 읽을거리
The first five

1. 개요

모든 메이저리거들의 꿈인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최초로 헌액이 된 5명을 일컫는 말.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은 1936년에 만들어졌는데, 최초의 헌액자를 결정하기 위해 투표를 한 결과로 선정된 사람들이 저 다섯 명이다. 투표 대상은 모든 은퇴 선수와 10년차 이상인 현역 선수였다. 1936년이라는 연도를 보면 알겠지만, 다들 20세기 초반을 호령했던 대 선수들이다. 호너스 와그너의 경우에는 19세기에 데뷔한 선수. 한편 크리스티 매튜슨 1차대전에 참전했었는데 당시 전장에서 흡입한 독가스 때문에 1925년에 사망해서 헌액 당시 고인이었다. 나머지 네 명은 헌액 당시 생존.

월터 존슨보다 성적이 다소 떨어짐에도 득표율은 더 높았던 매튜슨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명예의 전당 헌액은 '명예(fame)'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개인 성적'뿐만 아니라 '스포츠계 전반에 쌓아올린 야구인으로서의 사회적 행적'도 중요하다.

이 다섯 명 못지않은 위상과 성적을 갖고 있는 사이 영[1]이나 피트 알렉산더[2], 에디 콜린스[3], 트리스 스피커[4], 로저스 혼스비[5] 같은 선수들은 빠져 있다.

2. 소개

  • 타이 콥: 데드볼 시대를 대표하는 최초의 야구 황제. 투표자 226명 중 222명의 표를 얻어 최초의 5인 중 최고 득표율을 기록했다.
  • 호너스 와그너: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유격수. 스카우팅 리포트에서 "장점: 타격, 주루, 수비, 송구; 단점 : 없음(None)"이라고 소개된 것으로 그에 대한 설명은 끝난다.
  • 베이브 루스: 야구의 신, 역사상 최고의 야구선수이자 야구라는 스포츠의 영원한 화신.
  • 월터 존슨: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위대한 투수. 다만 신사적인 성격으로 스타성은 크리스티 매튜슨만 못 했기 때문에 최초의 5인 중에서는 최저 득표율을 기록했다.

3. 읽을거리


[1] 사이 영은 커리어의 반이 19세기의 것이라는 점 때문에 마이너스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1890년에 데뷔해 1911년에 은퇴한 1936년 그 당시에도 상당히 과거의 투수였다. 그러다보니 대중 및 기자들에게도 그리 친근하지 않은 선수할아버지였다. 그러다보니 투표율이 적게 나온 것뿐 다음 해에 바로 입성한다. 물론 사이 영 본인은 이 결과에 굉장히 실망했다고.. ??? : 내가 대체 크리스티 매튜슨, 월터 존슨, 저 한참 후배들보다 못한 게 뭐야!!! [2] 피트 알렉산더는 알콜 중독으로 이미지가 좋지 않았다. [3] 지금도 통산 WAR이 투수타자 다 합쳐서 13위일 정도이다. 이 투표 시점 이후의 후배 선수들(약본즈, 윌리 메이스, 행크 아론, 스탠 뮤지얼, 약켓 등)을 제외하면 등수가 10등 안으로 훨씬 높아지니 블랙삭스 사건의 누명만 아니면 되고도 남을 성적(테드 윌리엄스보다 높을 정도이다)이지만, 그 누명으로 재수도 아니고 삼수도 아닌, 4수를 했다. 돈 밝히는 이미지는 있었어도 객관적으로 블랙삭스는 도저히 그가 참여할 이유가 전혀 없었고, 실제 조사에서도 무혐의가 나왔음에도 이미지가 나빴었다. 사실 이는 블랙삭스 사건과 무관하게 과거부터 있던 나쁜 이미지도 섞여있던 것도 영향이 있다. 그가 가난한 하류층 출신에 전성기에도 약간 호랑이 선배 이미지에 불성실한 후배들을 끌고가서 때렸다는 소문이라기에는 목격담이 많은 진실이 너무 많이 있었고, 코치일때도 욕설이나 폭력을 쓰면서 가르치던 것이 안 좋은 이미지를 조금 더 만들었다. 하지만 성실한 선수는 절대 때리지 않았고 가장 잘 가르치는 코치였기에, 막상 그의 소속 구단들측도 그렇고 맞으면서 배운 선수들조차 팀성적과 개인성적이 진짜로 올라서 부정적인 생각은 의외로 전혀 가지지 않았고, 정말 구단이 싫어했으면 잘렸을 코치생활도 안 잘리고 굉장히 오래했다. [4] 에디 콜린스보다도 더 높은 WAR을 가진 데드볼 시대 최고의 중견수임에도 불구하고 타이 콥에게 밀린 콩라인 이미지라 저평가됐다. [5] 우타자임에도 좌타자들을 제치고 교타와 장타를 둘다 압도했기에, 타이 콥이나 베이브 루스도 못해본 4할 타자 트리플 크라운 2회라는 야구 역사에 다시는 안 나올 대기록의 사나이로, 야구 역사를 통틀어 비교할 자 없는 최고의 우타자로서 독보적으로 꼽히는 최고의 2루수였지만, 이미지가 나빠서 무려 4번이나 떨어지고 입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