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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47a0> 출생 | 1921년 9월 28일 |
평안남도
대동군 재경리면 간리 (현 평양시 형제산구역 신간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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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2000년 7월 19일 (향년 78세) |
경기도 광명시 | |
이명 | 왕세일(王世一)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상훈 | 건국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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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77년 건국포장을 수여받았다.2. 생애
최세득은 1921년 9월 28일 평안남도 대동군 재경리면 간리(현 평양시 형제산구역 신간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중국 유격대에 가담하여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만주에서 중국명 왕세일로 독립군참의부 문서연락병및 지하공작원으로 활동했다.1942년 중앙군 특수임무를 맡아 광복군 개봉지구 지하공작원으로 활약하여 유격군 감찰대장을 수행하였다. 그러다 1943년 허난성 카이펑시에서 한국광복군 특파원 장호강과 접선하여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였다. 이후 카이펑에서 지하활동을 전개하여 초모·선전·첩보 활동을 하였으며, 광복군 제3지대본부 작전참모로 편입 광복군과 중앙미군에 영어통역으로 버치대위 미군작전을 수행했다.
8.15 광복 후 중국 제10전구로 파견되어 일본군 무장해제 작업에 협조하였다. 이후 귀국한 그는 육사 5기로 임관하였으며, 특무대에서 일하였다. 창군기 숙군 과정에서 광복군 출신 군인들에 대한 사찰 지시를 하달 하였는데 당시 중위였던 최세득은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근무하면서 숙군을 담당했다.
1949년 6월, 김구 주석이 암살되고 며칠 정도 지나자 상부로부터 '임정계열 장교들의 사상을 살피라'는 지시를 받았다. 최세득은 즉각 의심을 받았다. 조사과 동료들로부터 '술 한잔 마시더라도 몸 조심해'라는 충고를 받았고, 자신이 조사 대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에 바로 피신을 하겠다는 결단을 내리고 평소 자신과 절친한 사이였던 웜스 예비역 소령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임정 계열 장교들 에 대한 뒷조사가 진행되고 있고 자신도 예외가 아닌거 같다고 하자 1949년 8월, 웜스 소령은 최세득을 맥아더 사령부 정보부에 소개 시켜 주었고, 그곳에서 연락장교로 일하다가 1952년, 전역했다. 이후 광명시에서 평범하게 지내다 2000년 7월 19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최세득에게 건국포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2006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