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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학(1900)

파일:최성학2.jpg
<colbgcolor=#0047a0> 출생 1900년 11월 25일
러시아 연해주 크라스키노 마을
사망 1938년 10월 26일
소련 크즐오르다
러시아식 이름 최파벨 페트로비치
상훈 건국포장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빨치산 활동2.3. 최초의 한인 소련 해군장교2.4. 최후2.5.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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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6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최성학은 1900년 11월 25일 러시아 연해주 최남단 하산스키 군[1] 크라스키노 마을에서 최재형의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는 형 최표트르, 누나 최베라, 최나췌즈, 최류보피가 있고, 아래로는 남동생 최발렌틴, 최베켄티와 여동생 최소피아, 최올가, 최류드밀라, 최엘리자베타가 있었다.

그는 1907년 가족과 함께 노보키예프스크로 이주하여 초등교육을 마쳤고, 1914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상업학교에 입학해 1918년까지 재학했다. 이때 그는 상업학교 내에서 콤뮨(коммуна, 공동체) 활동을 수행해 자신과 함께 학교를 다니는 한인 자제들과 깊은 친분을 쌓았다.

1918년 가을, 최성학은 학생 조직에서 활동했다는 이유로 상업학교에서 제적되었다. 이후 그는 1919년 3월까지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 있는 레알노예 학교를 다녔는데, 이번에는 3.1 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제적되었다.

이 시기, 그는 연해주 한인학생동맹에서 활동했으며, 1918년 여름부터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역 철도교통 학생 및 노동자들과 친분을 다졌다. 또한 신문 <골로스 우차쉬흐샤(Голос учащихся, 학생의 목소리)>를 '야노프 미크’(Янофы Мик)라는 편집명으로 발간했으며, 신문 <크라스노예 즈나먀(Красное Знамя, 붉은기)>의 비밀기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2.2. 빨치산 활동


1919년 5월, 최성학은 대한국민의회의 배정에 따라 하얼빈의 에호한인부대에 배속되었다. 이후 빨치산 활동을 수행하던 그는 그해 8월 러시아 백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하지만 5명의 동료들과 함께 탈출했고, 이후 연해주 폴타프카 지구로 도망쳐서 홍범도 관할의 한인 빨치산 부대에 입대했다. 그는 이 부대에서 3차례에 걸쳐 백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1920년 3월, 최성학은 빨치산 부대와 함께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 입성한 뒤 전연방 레닌공산주의청년동맹 조직 결성에 참여했다. 그후 그는 니콜스크-우수리스크 지구의 군지휘부에 의해 발간된 신문 <나찰로 (начало, 시작)>의 서기로 활동했다.

1920년 4월 4일~5일, 일본군이 블라디보스토크와 니콜스크-우수리스크를 습격해 한국인들을 학살한, 이른바 연해주 4월 참변이 벌어졌다. 이때 최성학의 부친인 최재형이 동료들과 함께 체포된 뒤 총살형에 처해졌다.

최성학이 속해 있던 33보병연대 혼성중대는 일본군에 밀려 폴타프카역으로 후퇴했고, 그곳에서 다른 빨치산 부대들과 함께 제1아무르 독립여단에 속해 있던 보스코보이니코프의 지휘를 받는 하나의 부대로 통합되었다. 최성학은 이 부대의 첩보분과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1920년 5월, 최성학의 부대는 다시 1개의 제1극동독립대대와 기병연대로 재조직되었고, 그는 제1극동독립대대의 부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그의 부대는 폴타프카 지구에서 아누치노 지구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다시 제1아무르독립여단으로 편성되었다. 그해 8월, 최성학은 코쿠쉬킨 휘하의 여단 군사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중국과 연해주의 다양한 지역에서 이동해온 부대들로 구성된 한인 빨치산 부대의 조직에 착수했고, 12월에는 한인 빨치산 부대로 넘어갔다.

1921년 2월, 최성학은 극동공화국 중앙위원회 지시에 따라 부대를 이끌고 연해주 스파스크 지구에서 아무르주 스보보드느이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다른 한인 빨치산 부대들과 함께 특립사할린빨치산부대로 재편성되었다. 그는 재조직된 부대의 참모장 직무대리로 임명되었고, 부대가 해체될 때까지 직무대리로 활동했다.

1921년 6월, 최성학이 속해있던 부대는 자유시 참변에 휘말렸다. 그의 부대는 코민테른 극동비서부에 의해 조직된 고려혁명군정의회 총사령관 칼란다라쉬빌리와 부사령관 오하묵의 무장해제 요구를 거부했고, 이로 인해 총격전이 벌어져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사할린빨치산부대는 무장해제되었고, 최성학을 비롯한 지휘관 80명이 불복종 선동죄로 체포되어 이르쿠츠크 형무소로 이송되어 한동안 옥고를 치렀다. 최성학은 1935년에 작성한 ‘자기소개서’에서 사할린빨치산부대가 소비에트 적군의 지휘와 무장해제에 불응한 이유에 대해 새로운 지휘부의 구성원 중에 과거 백위파 군대 출신의 장교들도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1922년 11월 코민테른의 결정으로 석방 조치된 최성학은 1922년 12월 아무르주에 인접한 치타로 이동한 뒤 그곳에서 극동지방위원회 한인분과의 지시로 네르친스크 지구에서 노동조합장 자격으로 1923년 8월까지 활동했다. 이후 레닌그라드 프룬제 해군군사학교에 입학한 그는 1924년 1월 해군군사학교 생도로 등록되었다.

2.3. 최초의 한인 소련 해군장교


1926년 10월 5일, 최성학은 프룬제 해군군사학교를 졸업했다. ‘1926년도 해군군사학교 최 파벨 직무 예비지식평가서'에서, 그는 상당히 우수한 평가를 받았다. 특히 정치 예비지식은 다른 분야에 비해 특별히 고평가를 받았다. 졸업 후 노농붉은해군의 간부 자격을 부여받은 그는 11월 1일 아무르함대 주력함 '스베르들로프호'의 당직사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1927년 11월부터 1928년 10월 기간 동안 간부지휘능력향상과정 포병분과 교육생 신분으로 간부특별과정을 이수했고, 1928년 11월부터는 카스피함대 포함 '레닌호'의 포병분과장에 임명되었다. 또한 1931년 5월부터 카스피함대 참모부의 포병중대장을 맡았고, 1933년 11월에는 붉은기 발틱함대 주력함 '마라트호'의 포병분과장에 임명되었다.

최성학은 복무기간 동안 우수한 장교 자원으로서 인정을 받았다. 그는 모범적인 군복무생활과 정치능력, 그리고 함포사격 능력배양의 공로로 여러차례 상을 받았다. 1929년에 시행되었던 카스피함대 함포사격대회에서는 그는 금시계를 받았고, 1930년에도 1등상으로 리볼버 권총을 부상으로 받기도 했다. 1929년도에 작성된 사정평가서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이것은 사정평가위원회의 최종결정으로 간주한다. 사정평가 대상자는 행정업무에서도 숙련되어 있으며, 업무상 지휘 능력이 있고 엄한(까다로운) 편이다. 최 파벨은 자존심이 강하고 완고함이 있다. 또한 그는 사격과 관련하여 선임들의 지시와 주의에 대해서는 조용히 받아들인다. 개인적인 성격적 결함들은 바른 지도 하에서 쉽게 수정될 수 있고, 향후 훌륭한 포지휘관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는 첫 해 함포 사격 지휘에서 성공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러한 성공적인 모습들을 통해서 향후에 있을 경험들을 강화시켜 나갈 필요가 있다. 수행 중인 직무에 부합되며, 사정평가서를 승인한다.”

또한 1932년도에 작성된 사정평가서에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되었다.
“최 파벨 동무는 카스피함대 참모부 포병중대장 의무를 2년 동안 수행해 오고 있다. 직무수행기간 동안 최 동무는 우수한 함포 근무 조직자로서의 자질을 보여주었고, 또한 자신의 개인 학습과 다른 지휘관들이나 전문가들과의 끊임없는 교류를 통해서 함대의 함포준비능력을 상승시켜 놓았다. 그는 함포 동료들 사이에서 권위를 인정받고 있으며, 설명과 시범을 통해 교육(훈련)을 수행하고 있다. 또한 그는 함대 내에 함포사격 준비에 따른 체계를 마련해 놓았고, 모든 포훈련과 포사격에 대한 사전 준비체계를 주입시켜 놓았으며, 이러한 상황들을 전투원 개개인에게까지 숙지시켜 놓았다. 그는 참모부 근무자로서 의심의 여지없이 성장하고 있다. (중략). 직책은 부합이 되고 있다. 주력함에서 어느 정도의 경력을 쌓은 이후에는 훌륭한 선임 포병중대장으로 활용될 수 있다.”

다만 단점으로는 다음과 같은 사항이 기술되었다.
“부하들을 다스릴 줄을 알고 있으나 급하고 쉽게 흥분하는 성격이 지휘권 수행에 방해가 되고 있기도 하고, 근무에 따른 올바른 상호관계를 항상 유지시켜 주고 있지는 못하다. 최 동무의 의욕은 많으나 감정적인 결함과 과도한 조급함으로 인해 정기적으로 본인의 근무 및 일상적인 측면들이 일그러뜨려지는 경향이 있다.(중략) 최 동무는 카스피함대 근무에 부담을 느끼고 있으며, 다른 함대로 전출을 희망하고 있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만족스런 학습능력을 갖고 있으나 특별한 적극성을 발휘하지 않고 있다. 최 동무는 퇴폐주의적 기분에 굴하는 성향이 있으며, 이로 인해서 급한 성격과 때로는 무기력증이 나타나고 있다. 성격상 최 동무는 급하고 때로는 자제력을 잃기도 한다.”

하지만 1933년 붉은기 발틱함대 당위원회에 의해 지나친 음주를 질책받았고, 1934년과 1935년에는 '마라트호'에서 질책을 받기도 했다. 그렇지만 대체적으로는 해군장교로서 순탄하게 승진했다고 볼 수 있었다.

한편, 최성학은 1927년 전소련연방공산당의 후보당원이 되었다. 그리고 1932년 5월에는 카스피함대 당위원회에 의해 전소련연방공산당 당원으로 정식 승격되었다. 이는 그가 해군 함대의 장교이자 공산당원으로서 소련 주류사회의 일원이 되었음을 의미했다.

2.4. 최후


1935년 봄, 최성학은 내무인민위원부 소속 기관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후 그는 1935년 12월 20일부터 1936년 12월 3일까지 사회적 출신을 속인 혐의로 크론쉬탓트에서 심문받았다. 이어 같은 해에는 아버지 최재형의 사회적 지위를 숨긴 죄, 즉 출신성분을 속였다는 명분으로 붉은기발틱함대 당위원회에 의해 전소련연방공산당 당원 자격에서 제명되었다.

1936년 12월, 최성학은 소련연방 혁명군사소비에트 지시 674조 'e'항에 의거하여 노농붉은해군에서 공식적으로 해임되었다. 이후 예비 자원으로 분류되었으나 여전히 군부의 목록에는 간부자격이 유지되었다. ‘1937년 4월 11일 최 파벨 관련 사정평가위원회 조서록’은 최성학에 대해 다음과 같은 냉혹한 평가를 내렸다.
“최 파벨을 간부직에서완전히 해직시킬 것을 제안한다. 최 파벨은 이미 소련연방 혁명군사소비에트 지시 674조 ‘e'항에 의거하여 1936년 국방인민위원부 명령으로 해직되었다(12월17일). 최 파벨은 함대에서 간부로서 활용될 수 없으며, 간부직에서 완전히 해직시켜야 한다.”
“최파벨 페트로비치는 1935년에 전소련방공산당 당원에서 제명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한인 대지주였고, 최파벨 자신은 사할린 빨치산 부대 참모장 직을 수행하면서 러시아 국적의 한인들을 상해파 그룹에 끌어들였다. 사할린 빨치산 부대는 무장저항을 한 죄로 무장해제되었고, 그 부대의 지휘관들과 최파벨 자신은 재판을 받았다. 그는 이 모든 사실들을 숨겨왔으며, 따라서 그의 행위는 함대 내에서 정치적인 신뢰를 가져다 줄 수 없다."

사정평가위원회는 이상의 사유를 제시하며 최 파벨을 병역등록부에서 아예 삭제 시킬 것을 최종결정했다. 최종결정문 서명에는 붉은기발틱함대 내 고위직 간부들(군사소비에트 위원/의장, 간부및지휘관 분과장, 부참모장, 정치관리국 인사분과장)과 내무인민위원부 국가보안중앙관리국 특별분과장이 참여했다.

하지만 최성학은 이후에도 복직을 포기하지 않고 모스크바에서 근무하는 동료들의 지원을 받아 함대 복직을 하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1937년 12월에는 아랄해의 국영해운회사 항구책임자 보조직에 임명되어 근무를 시작했다. 그러나 1938년 6월 또다시 소비에트 당국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동생 최 발렌틴과 함께 수감된 그는 심문과정에서 심한 모욕과 폭행을 당하자 화를 참지 못하고 의자로 조사관을 폭행했다. 이로 인해 더욱 혹독한 고문을 받은 뒤 크즐오르다로 압송되었고, 1938년 10월 26일 총살형에 처해졌다.

2.5. 사후


1992년 2월 20일에 최성학의 아들 네온과 조카 최 발렌틴 발렌티노비치가 크즐오르다 주 법원에 최성학의 명예회복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이후 크즐오르다주 국가안보위원회관리국은 청원서를 승인하고 최성학의 명예회복을 통보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최성학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1] 북한과 바로 접해 있는 러시아의 유일한 행정구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