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5.18민주화운동 유공자로서 전주고등학교 3학년 대학 입학 한달을 앞두고 유신헌법 반대 시위를 감행하여 무기정학을 받는다. 고려대학교 입학하자마자 또한 유신헌법 철폐 데모를 주동하여 구류처분을 받았다. 대학교 2학년 3월 31일 전국 대학 최초로 유신헌법 철폐시위를 주도했다. 박정희는 4월 8일 긴급조치 7호를 고려대학교에 발령하여 군대가 고려대학교를 점령했으며 최규엽은 제적을 당했다.
그후 공주 계룡산 밑 재건중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한 후 폐결핵이 완전 치유되지 않은 상태에서 군대에 끌려간다. 32개월 복무 후 박정희 독재정권을 몰아내고 민주주의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국민들 중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민주화를 위해서 일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직접 노동현장에 들어간다. 대우중공업 직업훈련원 주물공과를 마치고 10시간 맞교대의 주강공장에서 일한다.
박정희가 암살 당한 후 고려대학교에 복학한다. 외무고시를 준비하고 있었으나 전두환의 새로운 독재정치가 나타나면서 외무고시 공부를 접고 다시 학생운동을 주도하여 두 번째 제적을 당한다.
제적을 당하고 수배가 되어있는 상태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 소식을 접하고 서울의 대학생들을 조직하여 서울에서 광주처럼 민주화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유인물을 배포하고 시위를 주도한다. 그리고 수도경비사령부에 체포되어 온갖 고문울 당한 후 서울구치소에 구속된다.
1981년 잉꼬법랑 공장에 들어가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체포되어 2년의 감옥을 산다. 출소 후 노동조합사전 1-5권을 편집하고 동일제강에 들어가 노동조합을 결성한다. 1987년 남노련 사건으로 구속되고 1년 6개월 감옥 생활을 한다. 출소 후 한겨레 사회연구소, 서울노동운동연구소 등에서 근무한다. 1993년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정책위원장을 5년간 역임한다. 1997년 권영길 대통령 후보 정책위원장을 하고, 국민승리21 집행위원장, 민주노동당 정책위원장, 최고위원, 자주통일위원장, 집권전략위원장, 새세상연구소 소장, 서울시장 후보 등을 한다.
2008년부터 한신대학교 외래교수, 서울시립대 초빙교수, 한신대학교 초빙교수 등 13년간 대학 강단에 선다. 2009년부터 한라그룹 사외이사, SM그룹 고문을 한다.
또한,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민주노동당 소속으로 금천구 국회위원선거에 4번 출마한다. 2012년 통합진보당 탈당 후, 2014년 새정치민주연합에 입당한다. 금천구 국회의원선거와 구청장 선거에 출마한다. 40여년간 금천구에 거주하면서 독산동 도하부대 이전 대책위원장, 은행나무 살리기 대책위원장, 신앙촌 저지 대책위원장, 공군부대 이전 및 서울시립대 교양대학유치 위원장, 독산동 8번 버스 설치 위원장, 시흥4동 전투경찰 이전 대책위원장, 신안산선 석수역 출구 설치 대책위원장 등을 맡으며 금천구 지역 발전을 위해 봉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