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5-12 21:10:18

체킷코

체키코에서 넘어옴
チェキッ娘
파일:후지 테레비 로고.svg 예능 프로그램 아이돌 걸그룹
오냥코클럽
(1985 ~ 1987)
체킷코
(1998 ~ 1999)
아이돌링!!!
(2006 ~ 2015)
아이돌ING!!!
(2017 ~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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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싱글은 드림캐스트에 넣으면 영상(MIL-CD)을 볼 수 있는 사양이다.


1. 개요2. 역사
2.1. 탄생2.2. 활동2.3. 마지막
3. 아키모토 야스시4. 의의5. 음반
5.1. 싱글5.2. 앨범

1. 개요

1998년 10월 9일부터 1999년 11월까지 활동했던 일본 아이돌 그룹.

애니메이션 주제가를 전문으로 부르는 가수로 유명한 시모카와 미쿠니는 체킷코를 통해 처음 연예계에 데뷔했으며, 체킷코의 주축 멤버였다.

2. 역사

2.1. 탄생

1980년대는 쿠도 시즈카, 마츠다 세이코 등 각종 솔로 여성 가수, 그리고 후지 테레비 오냥코클럽이라는 초대형 여성 아이돌이 활약했던 일본 여성 아이돌의 전성기였다. 그러나 아이돌 전성기에 대한 반동으로 1990년대 초반에는 여성 아이돌 가수가 힘을 못 쓰는 '아이돌 빙하기'가 찾아왔다. 1990년대 중후반, 아무로 나미에, 카하라 토모미, 하마사키 아유미, 스즈키 아미 등 솔로 여성 가수가 등장했으나 1980년대 중반의 솔로 아이돌과는 활동 측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아이돌 빙하기가 끝나가던 1990년대 후반, 오냥코클럽의 방송 프로듀서였던 후지 테레비의 미즈구치 마사히코는 '헤이세이의 오냥코클럽'을 만들자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예산이 부족하여 후지 테레비의 힘만으로는 그 기획을 이룰 수 없다.

한편 비슷한 시기 오냥코클럽의 작사를 맡았던 아키모토 야스시는 당시 세가의 사외이사로서 새 게임기인 드림캐스트의 광고 전략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를 알게 된 미즈구치는 아키모토에게 '헤이세이의 오냥코클럽'이라는 계획을 전했다. 아키모토는 이 계획을 긍정적으로 판단하고, 드림캐스트의 홍보 전략으로 이 계획을 채용하였다. 이리하여 세가와 후지 테레비, 아키모토 야스시의 협력 하에 체킷코 프로젝트가 막을 올렸다.

2.2. 활동

체킷코의 전략은 기본적으로 오냥코클럽과 동일했다. '유우야케 냥냥'이라는 오락 프로그램을 기반으로 활동했던 오냥코클럽처럼, 체킷코는 'DAIBA테키'라는 전용 프로그램을 바탕으로 활동했다. 1998년 10월 5일, 시모카와 미쿠니를 비롯한 여섯 명의 멤버를 시작으로 체킷코가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후 체킷코는 매 주마다 방송을 통해 새 멤버를 데뷔시켰는데, 이것 역시 오냥코클럽과 똑같았다.


시모카와 미쿠니의 졸업을 발표한 DAIBA테키의 한 회. 이 DAIBA테키는 굉장한 방송이었는데, 30분 분량의 아이돌 전용 방송이 월화수목금으로 주 5회씩이나 나갔다. 비록 아이돌 팬층과는 거리가 있는 평일 오후 4시 시간대기는 했지만... S.E.S.가 출연하기도 했으며 드림캐스트를 주제로 한 코너도 있었다. 오늘날의 AKBINGO!조차도 주 1회, 그것도 오전 1시 시간대다.

'DAIBA테키'라는 방송 자체는 오늘날의 'AKBINGO!'와 비슷한, 아이돌이 중심이 되어서 여러 주제를 진행하는 오락 프로그램이었다. 문제는 '유우야케 냥냥'이 일본 전역에 방송되었던 것과 달리, 'DAIBA테키'는 도쿄를 비롯한 칸토 지역, 그리고 오키나와에만 방영되는 로컬 방송이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칸토 지역 외에서는 듣보잡 신세를 면치 못했다. 오늘날처럼 온라인을 통해 널리 홍보를 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면 모를까, 1998년 당시에는 인터넷 보급률 또한 상당히 낮았다.

미즈구치가 인기 음악방송 '헤이헤이헤이 뮤직 챔프'의 프로듀서였던 덕분에 체킷코는 싱글을 낼 때마다 헤이헤이헤이에 나올 수 있었다. 그 덕분에 그나마 인지도를 조금씩 올릴 수 있었다.

2.3. 마지막

그러나 1999년 3월 31일, 시모카와 미쿠니가 그룹을 탈퇴하였다. 팀의 가창력을 책임지는 멤버이자 사실상 센터였던 시모카와의 탈퇴로 인해 체킷코는


시모카와 미쿠니의 졸업을 축하하는 싱글 '시작'. Do As Infinity의 D・A・I가 작곡한 이 곡은 체킷코 최고의 명곡으로 꼽힌다.

시모카와의 졸업과 함께 'DAIBA테키'도 이름을 바꾸어 'DAIBA쿠신'이라는 새로운 방송으로 탈바꿈했다. DAIBA쿠신으로 바뀌면서, 월~목요일은 오후 정보프로에 밀려 분량이 5분으로 줄었다. 대신 금요일은 30분, 토요일은 1시 시간대에 1시간으로 방송되었다. 그러나 방송의 시청률은 낮아져갔고, 드림캐스트 역시 망해가고 있었다. 게다가 당시는 모닝구 무스메가 한창 인기를 끌었던 시대였기 때문에, 체킷코는 모닝구의 그늘에 가릴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두 그룹 다 娘라는 글자가 이름에 들어간다. 결국 1999년 11월 3일 도쿄베이 NK홀에서 열린 졸업 라이브를 끝으로 체킷코는 짧은 활동을 마치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갔다.

2004년과 2009년에는 일시적으로 멤버들이 모여 부활 라이브를 선보였다.

3. 아키모토 야스시

아키모토 야스시는 체킷코의 기획에 참여했고 세가의 새 게임기 드림캐스트의 홍보 모델로 체킷코를 채용하여 세가와 후지 테레비를 연결시키는 등 체킷코의 성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정작 체킷코가 데뷔하고 나서는 체킷코에서 손을 떼었다. 오냥코클럽에서는 작가진 중 한 명이자 전담 작사가로 활약했고, AKB48에는 '프로듀서'라는 직함으로 참여하여 활동을 전두지휘했고 거의 모든 곡의 작사에도 참여하였다. 하지만 체킷코에는 프로듀서도 아니었고 단 한 곡의 가사도 쓰지 않았다.

이후 아키모토 야스시는 이 프로젝트 참여 경력에 대해서는 거의 함구하고 있다. 본인은 이 실패한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고 싶은 듯하나, 이 DAIBA테키 프로그램 말미에는 아키모토 야스시 사무소 협력이라는 이름이 당당히 붙어있다.

사실 이 프로젝트 참여로 아키모토 야스시는 많은 비판에 시달려야 했다. 일단 어디까지나 세가의 새 게임기 드림캐스트 홍보의 일환으로 계획된 프로젝트임에도, 게임기의 흥행을 위한 홍보에 큰 효과를 볼 만한 기획이 거의 없었다. 그러니까 오로지 아키모토 야스시 개인의 욕심으로 아이돌 그룹 프로젝트가 하나 진행된 셈이었다. 그리고 아키모토는 이런 자신의 사리사욕이 깃든 아이돌 그룹 프로젝트를 위해 세가에게 프로모션 비용 100억엔 정도를 투자 받아놓고, 작사나, 프로듀서, 방송 기획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도 안하고 있다가 프로젝트가 실패하자 자신과는 관계없었던 기획이었다는 식으로 나왔으니, 사실상 먹튀를 해버린 셈이었던 것이다.

아키모토 야스시는 이 프로젝트 외에 세가의 모기업 CSK의 실제 전무였던 유카와 전무를 앞세워 드림캐스트를 홍보하는 CM 시리즈을 기획하여 꽤 화제에 오르게 해주었지만 그 CM의 효과만으로는 체킷코 프로젝트로 100억엔을 까먹은 것을 만회 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이후 세가 드림캐스트의 판매 부진과 누적되는 적자로 가정용 게임기 사업을 아예 접었고, 후에 회장이 타계하면서 긴급 조달한 돈으로 간신히 회사가 무너질뻔한 위기를 넘겼을 정도였다. 세가는 그 후로도 경영에 어려움을 겪다 사미와 합병되고 만다.

한편, 이 프로젝트가 발동되던 시기 세가 메가드라이브 소닉 더 헤지혹 시리즈를 앞세워 나름대로 두터운 팬층을 지닌 북미와 유럽시장에서 금전적인 문제로 드림캐스트의 홍보를 하는데 어려움을 겪기도 했었다. 그 시기와 맞물리며 진행된게 이 100억엔 짜라 아이돌 프로젝트였으니...어쩌니 저쩌니해도 세가 아키모토 야스시에게는 흑역사일듯.

4. 의의

1년이라는 짧은 활동을 끝으로 사라져간 체킷코를 기억하는 이들은 일본에서도 많지 않다. 하지만 체킷코의 곡들만큼은 좋은 평가를 받았다. Do As Infinity의 전 작곡가이자 하마사키 아유미 Fly high 등의 명곡을 썼던 나가오 다이(D・A・I), 이후 도쿄지헨의 멤버로 들어가는 유명 편곡자 카메다 세이지 등 유명한 음악가들이 많이 참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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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적인 아이돌 그룹 오냥코클럽의 영광을 다시 쓰자는 거창한 취지가 무색하게, 체킷코는 1년만에 해산하고 말았다. 체킷코의 직접적 이해 당사자인 아키모토 야스시, 후지 테레비, 그리고 세가는 체킷코의 실패 이후 그 원인을 분석하였고, 2000년대에 각자 새로운 기획을 추진하였다.

아키모토는 체킷코의 실패 이후 방송 연계형 아이돌이라는 컨셉에서 벗어났다. 그 대신 '전용 극장에서 항상 공연하는 아이돌', '언제나 만나러 갈 수 있는 아이돌'이라는 새로운 컨셉을 바탕으로 아이돌 그룹 AKB48을 만들었다. AKB48은 데뷔 4년 만에 일본 전역에서 인기를 끄는 국민적 아이돌의 자리에 올랐고, 연예계 뿐 아니라 각종 산업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 현상이 되었다. 체킷코가 추구했던 '헤이세이의 오냥코클럽'이라는 타이틀은 AKB48이 가져갔다. 하지만 AKB48은 아키모토 야스시가 관여했다는 점 이외에는 오냥코나 체킷코와 공유하는 점이 별로 없다.

반면 후지 테레비는 체킷코의 실패 이후에도 전용 방송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아이돌이라는 컨셉을 그대로 추구하였다. 그 결과 아이돌링!!!이라는 그룹을 데뷔시켰다. <아이돌링>이라는 전용 방송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점, 멤버마다 번호가 붙어있는 점 등은 오냥코클럽과 체킷코를 그대로 계승하였다. 아이돌링이야말로 오냥코와 체킷코의 정통 계승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이돌링은 2000년대의 변화된 방송 환경, 그리고 후지 테레비에서만 활동할 수 있는 제약을 이기지 못하고 2015년 10월 31일 전원 졸업했다.

5. 음반

판매량 출처(프론트 멤버, 주차별 순위 등을 볼 수 있다.)

5.1. 싱글

  • 1998.12.09 抱きしめて 48위 8,410장
  • 1999.03.03 はじまり 40위 32,450장
  • 1999.05.26 最初のキモチ 32위 14,890장
  • 1999.07.16 海へ行こう~Love Beach Love~ 30위 11,420장
  • 1999.08.18 ドタバタギャグの日曜日 39위 10,920장
  • 1999.09.17 ありがとう 36위 15,060장

5.2. 앨범

  • 1999.07.07 CXCO 19위 21,930장
  • 1999.10.20 Best Memories 17위 19,330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