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14 05:03:50

참파와트

참파와트 호랑이에서 넘어옴
파일:참파와트 사살.jpg
사살 후의 모습[1]

1. 개요2. 배경3. 특징4. 최후

1. 개요

Champawat/참파와트[2]

역대 최악의 호환 사건.

약 7~8년간 네팔과 북인도에 걸쳐 무려 436명[3] 인명피해를 낸 식인 호랑이이다. 현재 기네스북에 사람을 가장 많이 죽인 단일 개체의 동물로 기록되어 있다.

단순한 피해 규모를 넘어서, 야생동물과 인간의 충돌과 그로 의한 인명피해의 근본적 원인은 대부분이 인간에 의한 환경 파괴라는 사실의 대표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2. 배경

20세기 초기에는 영국령이었던 인도 제국 네팔의 라나 왕조에 의해 인도 북부와 네팔 남부의 테라이(terai) 생태계가 대부분 개간되거나 벌목되어 사라지게 되었고, 인도와 네팔 모두에서 호랑이나 표범 사냥이 유행했을 뿐만 아니라 식민지 관리 정책으로 맹수들을 멸종시키려는 사업이 성행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 때문에 호랑이와 표범의 개체수가 감소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먹잇감들도 급격히 줄어들게 되었으며 남아있는 먹잇감들과 서식지를 둔 경쟁 또한 더욱 치열해졌고, 사살하려다 실패한 경우들에 의해 사냥이 힘들 정도로 부상당한 개체들도 급격히 늘어났다.

이런 요인들이 겹치면서 190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인도와 네팔에서는 호랑이나 표범에 의한 식인 사례들이 급격히 많이 속출하게 되었는데, 참파왓은 그 중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사건 중 하나이자 가장 많은 인명피해를 입힌 사례이다.

3. 특징

맨 위의 사진에서도 드러나듯이 총에 맞아 오른쪽 아래턱 송곳니를 잃었고 오른쪽 위턱 송곳니는 끝이 부서져 나갔는데, 이 때문에 사냥을 잘 할 수 없게 되어 식인 호랑이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4]

북인도와 네팔에서 호랑이가 주로 서식하는 지역은 저지대의 테라이 생태계이지만,[5] 상술했듯이 당시 테라이는 대부분이 사라지고 있었으며 참파와트는 부상으로 의해 다른 호랑이들과 줄어드는 서식지를 놓고 경쟁하기에도 불리했었을 것이다. 또한 개발 이후에도 테라이에서는 인구밀도가 매우 낮았기 때문에[6] 인간을 주식으로 하게 된 참파와트에게는 더 이상 좋은 사냥터가 아니었다. 이 때문에 참파와트가 본격적으로 활동한 지역은 히말라야산맥의 기슭에 위치한 산악 마을들과 이들을 둘러싼 온대림이었다.

당시 히말라야 남부에서는 여자나 어린아이들이 마을 외곽에서 밭일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참파와트는 이들을 주로 습격하였다. 한번 사람을 물어가면 복잡한 지형으로 몸을 숨겼으며, 시신을 먹어치운 뒤에는 바로 산자락을 따라 다른 마을로 이동했다. 또한 쇠 냄새에 민감해 사람들이 총이나 농기구와 같은 쇠로 만들어진 물체가 있으면 경계하였다. 이런 요인들로 의해 참파와트를 죽이는 데에는 수년이 걸렸다.

상술했듯이 참파와트는 네팔에서 몇 년 동안 약 200명을 죽였고,[7] 라나 왕조는 네팔군 구르카 용병, 호랑이 사냥용으로 훈련받은 아시아코끼리 수십 마리까지 파견해 참파와트를 추적해 절벽 끝까지 몰아넣는 데에 성공했다. 그러나 사살당하기 직전 참파왓은 절벽 아래로 흐르는 강으로 뛰어들었고, 강 건녀편인 북인도 우라칸트주로 헤엄쳐 건너갔다.[8] 이후 녀석은 참파왓을 영역의 중심으로 삼고 참파왓과 인근 마을들을 오가며 수년간 200명 이상의 인명피해를 냈다.

4. 최후

당시 철도업체에서 하위 관료로 일하고 있던 짐 코벳은 어린 시절부터 야영이나 수렵에 능했었고 호랑이나 표범과 접촉한 경험도 많았었다.[9] 코벳은 1907년 지인에게서 참파왓에 대하여 전해듣고 생애 처음으로 식인 호랑이 사냥에 나서기로 결정했다. 떠나기 전에 그는 참파왓에 걸려 있던 모든 현상금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는데, 포수들이 많으면 오인사격의 위험이 크고 녀석의 경계를 세워 사살하기 오히려 어려워질 것이라고 판단해서였다.

코벳은 며칠 전 참파와트가 습격한 마을인 팔리에 도착한 후 발자국을 보고 해당 호랑이가 약 2.4m 체장의 암컷 벵골호랑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는 참파와트가 이미 배를 채우고 영역의 다른 구역으로 떠난 상황이었기 때문에 코벳은 계획을 다시 세워야 했다. 여러 마을들의 주민들로부터 이 호랑이가 더 큰 마을인 참파왓을 중심으로 활동한다는 것을 확인한 코벳은 참파왓에 먼저 가 있다가 녀석이 나타나면 사살한다는 계획을 세웠고, 예상했던 대로 참파왓에 도착하고 얼마 되지 않아 한 10대의 소녀가 습격당하게 된다. 코벳은 습격이 일어나자마자 참파왓을 추적하기 시작했고, 마을 외곽에서부터 숲이 울창한 좁은 협곡으로까지 계속 추적하다가 녀석이 소녀의 시신을 포식하고 있는 굴까지 진입하게 된다. 이때 참파왓은 추적당하는 것을 눈치채고 코벳을 먼저 기습하려고 했으나, 코벳 역시 마지막 순간에 상황을 눈치채고 총을 발사했다. 그러나 지형이 복잡하고 식물들이 무성한데다 해까지 지고 있었기 때문에 몇 시간의 추격에도 불구하고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

마을로 돌아오는 길에 코벳은 주변 지형들을 보고서 참파왓이 총기나 쇠의 냄새를 싫어한다는 점, 그리고 사람을 사냥한 뒤에는 바로 복잡한 협곡들 사이로 사라져 몸을 숨긴다는 점을 간파했다. 녀석의 굴이 있는 좁은 협곡은 더 깊고 넓은 협곡에서 갈라져 나온 협곡들 중 하나였다. 코벳은 참파왓이 만약 도주하려 한다면 이 넓은 협곡의 바닥을 따라서 이동할 것이라고 정확히 예측했다.

그 다음날, 짐 코벳은 마을 촌장을 통해 주민들을 모집해[10] 냉병기들과 화기들을 들고 능선 위로부터 줄지어 내려오면서 시끄럽게 굴으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자신은 촌장과 함께 넓은 협곡 바닥으로 먼저 내려간 뒤 촌장은 협곡 벽면에서 자라는 나무 위에, 코벳 본인은 강가의 덤불 사이에 체취와 쇠 냄새를 숨기며 매복하고 참파와트가 굴에서 나오기를 기다렸다. 예상했던 대로 참파와트가 쇠 냄새를 피해 큰 협곡으로 나오자 코벳은 방아쇠를 당겼는데, 첫번째 사격은 빗나갔으나 두번째 사격은 참파왓의 몸통을 맞추었다. 죽어가는 참파왓은 코벳을 발견하고 마지막 힘을 짜내며 찢어죽일 기세로 코앞까지 달려들었지만, 마을 촌장에게서 다른 총을 건네받은 코벳은[11] 끝내 녀석을 한번 더 명중시키며 사살하였다. 이렇게 수년간 북인도에 악명을 떨쳤던 공포는 막을 내렸다.[12]


[1] 코벳은 참파왓을 사살한 뒤 사체를 주민들에게 넘겼지만 머리와 가죽의 일부는 가지고 가서 박제했는대 그 사진이다. 이 박제는 코벳의 사후 행방불명되었다. [2] 북인도에서 활동했던 시기에 활동영역의 중심지였으며 사살된 곳인 참파와트 마을의 이름을 딴 것이다. [3] 사실 네팔에서 활동했을 당시의 기록은 불분명하기 때문에 이 수치가 정확한지는 모를 일이지만, 참파와트에 의한 인명피해가 최소한 7년에 걸쳐 발생하였다는 점과 성체 호랑이가 생존하는 데에 얼마나 많은 고기가 필요한지를 기반으로 계산해 보면 400명은 넘겼을 것으로 추측된다. [4] 누가 이 호랑이를 처음 사살하려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사람만 아니었다면 이 호랑이의 목숨과 사람 436명의 목숨이 비극적으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5] 인도의 카지랑가 국립공원과 마나스 국립공원, 네팔의 치트완 국립공원이 대표적이자 가장 잘 보전된 테라이 지역이다. [6] 1950년대에 말라리아 퇴치가 이루어진 이후에야 인구 밀도가 증가하며 이는 개발에도 박차를 가해 테라이의 더욱 빠른 파괴로 이어진다. [7] 이때는 루팔이라는 마을을 중심으로 주로 활동했다. [8] 네팔 군대가 계속 추격한다면 동맹국인 대영제국의 식민지를 침공하게 되니 쫓을 방법이 없었다. [9] 코벳은 유년기를 북인도의 나이니탈에서 보내며 집 근처에 사는 호랑이들을 종종 관찰했었다. 수십년 후 코벳은 이 숲을 호랑이 보호구역으로 지정하기를 요구하여 승락을 받게 되는데, 코벳 사후에 코벳 국립공원으로 재명명되었다. [10] 동원한 방식이 참 기가 막힌데, 당시에는 인도에서의 독립 항쟁을 처단하기 위하여 인도인들이 화기를 소지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으며, 해당 지역에서는 영국인 인사들에 대한 시선이 매우 부정적이었다. 코벳이 마을 촌장에게 상황을 설명하자 촌장은 독단적으로 “이 식인 호랑이를 잡기 위해서 모든 무기에 대한 규제를 단 하루만 임시철회한다”고 했고 그 결과 300명 넘는 주민들이 숨겨두었던 각종 구식 화기들과 냉병기들을 들고 합류했다. [11] 가난한 집안에서 자란 코벳은 사냥할 때 총알값을 아끼기 위해 최소한의 총알만 넣고 다녔는데, 이 경우에는 근거리에서 사격해야 하는 특성상 두 발 안에 승부를 내지 못하면 어차피 인생 끝이라는 분석도 있었다. 첫번째 사격이 빗나가지 않았었다면 이 판단이 적중했었을 것이다. [12] 후에 영국 정부는 짐 코벳에게 현상금을 내리지만 짐 코벳은 자신은 고맙지만 이런 현상금이 필요없으며 피해자 유족들을 위해 사용하라고 말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