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F0C420><colcolor=#ffffff> 중국화하는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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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 정치사상, 일본근현대사 |
작가 | 요나하 준 |
출판사 | 페이퍼로드 |
특이사항 | 종이책 절판/ e-book북으로만 구매 가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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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 책은 1000년 전 중국 송대에 구축된 질서를 중국화로 규정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한 일본사에 대한 분석을 시도한 책이다. 지금까지 사용되어온 <근대화, 서양화, 서구화> 등의 어휘를 대신하여 '중국화'라는 개념을 창조함으로써 동북아시아의 역사적 전개를 재묘사하였다. 이 책은 일본사회가 당면한 문제들을 역사적 맥락에서 설득력 있게 풀어내면서 '중국화'가 불가피하기에 중국화를 할 거라면 멋있게 중국화하자고 말하며, 이민 문호를 개방해 외국인들이 와서 살고 싶은 나라가 되도록 하고, 전쟁포기를 규정한 평화헌법의 고귀한 이상을 내세워 중국을 제치고 일본이 중화를 구현할 수 있도록 하자고 이야기한다.이 책은 역사학의 방법을 사용하여 새로운 일본사 이야기를 모색하고 있으며, 여기서 열쇠가 되는 것이 바로 중국화라는 개념으로, 일본이 '끊임없이 진보해왔다'고 하는 '낡은 일본사 이야기'에서 빈번하게 사용된 단어들을 대신하는 개념이다.2. 내용
2.1. 서론
서론에서는 일본이라는 나라의 커다란 전환점에는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이 있다고 말한다. 동일본 대지진에 대해 일각에서는 '근대과학의 종언'을 보여준 것이라고 말하지만, 저자는 2010년대를 맞이하는 일본이 '일본사회의 종언'에 다가가던 것이 분명한 시점에 동일본 대지진은 종언의 방점의 역할을 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책에서는 일본사회가 대지진이 일어나기 전부터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는 것을 전제로 하며,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나 다시금 부흥으로 향하는 키포인트로 '중국화'를 말하고 있다. 책에서 말하는 중국화는 '일본사회의 존재방식이 중국사회의 존재방식과 닮아가는 것'을 말한다. 책에서는 일본이 당나라 때까지는 중국을 의식적으로 모방하려 했지만, 송나라 이후 중국의 근세를 수용하지 않고, 에도시대에 중국과는 다른 모습의 근대를 맞이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던 일본이 이제 와서 송나라 이후 '중국 근세'와 동일한 상태로 이행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책에서는 일본이 '중국화'하고 있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2.2. 1장. 끝나버린 역사
1장에서는 많은 학자들이 냉전 이후에 역사의 종언을 외쳤지만, 이미 역사의 진보는 송나라 시대에 끝이 났다고 말하고 있다. 송나라 때에는 중국사회의 틀이 한번의 커다란 대전환을 이루었고, 이 대전환 후의 틀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변함이 없다고 말한다. 당시 송나라 시대가 어느정도로 획기적이었나면, 귀족제도를 전폐하고 황제 전제 정치를 시작하였다. 좀 더 쉬운 표현으로는 경제와 사회를 철저하게 자유화하는 대신에 정치 질서는 일극 지배에 의해 유지되는 틀을 만들어낸 것이다. 송나라 때에는 '과거'를 적극 시행하였는데, 당나라 때와 비교하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원을 뽑았다. 나아가 전시라고 불린 황제 직속으로 시험 감독을 시행하는 최종시험을 치게 했으며, 이외에도 군현제와 농민의 화폐 사용을 통해 귀족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권력을 황제에게 집중시키는데 이는 중앙집권을 공고히 세우는 것이 되었다. 즉,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황제가 정치 질서를 일극 지배하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마치 냉전에 소련과 미국이 서로를 견제하였던 시대를 지나 미국이 압도적인 권력국가가 된 것처럼, 송나라 때에도 '황제'라는 권력자가 등장한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책에서는 이미 역사는 송나라 때에 끝났다고 말하고 있다.그러면서 일본은 왜 송나라라는 좋은 모델이 가까이 있었음에도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일까? 저자는 일본이라는 나라는 당나라 중국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즉, 바꿔말하자면 송나라에게서는 많은 영향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영향을 받지 못한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은 가장 큰 이유로는 당시 일본의 미디어가 과거제를 도입할만큼 성숙하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고, 이런 이유로 중국과 일본은 '권위와 권력의 일치 vs 권위와 권력의 분리', '지위의 일관성의 상승 vs 지위의 일관성의 저하' 등 많은 차이가 나타나며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2.3. 2장. 승리하지 못한 '중국화'세력
2장에서는 몽골제국을 얘기하며, 당대 전 세계적인 시장통합의 기초를 놓은 서계화의 원점으로 바라보았으며, 몽골을 송나라 중국에서 만들어진, 현대 '탈냉전'세계의 축소판과도 같은 사회를 한반도에서 동유럽에까지 확장한 제국이었다고 본다. 이러한 몽골의 모습은 일본 내에서 말하는 오다 노부나가의 락시락좌와 비교할 수도 없을만큼 세계적인 락시락좌를 가졌으며, 일본은 이를 따라갈 필요가 있었지만 일본은 몽골의 자유무역 경제권 제안에 거절하고, 저항하면서 글로벌화의 길이 막혀버렸다(정확히 말하면 가마쿠라 막부가 막아버렸다.) 고 볼 수 있다.이후 시간이 지나 일본에서 '고다이고 ( 고다이고 덴노)'라는 인물이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키며 권력을 잡았는데, 고다이고는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악당을 비롯해 표백민이나 상공업자를 조직해 농업 기반에 의거하거나 이전 선례를 무시하고, 자기 맘대로 인사나 정치를 쇄신하는 등 일반적인 천황의 모습이 아닌 파천황적인 모습을 보이며 '이형의 왕권'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전 세계적인 흐름으로 보았을 때는 고다이고 천황의 모습이 지극히 일반적인 것이었으며, 이외의 천황의 모습들이 이형적인 왕권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중세일본은 '중국화' 세력이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 없는 조건이었던 것이다.
2.4. 3장. 우리들이 좋아하는 에도
3장에서는 나이토 고난이 말한 '일본이 중국인과는 다른 근세를 선택했다고 말하고 있다'에 대해 일본 중세는 얼마간의 중국화 정책의 수립을 통해 일본에서도 송나라 같이 중국적인 사회가 만들어질 가능성이 존재했던 시대, 전국시대 이후의 일본 근세는 중국적인 사회와 180도 다른 독자적인 근세사회의 틀이 정착한 시대로 바라보았다.일본에 대해 설명하면서 서양과 비교하였는데, 서양에서 '성'은 사적 소유물이지만 일본의 '성'은 공적 건축으로 여겼다.즉 일본의 성에 사는 다이묘들의 사명은 당연하게도 자신이 맡은 지역의 질서를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자신이 맡은 지역의 주민들까지 지키는 것인데, 이것이 농민들의 입장에서는 중세까지는 자신들이 스스로 자력구제하며 살아야했지만, 근세 이후로는 자신들의 안전을 윗분(다이묘)에게 맡기며, 민생이 보장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것이 만사를 '시장에 맡겨두라'고 하며 민정 기능을 포기한 중국식 근세국가와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인데, 이 때부터 일본은 독자적인 근세로서 일본문명이 시작되었다. 그러면서 나타난 중국과의 차이점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데, 중국이 혈족 단위의 원거리 네트워크를 중요시 여기는데 반해 일본은 지금 동일한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 간의 결속을 선택한 점이다. (지금으로 치면 타지역에 있는 친척들보다 같은 아파트에 있는 이웃주민들과 결속을 택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이외에도 천황을 전쟁을 초월한 중립적인 존재로 여기는 것도 중국에서 황제라는 이미지가 갖는 것을 상상했을 때, 일본과 중국은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외에도 이시야마 전쟁 이후의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지나며 에도시대에 중세일본까지 존재하고 있던 '중국화'를 향한 싹이 사회로부터 뿌리 채 뽑혀나갔다. 뿌리가 뽑혀나간 것이 무슨 말이냐? 어떻게 증명할 것이냐라는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시금 중국과 일본을 비교할 필요가 있다. 비교해 볼 것은 바로 신분제도이다. 왜냐하면 중국에서는 송나라시대부터 신분제라는 것이 폐지되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의 경우, 중국에서는 600년 전에 사라진 신분제도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도쿠가와 막부 초기 100년간 걸쳐 전국에 벼와 집을 보급한 것은 결과적으로 촌정제를 실시하는 결과로 이어졌고, 당연히 거주지 이주의 제한으로 연결되며, 가업문화가 당연히 발달되는 사회가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거기에 더해 집안단위의 납세제는 무사까지 구속하였다. 이는 다이묘에게 할당되는 영지의 지속화와 함께 강제적으로 대대손손 친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는데,이러한 것은 중국의 군현제와 비교되어 일본의 봉건제로 자리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