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젠성 사람으로 1577년 무렵에
베트남 연해에서 무역을 종사했다가 일본에 잡혀갔다가
허의후에게 구출되었다고 하며, 허의후로부터 일본이 침공한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허의후가 쓴 글을 가지고 명나라에 알렸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명나라의 절강성에 전했다고 되어있다. 해동역사에는 허의후가 쓴 글을 복건군문 장씨에게 달려가 알리게 한 후에 복건성에서 이를 조정에 보고했다고 한다.
난중잡록에는 허의후가 명나라에 올린 상소에서 주균왕의 충성스러운 심정과 극히 간정하고 의로운 마음이 발현한 지라 몸을 바쳐 나라에 보답하기를 자원해 이 글을 안고 가서 보고하겠다고 하기에 저(허의후)는 기뻐뛰며 자세히 갖추어 진술해 바친다고 언급했으며, 1591년 9월에 주균왕은 허의후, 곽국안, 보국사 등과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관한 글을 명나라에 올렸다.
주균왕이 허의후의 글을 올렸지만 그 내용에는 조선이 일본의 앞잡이가 되었다거나 조선이 명을 공격하라고 사주했다는 등의 거짓 내용도 들어있어 명나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처음에 조선이 일본과 짜고 명나라를 공격하려는 것으로 생각했다.
징비록(드라마)에서
석성에게 직접 조선과 일본이 짜고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는 거짓 사실을 알리는데, 석성은 조선이 명나라의 제후국이라는 것 때문에 믿지 않자 조선이 일본에 통신사를 보내고도 알리지 않았다는 것, 일본이 조선에게 명나라를 공격할 것이니 길을 빌려달라는 서신을 보낸 것을 이야기한다. 또한 일본에 묶인 허의후가 보내게 하면서 자신만 탈출했다는 것도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