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2 20:32:23

종리 전투

<colcolor=#000> 종리전투
鍾離之戰
시기 507년 1월 ~ 507년 3월
장소 안휘성 추저우시 봉양현 동북
원인 총사령관 원영(元英)의 종리성(鍾離城) 침략
교전 양(梁) 위(魏)
지휘관 정북장군 조경종 중산왕 원영
장수 예주자사 위예
서주자사 창의지
태자사인 위암
양군태수 풍도근
예주장사 왕초종
사별장 조초
태자세마 유유
보국장군 배수
진군태수 이문쇠
정북사마 언문달
정북사마 풍기린
상서좌승 공휴원
서주장사 공휴거
예주종사 배적
주부 마광
사별장 부소
태자사인 장승
서주종사 사마청
무위장군 양대안
진동장군 소보인
제남태수 사마직안
중산참군 최유
사지절 견밀
정로장군 선패
건무장군 유신부
누선장군 공손지
병력 약 200,000명 호(呼) 1,000,000명
피해 피해 규모 불명 200,000명 사상
50,000명 부상
결과 양군의 승리 및 북위의 패퇴
영향 무위장군(武衛將軍) 양대안(楊大眼) 실각
1. 개요2. 배경3. 양측의 전력
3.1. 북위군3.2. 양나라군
4. 전투 경과5. 결과6.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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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북조시대인 서기 507년 양대안이 이끄는 북위군과 위예가 이끄는 군이 종리(鍾離, 지금의 안휘성 봉양현 동북)에서 맞붙은 전투.

중국사에서 팽성대전, 곤양대전, 비수대전과 함께 소규모 군대가 대군을 상대로 완승을 거둔 대표적인 전투로 손꼽힌다.

2. 배경

서기 502년 4월, 고조 무황제 소연은 제화제 소보융으로부터 양위를 받아내고 남제를 멸망시킨 뒤 양나라의 초대 황제로 즉위했다. 그는 밤낮으로 국정에 전념하며 내정에 힘을 기울여, 양나라의 국력을 키우고 백성을 구휼했다. 그러던 중 북위의 내분이 심화되고 백성들이 무거운 세금과 가혹한 부역에 시달리며 반감을 키우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오자, 그는 북벌의 때가 왔다고 여기고 동생인 임천왕 소굉을 도독북토제군사, 상서우복야 유담을 부장으로 삼아 원정을 감행하게 했다.

당시 북위의 황제인 세종 선무제 원각은 양나라군이 침입했다는 급보가 들어오자, 몇년 전 남제 정벌에 공을 세웠던 중산왕 원영에게 도독양서이주제군사라는 직책을 내리고 100,000명의 대군을 주어 적을 막도록 했다. 양나라군은 낙구(오늘날 안휘성 회원)에 진을 친 뒤, 강소성 북부, 산동성 남부, 하남성의 3개 방면으로 나누어 공격했다. 이 중에서 가장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 곳은 바로 강소성 방면이었다. 위예가 이끄는 양나라군은 소현성 전투에서 북위군을 제압한 뒤 합비를 포위했다. 합비는 북위의 남방 전선 요충지였기 때문에, 북위는 장군 양영윤의 지휘하에 50,000명의 병력을 합비로 파견하여 이를 막게 했다. 양나라 장수들이 이를 두려워하자, 위예는 그들을 달랬다.
"용병의 법은 기(奇)를 갖고 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구태여 병력이 많고 적음은 중요하지 않다."
이후 북위군이 인근의 회정성을 함락시키고 양민 1,000여 명을 학살하자, 위예는 크게 분노하여 비수에 쌓아뒀던 보를 무너뜨려 합비에 수공을 가했다. 합비의 수비대장 두원륜은 끝까지 항전했으나 석궁에 맞아 전사했고, 위예는 합비를 함락시킨 후 10,000여 명의 포로와 수만 두에 달하는 가축을 포획했다. 이후 북위군은 위예를 두려워하여, 그를 '위호'(韋虎: 위씨 호랑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다른 전선에서는 양나라군이 모두 밀려났다. 서기 506년 3월 16일, 명장 양대안이 지휘하는 북위군은 하남 방면에서 왕무가 이끄는 양나라군을 격파했다. 양나라군 총사령관 소굉은 양성(지금의 안휘성 수현)을 함락한 후 적을 두려워하여 진군을 머뭇거렸다. 장수들은 속히 진군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부장 여승진이 진군을 극력 말렸고, 소굉은 여승진의 말에 따라 진군하지 않았다. 이에 군중에서는 소굉과 여승진 두 사람을 가리켜 '소랑'(蕭娘: 소씨 아가씨)과 '여모'(呂姥: 여씨 할머니)라고 비아냥거렸다. 반면 부장 마선권은 물러나려 하는 소굉을 크게 꾸짖었고, 소굉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아무런 결단도 내리지 못했다. 그러던 중 낙구에 폭풍이 몰아치고 천둥이 치자, 소굉은 크게 놀라 도주했고, 양나라군은 이로 인해 전의를 상실하고 패주했다. 북위군은 이들을 추격해 50,000명에 가까운 적병을 죽였다.

북위 조정은 원영에게 승리의 기세를 타 남하하라고 지시했고, 원영은 즉시 종리성을 포위했다. 북위 선무제는 당시 강소성 방면에서 양나라군과 대적하고 있었던 도독동토제군사 형만에게 서신을 보내, 종리로 가서 원영과 합류하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형만은 상소를 올려 양나라가 수성에 강하고 북위군이 오랫동안 전쟁에 참여해 피로하니 갈 수 없다고 반대했다. 북위 조정에서는 다시 조서를 내려 진격하라고 명령했지만, 형만은 다시 표문을 올려 적의 배후를 습격하는 건 가하지만 남쪽으로 진격하는 건 안 된다고 반대했다. 이에 선무제는 형만을 소환하고, 진동장군 소보인을 원영에게 보내 함께 종리를 함락하도록 했다.

이후 양대안이 이끄는 북위군은 남하하여 마두성(지금의 안휘성 방부)을 공략한 뒤 창의지가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지키고 있었던 종리성을 포위했다. 종리성은 북쪽으로 회수에 인접하고 지형이 험난하여 공격자가 공략하기 어려운 천혜의 요새였다. 이에 북위군은 장기전을 벌이기로 하고, 회수의 남북 양안을 잇는 건하장교를 세웠다. 총사령관 원영은 남안에 주둔하여 공성을 담당했고, 양대안은 북안에 주둔해 식량 및 물자 보급을 담당했다. 그리고 진동장군 소보인은 교량의 경비 및 관리를 담당했다.

북위군은 대량의 흙을 수레에 실어 날라서 종리성을 둘러싼 해자를 메우려 했고, 충차를 이용하여 성문을 들이받았으며, 수레바퀴를 동원해 성벽을 부수는 등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맹공을 퍼부었다. 하지만 성안의 양나라 수비군은 창의지의 지휘하에 완강하게 저항했고, 훼손된 성벽을 진흙으로 메웠다. 이리하여 북위군은 수 개월이 지나도록 종리성을 공략하지 못했고, 전황은 점차 교착되었다.

507년 2월, 선무제는 더 이상 싸워서는 안 된다고 판단하고 원영에게 환군을 명령했다. 그러나 원영은 조금만 더 공격하면 함락시킬 수 있으니 맡겨달라고 요청했고, 선무제는 보병교위 범소를 파견하여 공략을 논의하도록 했다. 범소는 현지 상황을 살펴본 뒤 퇴각하라고 건의했지만, 원영은 듣지 않았다. 한편, 양무제는 종리성이 위험하다는 소식을 듣고 200,000명의 대군을 편성했다. 무제는 조경종을 총대장으로, 위예를 부장으로 하여 구원에 나서도록 했다. 이리하여 북위와 소량 간의 전쟁의 향방을 가를 종리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

3.1. 북위군

  • 총사령관: 중산왕 겸 도독양서이주제군사 원영
  • 부지휘관: 양대안, 정동장군 소보인
  • 병력: 호왈백만, 실제로는 수십만 명의 병력.

3.2. 양나라군

  • 총사령관: 조경종
  • 부사령관: 위예[1]
  • 병력: 200,000명

4. 전투 경과

위예가 이끄는 양나라군은 종리성 서남쪽 음릉 부근의 습지를 돌파한 뒤 야밤을 틈타 소양주 너머에 도착했다. 그들은 종리성 20리 밖에 녹각을 세워 하나의 성을 구축했다. 하룻밤 새에 성이 세워진 모습을 본 북위군은 크게 놀랐다. 원영과 양대안은 차례로 소양주에 세워진 양나라 군영을 공격했지만, 위예는 이를 거뜬히 격파했다. 한편, 양나라군은 회수 북안에 가서 곡물을 베어 날랐는데, 북안에 주둔하고 있었던 양대안의 북위군 별동대가 막았다. 이에 조경종은 북안에 양군 1,000여 명을 보내 성루를 쌓고 북위군과 대치했다. 별동대 지휘관 조초가 이 성을 지켰기에, 성 이름은 '조초성'으로 붙여졌다. 조초성은 양나라군의 곡물 확보와 더불어 북위군의 보급로를 간접적으로 차단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507년 3월, 엄청난 장마가 쏟아지면서 회수의 강물이 7척이나 불어났다. 위예는 이 틈을 타 풍도근, 배수, 이문쇠 등 양군의 장수들로 하여금 수군을 몰아 건하장교를 공격하도록 했다. 양나라 수군은 성공적으로 건하장교를 파괴했고, 바람이 북위군 진영쪽으로 불자 화공을 가해 모조리 불태웠다. 가뜩이나 강물이 불어나서 혼란에 빠져 있었던 북위군은 교량이 끊기면서 퇴로가 사라지자 전의를 급격하게 상실했다. 위예는 가마에 탄 채 지팡이를 두드리며 총공격을 명령했고, 양나라군은 함성을 지르며 돌격했다. 종리성에 있었던 창의지는 이 모습을 바라보며 환호했다.
"승리다! 승리다!"
이날 전투에서 참수된 북위군은 100,000명, 익사한 병사도 100,000명에 달했다. 이리하여 종리 전투는 양나라군의 압도적인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5. 결과

참담한 패배를 당하고 도주한 원영, 양대안, 소보인은 극형에 처해질 위기에 몰렸다. 하지만 선무제는 원영과 소보인을 서민으로, 양대안을 병졸로 강등시켜 영주군에 배속시켰다. 세 사람은 얼마 안가 국내의 반란과 양나라의 북벌을 막아야 한다는 이유로 관작을 돌려받았다.

반면, 종리 전투에서 맹활약한 위예는 통직산기상시, 우위장군에 임명되었으며, 식읍 700호를 하사받았다. 이후 양무제는 북벌의 뜻을 꿋꿋이 이어가 진경지를 위시로 한 북벌군을 일으켜 북위를 수시로 공격했다.

6. 같이보기



[1] 명목상 부사령관이었지만, 조경종이 연배나 경륜에서 앞서는 그의 의견을 항상 따랐기에, 사실상 그가 총사령관이나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