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1-14 17:43:05

존 3세 마셜

성명 존 3세 마셜
John III Marshal
생몰년도 미상 ~ 1235년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미상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힝엄 남작령
아버지 존 2세 마셜
어머니 앨리스 드 콜빌
아내 앨리스 드 리
자녀 존 4세, 윌리엄, 앨리스
직위 아일랜드 세네샬, 힝엄 남작, 햄프셔 보안관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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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아일랜드 세네샬, 힝엄 남작, 햄프셔 보안관. 윌리엄 마셜의 비호 아래 성공적으로 출세했고, 제1차 남작 전쟁에서 맹활약해 헨리 3세가 잉글랜드의 국왕으로 등극하는 데 기여했다.

2. 생애

잉글랜드 왕실의 마셜을 맡았던 존 2세 마셜과 앨리스 드 콜빌의 아들이다. 앨리스 드 콜빌은 당시 서식스 지주 윌리엄 드 콜빌의 아내였는데, 존 2세 마셜과 간통해 그를 낳았다. 존 2세는 그를 아들로 인정했고, 자기 집에서 키웠다. 1194년 3월 아버지 존 2세 마셜이 존 왕자 리처드 1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을 때 가담했다가 리처드 1세를 추종하는 왕실군에게 말버러 성에서 포위된 뒤 항전하던 중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사망했다. 그 후 삼촌인 윌리엄 마셜의 집에서 자랐으며, 1197년 삼촌과 함께 플란데런으로 여행을 떠났고, 1198년 노르망디로 향해 리처드 1세의 원정군에 동행했다.

그 후 삼촌이 존 왕의 왕위 계승을 지원하여 왕실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면서, 그의 위상도 드높아졌다. 1200년경 노퍽의 부유한 상속녀 앨리스 드 리의 후견인 자격을 얻었고, 그녀와 결혼했다. 1203년 팔레즈 성의 성주로 발탁되어 노르망디에서 필리프 2세의 침공에 맞서 성공적으로 격퇴했고, 에브뢰 백국 내 영지를 수여받았다. 1204년 초 잉글랜드로 돌아왔고, 그 해 4월 존 왕에 의해 렌스터로 파견되어 아일랜드 세네샬로서 직임을 수행했다. 1205년 윌리엄 마셜이 궁정에서 해임된 뒤에도, 그는 존 왕의 신임을 얻고 계속 출세했다. 1207년 2월 삼촌이 아일랜드에 파견되었을 떄도 세네샬 자격으로 아일랜드를 통치했으며, 그 해 가을 삼촌과 함께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1207년 11월 12일 햄프셔 보안관에 선임되어 연간 25마크의 연금을 받았으며, 대대로 아일랜드 종신 마셜을 맡을 특권을 받았다. 이후 1210년까지 아일랜드로 파견된 왕실군 사령관을 맡앗으며, 1213년 5월 윌리엄 마셜이 궁정으로 돌아오자 그의 부관이 되었다. 1213년 6월 10일 슈롭셔의 윈처치와 스쿠워드 성주가 되었으며, 1214년 1월 24일 링컨셔와 그 해안의 관리인으로 발탁되었고, 웨일스 국경지대의 사령관도 겸임했다. 6월 25일 노리치와 옥스퍼드 성과 함께 노퍽과 서퍽 카운티의 보안관으로 임명되었다가, 나중에 왕실에 돌려준 뒤 그 대가로 서머싯, 우스터셔, 도싯의 여러 토지와 성 관리인이 되었다.

제1차 남작 전쟁이 한창인 1217년 3월 햄프셔의 보안관이자 서부 잉글랜드 데비지스 성주로 발탁되어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롱게스피와 함께 윌트셔의 넓은 지역을 다스렸으며, 그해 5월 링컨 전투에서 삼촌 윌리엄 마셜의 지휘 아래 기수 기사로서 선봉대를 이끌어 프랑스군과 귀족 반란군을 섬멸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후 샌드위치 해전에서 필립 도비니와 함께 함대를 이끌어 프랑스 함대를 궤멸시켰고, 당시 잉글랜드 왕이 되려 했던 루이 왕자는 샌드위치 해전 후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헨리 3세 진영과 협상한 끝에 상당한 보상금을 받는 대가로 잉글랜드 왕위를 포기한 뒤 프랑스로 돌아갔다.

1217년 11월, 존 3세 마셜은 내전의 승리를 이끈 공적을 인정받아 숲의 대감독관 직을 맡아 1221년 2월까지 재직했으며, 1217~1218년 데본 주와 와이트 섬을 통치했다. 1218년 미들랜드 북부 숲의 감독관을 맡았으며, 1221년 링컨셔, 노팅엄셔 및 더비셔의 순회 판사를 맡았다. 삼촌 윌리엄 마셜이 1219년 5월 14일에 사망한 후 그의 아들이자 제2대 펨브로크 백작인 윌리엄 2세 마셜을 가장 좋아하는 사촌이라고 지칭하며 긴밀한 정치적 동맹을 맺었다. 윌리엄 2세는 자기 인장이 완성될 때까지 존 3세 마셜의 인장을 사용하기도 했다.

존 3세 마셜은 윌리엄 2세 마셜의 아일랜드 영지를 경영하기 위해 아일랜드로 자주 여행가서 그곳에서 순회 판사로 활약했으며, 1223~1224년 얼스터에 있는 레이시 남작령의 보안관을 맡았다. 1225년 여름에 프랑스 사절로 파견되었고, 1226년 1월에는 헨리 3세를 대신하여 교황 특사 오토와 대면했다. 1230년 6월 노퍽과 서퍽의 징수 위원을 역임했다.

1231년 윌리엄 2세 마셜이 사망하자 그가 남긴 유언장을 집행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윌리엄 2세에게 자녀가 없었기에 남동생인 리처드 마셜의 직위 및 영지 계승이 확인될 때까지 펨브로크셔를 지켰다. 1233~1234년 리처드 마셜이 헨리 3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를 지지하지 않았으며, 1234~1235년 왕실에 종종 방문했다. 1235년경에 사망했고, 아들 존 4세가 직위와 영지를 물려받은 뒤 존 3세의 영토에서 주요한 것으로 간주되는 서머싯의 하셀비 영주로서 헨리 3세에게 경의를 표했다.

3. 가족

  • 힝엄의 앨리스(? ~ 1267): 힝엄의 영주 휴버트 4세 드 리의 딸.
    • 존 4세 마셜(? ~ 1242): 아일랜드 원수, 워릭 백작(아내 마거릿 드 보몽의 권리로)
    • 앨리스 마셜(? ~ 1272년 이전): 크루 가문의 남자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