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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셉 E. 존스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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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셉 E. 존스턴
Joseph E. Johnston
파일:Joseph_Johnston.jpg
본명 조셉 에글스턴 존스턴
Joseph Eggleston Johnston
출생 1807년 2월 3일
미국 버지니아주 팜빌
사망 1891년 3월 21일 (향년 84세)
미국 메릴랜드주 볼티모어
복무 미합중국 육군
아메리카 연합 육군
최종 계급 아메리카 연합군 대장
복무 기간 1829년 ~ 1861년 (미합중국)
1861년 ~ 1865년 (미연합국)
학력 미국육군사관학교
서명
파일:Signature_of_Joseph_Eggleston_Johnston_(1807–1891).png
1. 개요2. 생애
2.1. 남북전쟁 이전2.2. 남북전쟁
2.2.1. 동부전선 사령관2.2.2. 서부전선 사령관2.2.3. 애틀랜타 전역2.2.4. 복귀 및 종전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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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 아메리카 연합국의 군인. 남부연합군의 주요 야전군사령관 중 하나였다.

2. 생애

2.1. 남북전쟁 이전

로버트 E. 리와 미국육군사관학교 1829년 졸업 동기이다. 46명 중 13위라는 좋은 성적으로 졸업한 뒤 포병 소위로 임관했다. 1837년 잠시 군대를 그만두었다가 1838년 복귀했고, 미국-멕시코 전쟁에서 육군총사령관 윈필드 스콧의 참모로서 베라크루즈 함락에 참전했다. 차풀라텍 전투 등에서 활약하며 스콧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조카 프레스턴 존스턴이 전사하며 슬픔을 겪기도 했다. 전시 계급으로서 대령이 되었지만 전쟁 뒤 대위로 돌아갔는데, 1850년대 동안 전시 계급을 되찾는 것을 요구했다가 당시 전쟁장관 제퍼슨 데이비스에게 거부되어 악연을 쌓았다. 와이오밍 지역에서 수족과 싸우고 '피흘리는 캔자스'의 치안 유지에 관여했으며, 이 때 나중에 적으로 만나는 후배 조지 B. 매클레런과 친해졌다.

1860년 로버트 리, 앨버트 시드니 존스턴 등의 후보를 제치고 미육군 병참감이 되어 준장 계급장을 달았는데, 이로서 육군사관학교 출신 중 처음으로 미국 육군에서 장성이 된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존스턴은 지휘관 보직을 받고 싶어하여 병참감 자리를 썩 달가워하지 않았다. 에이브러햄 링컨의 대통령 당선으로 남부의 분리독립 움직임이 강해지면서 남부 버지니아 출신 존스턴도 압박을 받았지만, 연방정부의 업무를 공정하게 처리하고 남부를 위해 사보타주하지 않았다고 평가된다.

2.2. 남북전쟁

2.2.1. 동부전선 사령관

1861년 버지니아주가 연방 탈퇴를 선언하자 존스턴 또한 사임했는데, 그는 남군에 가담한 연방군 장교들 중 가장 높은 계급이었다. 처음에는 버지니아주 민병대 소장이었다가 로버트 리에게 밀려나 남부연합군 준장이 되었다. 7월 제1차 불 런 전투에서 P. G. T. 보우리가드와 함께 남군의 승리를 이끌었다. 8월 남부연합 최초의 대장 5인 중 하나가 되었지만, 존스턴은 전쟁 직전 자신보다 계급이 낮았던 리와 앨버트 존스턴, 새뮤얼 쿠퍼보다 서열이 낮은 것에 불만족스러워했다. 이는 이후 제퍼슨 데이비스 남부연합 대통령과의 지속적인 갈등으로 이어졌다.

남부연합의 동부전선 주력군 북버지니아군의 전신인 남군 포토맥군의 사령관을 맡게 되었다. 1861년 가을부터 겨울까지는 연방군과 남군 모두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1862년 3월 존스턴은 워싱턴에 근접한 위치를 포기하고 먼저 후퇴했는데, 데이비스는 이에 불만족스러워하여 로버트 리를 대통령 군사고문으로 임명하고 존스턴을 직접 제어하려 시도했다. 한편 존스턴과 대처하던 북군의 조지 매클레런은 원래 존스턴의 남쪽에 병력을 상륙시켜 포위하는 작전을 구상했다가 존스턴이 먼저 후퇴하며 좌절되었다. 이에 매클레런은 아예 남부연합 수도 리치먼드의 남동쪽 버지니아반도에 주력군을 상륙시키는 작전을 제안하고 링컨 대통령의 승인을 받아냈다.

이렇게 시작된 반도전역(Peninsula Campaign)에서 매클레런의 연방군은 반도 남동쪽 끝 포트 먼로에 군대를 상륙시키고 북서쪽으로 전진했다. 존스턴은 매클레런에 비해 병력이 절반 정도로 열세였던 것을 알고 있었고, 반도 양쪽의 강과 바다 또한 연방 해군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리치먼드 주변의 방어 시설까지 후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5월 말에는 연방군이 리치먼드 6마일 앞까지 진격했다.

존스턴은 매클레런의 병력이 치카호미니 강에 의해 분단된 것을 기회로 세븐 파인즈 전투에서 매클레런을 먼저 공격했지만 전투 첫 날 어깨에 중상을 입었다. 데이비스 대통령은 이를 기회로 존스턴을 더 공격적인 로버트 리로 교체했고, 리는 적극적인 공세로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매클레런을 반도 끝으로 몰아내고 리치먼드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제2차 불 런 전투까지 승리를 거두면서 리는 동부전선 사령관으로서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입지를 굳혔다.

2.2.2. 서부전선 사령관

1862년 11월 존스턴은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서부 군관구(Department of the West) 사령관이 되었는데, 명목상으로는 브랙스턴 브래그의 테네시군과 존 C. 펨버튼의 빅스버그 수비군을 휘하에 두고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각 부대를 지휘하는 브래그나 펨버튼의 자율권이 더 크고 존스턴은 감독 역할에 더 가까운 자리였다. 존스턴은 미시시피강 서부의 테오필루스 홈즈 휘하 부대를 동쪽으로 옮겨와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지만 정부를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

휘하 군단장들과 불화가 심각하던 브래그의 부대를 감찰했지만 자신이 브래그의 대체자로 유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존스턴은 명예를 지키기 위해 브래그에 대한 좋은 보고를 데이비스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존스턴 자신 또한 부상 후유증에 시달렸기에 브래그는 결국 치카모가 전투와 채터누가 전역까지 유임되었다.

1863년 봄 율리시스 S. 그랜트 빅스버그 전역에서 우회기동으로 펨버튼 휘하 남군을 혼란에 빠트리며 빅스버그로 전진했고, 5월 9일 존스턴은 당장 빅스버그를 구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미시시피주 주도 잭슨에 도착한 존스턴 휘하 병력은 6,000명에 불과했고, 존스턴은 연방군 2개 군단의 공격을 피해 북쪽으로 후퇴했다.[1] 그랜트는 그대로 잭슨을 점령하고 펨버튼을 야전에서 거듭해서 격파한 뒤 빅스버그를 포위했다. 펨버튼과 합류하고자 했던 존스턴은 펨버튼에게 도시를 포기하고 병력을 보존할 것을 요구했지만 펨버튼은 데이비스 대통령에게서 빅스버그를 절대사수하라는 명령을 받은 상태였다. 5월 말 약 24,000명의 병력을 가졌던 존스턴은 병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구원을 망설였고, 결국 7월 4일 펨버튼의 수비대는 그랜트에게 항복하였다. 데이비스와 존스턴은 빅스버그 상실에 대한 책임을 서로에게 떠넘겼고 두 사람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하지만 존스턴은 군대에서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었고 남부연합 상원의원 루이스 위그폴 등 정치인 친구도 많았기 때문에 데이비스는 존스턴을 경질하지 못했다.

채터누가 전역에서 그랜트에게 패배한 브랙스턴 브래그는 12월 1일 테네시군의 지휘권을 내려놓았다. 데이비스는 로버트 리를 임시로 동부전선에서 서부로 이동시키는 것을 고려했지만 버지니아를 떠나기 싫어했던 리는 보우리가드나 존스턴을 추천했고, 보우리가드와도 관계가 나빴던 데이비스는 영 내키지 않으면서도 존스턴을 테네시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2.2.3. 애틀랜타 전역

조지아주 북서부의 철도 요충지 채터누가를 점령한 연방군은 1864년 애틀랜타를 목표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윌리엄 테쿰세 셔먼의 약 11만 대군에 맞서 5만~7만명 정도였던 존스턴의 남군은 방어에 유리한 구릉지대를 선점하여 북군의 공격을 유도하려 했다. 하지만 셔먼은 대부분의 경우 남군 방어선을 공격하지 않고 존스턴의 왼쪽 측면으로 우회했다. 존스턴은 후퇴해서 다시 고지대를 선점하고 셔먼은 다시 우회하는 양상으로 전투가 반복되었고, 존스턴은 후퇴하면서 우세한 교환비를 유지했지만 연방군의 증원까지 고려하면 병력 차이는 별로 좁혀지지 않았다. 셔먼이 공격을 선택한 6월 27일 케네소 산 전투에서는 연방군이 훨씬 큰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존스턴에게 다시 후퇴를 강요하는 데는 성공했다. 존스턴이 애틀랜타 북서쪽의 마지막 자연방어선인 채터누치 강을 포기하고 후퇴하자 데이비스 대통령은 인내심을 잃고 7월 18일 존스턴 대신 존 벨 후드를 테네시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2.2.4. 복귀 및 종전

후드가 이끄는 남군 테네시군은 애틀랜타를 지키지 못한 대신 셔먼의 후방을 계속해서 위협했다. 얼마 동안 후드를 추격하려 시도하던 셔먼은 곧 셔먼의 바다로의 행진으로 조지아주를 가로지르며 남부연합에 큰 피해를 입히기 시작했다. 셔먼을 쫓는 대신 거꾸로 테네시로 북진한 후드의 테네시군은 프랭클린-내슈빌 전역에서 조지 H. 토머스 존 M. 스코필드 휘하 연방군에게 대패하고 거의 전투력을 상실했다. P. G. T. 보우리가드와 조지아, 캐롤라이나 일대의 남군 또한 셔먼을 막지 못하고 있었다. 1865년 초 남군 총사령관이 된 로버트 리는 데이비스 대통령을 겨우 설득하여 존스턴을 복귀시켰다.

테네시군 잔여 병력 등 가용 병력을 최대한 모은 존스턴은 노스캐롤라이나까지 치고 올라온 셔먼의 대군이 분산된 틈을 타 각개격파를 시도했다. 3월 벤튼빌 전투에서 존스턴은 헨리 슬로컴의 연방군 좌익을 공격했으나 곧 셔먼이 지원군을 보냈고 존스턴은 후퇴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4월 9일 로버트 리와 북버지니아군이 그랜트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존스턴 또한 얼마 후 항복했다. 셔먼은 처음에 지나치게 관대한 조건을 내걸었다가 워싱턴의 연방정부로부터 불허당했고, 조건을 수정하여 4월 26일 공식적인 항복이 이루어졌다. 형식적으로 존스턴 휘하였던 노스캐롤라이나, 사우스캐롤라이나, 조지아, 플로리다의 약 9만 남군 병력이 항복했고, 이는 남북전쟁에서 가장 큰 규모의 항복이었다.

3. 여담

종전 뒤 셔먼과 친구가 되었으며, 고령의 나이에도 비를 맞으며 셔먼의 장례식에 참석했다가 곧 사망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남북전쟁의 모든 고위 장군들 중에서도 가장 평가가 갈리는 인물 중 하나이다. 지는 싸움을 거부하고 남부연합이 싸울 수 있도록 병력을 보존했다는 호평과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줄곧 후퇴하기만 했다는 악평이 공존한다. 그랜트와 셔먼은 존스턴을 높게 평가하여 상대하기 어려웠던 적수로 꼽았다.


[1] 윌리엄 L. 셰어나 테렌스 J. 윈스첼 등 일부 역사학자들은 존스턴의 후퇴가 지나치게 성급했다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