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ddd,#000><colcolor=#000,#ddd> 조르주 퀴비에 Georges Cuvi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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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장 레오폴 니콜라 프레데리크 퀴비에 Jean Léopold Nicolas Frédéric Cuvier |
국적 |
[[프랑스| ]][[틀:국기| ]][[틀:국기| ]] |
출생 |
1769년
8월 23일 프랑스 왕국 몽벨리아르 |
사망 |
1832년
5월 13일 프랑스 왕국 파리 |
직업 | 동물학자, 사상가 |
종교 | 개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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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동물학자이자 사상가. 당대에도 최고의 동물학자로 인정받은 뛰어난 학자였다. 특히 현대적 고생물학과 비교생물학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다. 뼈 몇개 분석해 그 동물의 식성, 서식지, 생태를 예측하는 게 이 사람부터 시작되었다. [1]2. 평가
하지만 심각한 인종차별주의자였으며 용불용설을 주장한 장바티스트 라마르크를 싫어해서 라마르크의 장례식에도 라마르크를 조롱하는 추도사를 올리는 등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었던 인물이다.퀴비에는 종의 정착 혹은 천변지이설(天變地異說, 새로운 종은 기존 종이 천재지변으로 멸종한 이후 나타난 종이라는 설)을 주장하면서 모든 생물체는 세상이 만들어진 이후 아무런 진화도 없이 처음부터 정해진 상태로 이어져 왔다고 주장하였으나,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은 생명체 진화를 근거로 퀴비에의 종의 정착 이론을 전면으로 반박하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그는 라마르크를 경멸했다. 물론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은 다윈의 자연 선택설로 인해 폐기된 이론이고 인간의 직관적 함정에 빠진 이론이기는 하나 그 나름대로 생명체는 끊임없이 진화하면서 생존했다는 최조의 진화론적 관점을 제시했다는 의의가 있다. 그에 비해 퀴비에의 종의 정착 이론은 사실상 성경의 창조론에 근거한 것으로, 과학적인 의의는 라마르크의 용불용설보다 없었다.
그렇다고 이걸로 퀴비에를 시대착오라고 비난할 순 없다. 라마르크가 당대의 과학지식의 한계에 비해 너무 많이 앞서나갔을 뿐, 당시는 종은 변하지 않는다가 상식이었고 정설이었다. 이 당시 과학의 한계를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가 이집트 유적지에서 발견된 고대 따오기 미라의 분석 결과였다. 퀴비에의 분석 결과로는 수천년 전의 따오기가 당시의 따오기와 완전히 똑같았다. 뉴턴조차도 지구의 나이가 5만년 이상이라는 예상을 할 정도였으니 18세기 말에는 수천년이면 어마어마한 시간이라고 인식되었고 이 분석 결과는 진화를 부정하기에 충분한 근거였다.
흑인은 백인과 다른 짐승이라고 자신했다가 사키 바트만을 해부하곤 실망하듯이 '흑인도 백인이랑 장기와 모든 것이 똑같다....'라며 마지못해 사람이라고 인정한 일도 있었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