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조르주 무스타키 Georges Moustaki |
|
본명 |
주세페 무스타키 Giuseppe Mustacchi |
출생 | 1934년 5월 3일 |
이집트 왕국 알렉산드리아 주 알렉산드리아 | |
사망 | 2013년 5월 23일 (향년 79세) |
프랑스 니스 | |
국적 |
[[프랑스|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배우, 싱어송라이터 |
활동 | 1952년 ~ 2013년 |
1. 개요
[clearfix]
1. 개요
프랑스의 가수, 배우.조르주 무스타키.[1]
지금의 50대와 60대에게 그의 이름은 아련한 추억과도 같다. 풍성한 턱수염, 읊조리는 나직한 목소리 그리고 그 목소리를 잘 받쳐주는 간결한 기타가락. 무스타키가 곧 샹송의 동의어로 여겨질 정도로 그는 프랑스 샹송을 대표하는 이름이었다. 그의 노래는 우리 정서와 잘 맞았고,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특히 많은 사랑을 받았던 샹송가수였다. 70년대 이른바 ‘음악다방’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 무스타키의 <마 솔리튀드>는 가장 인기좋은 애청곡 가운데 하나였다.
프랑스사람은 아니었지만 가장 프랑스적인 샹송을 부른 가수로 유명한 무스타키는 이제 예순일곱살이 되었지만 아직도 무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무스타키는 현대 샹송의 아버지격으로 인정받는 조르주 브라상과 레오 페레의 뒤를 이었던 인물. 에디트 피아프의 노래를 작곡하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프랑스 국내에서는 에디트 피아프나 이브 몽탕이 세계적으로 유명해도 국제적인 샹송을 부른 데 비해 무스타키는 프랑스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프랑스적인 샹송을 부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어느덧 고희를 바라보는 이 노장을 지난 6월16일 <한겨레21>이 직접 만나봤다. 모처럼 조국 그리스를 찾은 무스타키를 만난 곳은 아테네 한 호텔에서였다. 직접 만난 무스타키는 세계적인 가수인데도 수수한 태도나 소박한 차림새가 골목 귀퉁이에서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아저씨 같은 인상이었다. 처음에는 단답식으로 짧게 답하다가 음악에 관한 질문이 나오고부터는 자신이 더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예술가적인 본능을 보여줬다.
-그리스인이지만 출생지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란 점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열일곱살까지 알렉산드리아에서 자랐습니다. 어린 시절은 아주 행복했는데 사랑과 햇빛 그리고 자유가 충만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비록 전쟁(2차대전)중이었지만 내 어린 시절을 훼손시키지는 못했죠. 마치 영원한 놀이를 하는 듯했습니다. 학교를 프랑스학교로 진학했고 그뒤 다시 프랑스로 건너갔기 때문에 사실 제 문화는 프랑스문화입니다. 그래서 사실 그리스사람이지만 그리스어는 못해요.
-언제부터 음악을 하셨습니까.
=스무살 때부터 연주를 시작했고, 그때부터 노래를 만들어왔습니다. 작사나 작곡, 연주 모두 우연히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처음 한번 해본 건데 남들이 계속하라고 했어요. 내 결정은 아니었습니다. 무대에 처음 선 것도 1969년이었으니까 서른다섯살 때였습니다.
-처음 발표한 음반 <르 메테크>(Le meteque)은 이방인이란 뜻인데 당신과 상당한 연관이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그뒤의 음악세계와도 연결이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거의 맞아요. 물론 지금은 프랑스국민이지만 당시 나는 이민자였고 이방인이었습니다. 노래는 사랑에 대한 것이었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이방인으로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의 이미지에 대한 것이죠. (대답을 마치고 그는 노래말 중에서 한 구절을 조렸다. “스무살의 아가씨, 두려워 마오. 비록 내가 이방인처럼 보일지라도…”라는 구절이었다.)
-음악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폭넓고 다양한 음악인들과 교류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저를 음악세계로 이끈 이는 조르주 브라상이었습니다. 그는 위대한 시인이며 음악가로 나에게 많은 자극을 줬습니다. 존경하는 가수는 상당히 많은데 먼저 에디트 피아프를 꼽을 수 있습니다(조르주 브라상은 시인이고 사회주의자였기 때문에 우리나라에는 음반이 소개되지도 못했다. 무스타키에게는 거의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에디트 피아프와는 특별한 관계였는데 그때 이야기를 좀 해주세요.
=너무 많은 기억을 갖고 있어서 짧은 시간에 피아프에 대해 말하기가 어렵군요. 그 이야기는 책 한권은 나올 겁니다. 무대에서 그는 위대했습니다. 내가 만났던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당신 노래가 많은 사랑을 받은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멜로디가 그 이유라고 봅니다. 제 생각에 사람들이 비틀스를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멜로디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제 자신을 전통적인 멜로디 작가라고 생각하고 있고, 음악에서는 멜로디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르 메테크> 같은 작품이 지금 나왔어도 성공했을 거라고 믿으십니까.
=당연하죠. 언제나 승자는 멜로디입니다. 훌리오 이글레시아스를 예로 들면 그의 노래가 성공한 것은 유행이 아니라 멜로디 때문입니다. 프랑스가수 앙리 살바도는 84살인데 지금도 그의 아름다운 목소리와 멜로디 덕분에 음반이 수십만장씩 팔립니다. 디스코테크 음악은 유행을 따르지만 멜로디가 있는 음악은 시간을 초월합니다.
-예전 음악과 지금 당신의 음악을 비교하면 무엇이 변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변하긴 변했다고 생각하지만 완전히 달라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변했다면 먼저 저 자신이 변했죠. 나이가 들었으니까. 평생 수많은 나라를 방문했고 많은 음악가를 만났습니다. 특히 테오도라키 같은 많은 음악가들과 함께 일하기도 했습니다. 그때마다 제 음악적 심성 속에서 뭔가 일어납니다.
-노래를 만들 때 특히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있습니까.
=없어요. 단지 감정을 따르는 겁니다. 그건 어떤 종류의 감정일 수도 있어요. 그냥 감정에 자신을 맡기는 겁니다.
-늘 서정적인 음악을 해오셨습니다. 헤비메탈 같은 다른 음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음악을 사랑합니다. 단 그것이 음악일 때. 물론 그 음악이 록일 수도 있고 서정적인 음악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음악적이 아닐 때는 싫어합니다. 저는 하드록은 좋아하지 않는데 음악수준이 너무 폭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아프리카음악은 똑같이 폭력적이긴 해도 좋아합니다. 깊은 감정을 담아내고 있으며 전자음에만 의존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데 요즘 일정은 어떻습니까.
=곧 독일에서 콘서트 여행이 잡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밖에도 스페인, 브라질, 캐나다와 미국까지 올해 콘서트 일정이 다 잡혀 있어서 무척 바쁩니다.
-은퇴를 생각해보신 적은 있습니까.
=아직은 계획이 없습니다. 단지 제가 좋아하기 때문에 합니다. 처음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어렸을 적에 당신의 노래 <마 솔리튀드>를 듣고 자랐고, 한국에 당신 팬이 많습니다. 한국을 여러 차례 방문했는데 어떤 느낌을 받으셨나요.
=1985년에 처음 방문했고 두번을 더 방문했습니다. 음악회에서 아주 훌륭하고 이해력이 깊은 청중을 접했습니다. 프랑스어를 아주 잘 이해하는 듯이 제 노래를 아주 잘 알고 있었어요.
-세계를 두루 다녀보았을 텐데 느낌이 나라마다 다 다를 것 같습니다. 동양 나라들은 어떻게 다르던가요.
=중국은 빼고 한국과 일본은 모두 가봤습니다. 그리고 한국과 일본은 참 달랐어요. 일본이 직선적인 빅토리아풍이라고 한다면, 한국은 지중해풍이라고 할까. 한국사람들은 표현이 매우 풍부하고 따뜻하고 정적인 지중해지역의 사람들과 성격이 비슷했습니다. 반면 일본사람들의 표현은 엄격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한국에 대해서 매우 좋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에 다시 초청을 받는다면 물론 응할 생각입니다.
[1]
하영식기자, 한겨레21, 2001-0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