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팔루자 전투 معركة الفلوجة الأولى First Battle of Fallujah / Operation Vigilant Resolve |
|
이라크 전쟁의 일부 | |
2004년 4월 1일 ~ 5월 1일 | |
장소 | |
|
|
교전국 및 교전 세력 |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이라크
알카에다 이라크 이슬람군 |
지휘관 | |
제임스 매티스 제임스 콘웨이 |
아부 무사브 알자르카위 |
병력 | |
미합중국 해병대 블랙워터 |
유일신과 성전 |
피해 | |
27명 전사 | 184~228명 전사 |
결과 | |
미국의 승리 |
[clearfix]
1. 개요
2004년 4월 1일부터 5월 1일 사이에 발생한 미국과 이라크 반군들 간의 전투이다.2. 배경
2004년 3월 31일 아침 미 육군 제1보병사단 1공병대대가 미 육군 제82공수사단과 민간군사기업 블랙워터가 사용할 보급로에서 지뢰제거 제거작업을 수행하다 당시로선 가장 큰 규모의 급조폭발물(IED)이 폭발하는 사고로 1공병대대 B중대원 5명이 전사했다. 같은 날 이라크 반란군이 미군에 식자재 군납을 담당하는 민간 군사기업 ESS의 보급 트럭 호송 차량의 창문에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총 사격을 가해, 호송 차량에 탑승한 블랙워터사 직원 4명이 사살됐다.[1] 반란군은 사살된 용병들의 시신을 불에 태우는가 하면, 차량에 메달고 길에 끌고 다니다가 유프라테스 강 다리에 매달아 전 세계적인 공분을 불러 일으켰다.[2] 이 사건에 분노한 미국 정부는 즉시 팔루자에 대한 평정 계획을 발표했다.3. 전개
2004년 4월 1일 당시 이라크 주둔 다국적 지상군 사령부인 제7연합합동 기동부대(CJTF-7) 사령부 작전차장, 마크 키미트(Mark Kimmitt)[3] 육군 준장은 블랙워터 직원들이 사망한 사건에 대한 "압도적인" 대응을 약속했고, "우리는 그 도시를 평정할 것(We will pacify that city.)"이라고 언급했다.2004년 4월 3일 미 해병대 제1해병원정군(I MEF)은 제7연합합동 기동부대(CJTF-7) 사령부로부터 팔루자 공격 명령서를 하달 받았다. 이 명령서는 살해 용의자에 대한 외과적 정밀 공습과 용의자에 대한 소규모 기습 체포 작전을 원했던 미 해병대 지휘관들의 바람과 달리 대규모 시가전에 대한 명령서였다. 2004년 4월 4일 밤 미 해병대 제1해병원정군 사령관 제임스 콘웨이와 미 제 1 해병사단장 제임스 매티스[4], 미 제1해병연대장 존 A. 툴란이 지휘하는 미 해병대 제1연대전투단(RCT)의 병력 2천명이 야간 공습과 함께 팔루자에 대한 공격 작전을 시작했다. 이날 공습으로 4채의 가옥이 공습으로 무너졌고, 밤새 산발적인 총격전이 있었다.
2004년 4월 5일 아침까지 공격부대는 주요 도로와 라디오 방송국 등 중요 거점을 확보하고, 도시를 완전히 봉쇄했다. 작전 첫 날 팔루자 거주 민간인의 1/3이 도시 밖으로 피난을 떠났고, 도시에 남은 주민들에게는 집 밖으로 나오지 말고 집 안에 머물도록 전단지를 살포했다. 이에 맞서는 이라크 저항 세력은 RPG, 기관총, 박격포 및 대공 무기로 무장한 12~24개의 무장 파벌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후 이어진 3일 간의 전투에서 미군은 주요 반군거점에 미 공군 AC-130 건쉽으로 정밀 공격을 가했고, 미 해병대 정찰저격병들은 각자 평균 31명을 저격하여 작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심리작전을 수행하는 제910전술심리작전 파견대는 AC/DC와 메탈리카 같은 미국 헤비메탈 음악(AC/DC는 호주 밴드이다.)을 크게 틀고, 반군을 도발하는 내용의 방송을 하여 반군의 사기를 꺽었다. 3일 간의 전투 후 미군은 도시의 25%를 장악했고, 전투는 중단됐다.
2004년 4월 12일 미군은 봉쇄를 풀고 이라크 정부와 구호단체의 구호물자 공급을 허가했다. 이 시점까지 600여명의 이라크인 사망했는데, 이 중 절반이 비무장한 민간인이었다. 4월 13일 미 해병대가 모스크에 있던 반란군의 공격을 받아, 근접항공지원으로 저항거점을 공습했다. 4월 15일 미 공군의 F-16 파이팅 펠콘 전투기가 팔루자 북부에 2,000파운드(910Kg) JDAM 폭탄을 투하했다. 4월 27일 저항세력의 공격이 시작되어 근접항공지원을 실시했다. 4월 28일에는 미 해군 제11, 131, 136, 143전투비행대대가 미 해병대 제1해병원정군에 대한 근접항공지원을 실시하여 13발의 GBU-12 페이브웨이 II 폭탄을 투하했다.
5월 1일 미 해병대 제1해병원정군 사령관 제임스 콘웨이 해병 중장은 작전 종료를 발표하고, 작전지역을 CIA에 의해 새로 창설된 수니파 팔루자 여단에 인계한 후 작전부대를 팔루자 인근 주둔지로 복귀시켰다. 하지만 며칠 뒤 팔루자 여단의 여단장이 사담 후세인의 수니파에 가담하는 바람에 여단장이 교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루자 여단은 반군에 가담하는 장병이 계속 늘어나서 9월에 이르러서는 여단의 모든 병사들이 성전주의와 민족주의 반군에 가담하여, 미국제 무기가 모두 반란군에 넘어가고 급기야 여단이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이는 결국 후일 2차 팔루자 전투로 이어진다.
제1차 팔루자 전투에서 미군 전사자는 27명, 전투 중 사망한 이라크인은 800여명이다. 전투 중 사망한 이라크인 중 572~616명은 비무장 민간인이었고,184~228명이 무장한 반군이었다.
[1]
식자체 납품업체 직원은 당연히 아니고 그냥 미군 특수부대 출신의 용병 4명이다. 이들은 미국에서 계약 맺을 때 VIP 경호 업무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규정상 호송시 차량 2대에 각 3명씩 6명의 용병이 투입되어야 했으나 경비를 아끼기 위해 4명만 투입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동차도 일반차를 사용하여 방어력이 크게 떨어진 상황이었다.
[2]
다만 반란군들이 아무 이유 없이 한 짓은 아니었는데, 당시 용병들이 저지르는 대민범죄가 굉장히 심각한 수준이었다. 부시 대통령의 포괄적 면책조치로 처벌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때 피살된 용병 4명은 이라크에 투입된 뒤 이 때 맡았던 임무가 첫번째 임무였기 때문에 대민범죄를 저지른 당사자들은 아니었다. 그래서 명백한 전쟁범죄인것이다. 반군 입장에서야 이놈이든 저놈이든 꼴보기싫은 미군이라 여겨 그런것이겠으나 결과적으로는 미군이 더 강력하게 날뛸 명분을 만들어다 바친 셈이다.
[3]
1954년생. 2007년 준장 전역 후에 국무부에서 근무했다.
[4]
둘 다 4성장군까지 진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