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3-20 22:30:31

제태공

파일:제 전서체.png
전제(田齊) 국군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ece5b6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181818,#e5e5e5
전씨종주(田氏宗主)
초대 종주

경중
2대 종주

맹이
3대 종주

맹장
4대 종주

문자
5대 종주

환자
6대 종주

무자
7대 종주

희자
8대 종주

성자
9대 종주

양자
10대 종주

장자
11대 종주

도자
전씨대제
전제(田齊) 국군
초대 국군

태공
2대 국군

제후 섬
3대 국군

환공
초대 왕

위왕
2대 왕

선왕
3대 왕

민왕
4대 왕

양왕
5대 왕

제왕 건
초한쟁패기
교동왕 전시 | 제왕 전도 | 제북왕 전안
삼황오제 · · · · 춘추시대 · 전국시대 · 진(秦) ·
삼국시대 · 진(晉) · 오호십육국 · 북조 · 남조 · ·
오대십국 · · 서하 · · · · ·
중화민국 국가원수 · 중화민국 총통 · 중화인민공화국
}}}}}}}}}}}}}}}

전제 초대 국군
태공
太公
규(嬀)[1]
전(田)[2]
화(和)
아버지 전장자(田莊子) 혹은 전도자(田悼子)[3]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384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391년 ~ 기원전 384년[4]
기원전 386년 ~ 기원전 384년[5]

1. 개요2. 즉위 전3. 즉위 후

[clearfix]

1. 개요

전씨 제나라(田齊)의 초대 군주. 전장자(田莊子) 혹은 전도자(田悼子)의 아들. 그는 고조부 전항, 증조부 전반, 조부 전백, 아버지 전도자의 기반을 바탕으로 제나라의 상국이 되었다.[6] 그것을 바탕으로 제강공을 몰아내고 강제를 차지해 전제의 초대 군주가 되었다.

2. 즉위 전

제 선공 51년(기원전 405년), 전화는 아버지 혹은 형 전도자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제 강공 원년(기원전 404년), 삼진(한•위•조)이 제나라의 장성을 쳤다. 제나라의 장성은 서쪽에는 방문(현재의 산동성 비성), 동으로는 바다에 이르렀다. 그 장성은 산맥을 따라 지어졌다. 장성을 쌓는 일은 전화가 주도하였으므로 제선공은 허수아비였다. 제 선공이 죽고 제 강공이 즉위했는데, 전씨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제강공은 주색을 즐기고 품행이 좋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7]

아무튼 그것을 이유로 전화는 제 강공 19년(기원전 391년)에 제강공을 바닷가로 몰아내고, 식읍으로 성 1개를 딸려 주었다. 그리고 강성 제나라(姜齊)의 제사를 잇게 하고 자신이 전씨 제나라의 군주가 되어 제 태공이라고 불렸다.[8]

3. 즉위 후

제 태공 2년(기원전 390년)[9], 제나라는 위나라를 쳐서 양양을 취했다.[10] 그러나 오래지 않아 위문후, 초도왕과 충택 땅에서 회맹해 군주로 인정받았고, 위 문후가 주안왕의 허락을 구했다.

제 태공 6년(기원전 386년), 주 안왕은 제 태공을 정식으로 제나라 군주로 인정했다.

제 태공 8년(기원전 384년), 전화가 죽고 아들인 전섬(田剡)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제후 섬(齊侯剡)이다.


[1] 조상 진완(陳完) 진(陳)나라의 공족이므로 규성이다. [2] 원래는 전씨가 아니라 진(陳)씨다. 조상 진완(선술한 인물과 동일 인물)의 이름이 발음이 변하여 전완(田完)이 되었다고 한다. [3] 전도자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4] 제 강공을 몰아낸 때를 기준으로 했을 시 [5] 주나라로부터 인정받은 때를 기준으로 할 시. [6] 당시 전씨의 세력이 커서 상국 자리를 사실상 전씨가 물려받았다. [7] 즉 전씨가 강제를 멸하고 전제를 세운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프로파간다이므로 필터링해서 봐야 한다는 말이다. [8] 다만 강제가 형식적으로는 남아있었기 때문에 형식상으로는 전제는 강제의 신하국이다. [9] 이 문서에서는 제 강공을 몰아낸 때를 기준으로 표기한다. [10] 형주의 양양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