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주제 프로코피우 멘지스 (José Procópio Mendes) |
생년월일 | 1913년 8월 12일 |
사망년월일 | 1980년 2월 8일 (향년 66세) |
국적 | 브라질 |
출신지 | 브라질 합중 공화국 바르지냐 |
포지션 | 하프백 |
신체조건 | 187cm | 82kg |
소속팀 |
빌라 노바 AC (1932-1936) 아틀레치쿠 미네이루 (1937-1938) 보타포구 FR (1938-1942) SE 파우메이라스 (1942-1943) 상파울루 FC (1944) SE 파우메이라스 (1945-1948) |
국가대표 | 20경기 0골 (1938-1946) |
감독 |
코메르시알 (1958) 보타포구 FC (1962) 이스포르치 지과라팅게타 (1963) 상카를루스 (1967-19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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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라질의 전 축구 감독.2. 생애[1]
2.1. 어린 시절
프로코피우는 어린 시절에 요리 보조로 일하면서 과라니 다라고이냐(Guarani da Lagoinha)에서 축구를 했다.2.2. 선수 생활
2.2.1. 클럽
프로코피우는 모호 벨류(Morro Velho) 광산에서 일하면서 빌라 노바 AC에서 본격적으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빌라 노바에서 프로코피우는 1932년부터 캄페오나투 미네이루 4년 연속 우승의 금자탑을 쌓았다.1937년에 아틀레치쿠 미네이루로 팀을 옮긴 프로코피우는 1월 13일 플루미넨시 FC와의 경기에서 팀에 데뷔했다. 프로코피우는 1938년, 보타포구 FR로 다시 이적했고 그 곳에서 4시즌을 보냈다.
1942년, 프로코피우는 SE 파우메이라스에 새로 합류했고 선수 생활의 마지막까지 이곳에서 보냈다. 1948년까지 그는 파우메이라스에서 107경기에서 1골을 넣었고 두 번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챔피언이 되었다.
2.2.2. 국가대표
프로코피우의 셀레상 데뷔전은 1938년 월드컵 1라운드 폴란드전이었다. 이 명승부에서 브라질은 폴란드를 연장 승부 끝에 6대5로 따돌리고 8강 진출을 확정지었다.다음 상대는 체코슬로바키아. 보르도의 전투로 지금까지 악명 높은 경기의 서막을 프로코피우가 열었는데 그는 전반 14분, 지난 대회 득점왕이자 체코슬로바키아의 간판 공격수였던 올드르지흐 네예들리를 볼과 상관 없이 가격했고 주심은 프로코피우에게 즉각 퇴장을 명령했다. 프로코피우는 이렇게 브라질 축구 역사상 최초의 FIFA 월드컵 퇴장 선수로 남게 되었다. 이 혈전에서 브라질은 체코슬로바키아와 1대1로 비겼고 프로코피우는 재경기에 뛸 수 없었다. 그래도 프로코피우는 남은 경기들에 출전, 브라질의 3위에 공헌했다.
프로코피우는 셀레상으로 총 20경기에 나섰으며 월드컵 3위와 1946년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준우승의 성과가 있었다.
2.3. 이후
선수 경력을 마친 후 프로코피우는 감독 생활을 했지만 큰 성과는 없다.3. 수상
3.1. 클럽
- 캄페오나투 미네이루 우승 5회: 1932, 1933, 1934, 1935(이상 빌라 노바 AC), 1938( 아틀레치쿠 미네이루)
-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우승 2회: 1942, 1947( SE 파우메이라스)
3.2. 국가대표
- FIFA 월드컵 3위 1회: 1938
-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준우승 1회: 1946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