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문 배경
영민한 발명가 제이스는 필트오버의 수호와 진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필트오버의 영웅이다. 마법공학 변신 해머를 전용무기로 사용하는 그는 자신의 힘과 용기, 지능을 언제든 조국을 위해 바칠 각오가 되어있다. 필트오버의 전 국민이 제이스를 영웅으로 추대하지만 정작 그는 이러한 관심을 반기지 않는다. 그에 대한 국민들의 칭송과 감탄이 적을 도발할 수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조국에 대한 제이스의 충성심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그의 능력을 시기하는 이들조차 진보의 도시를 수호하는 제이스의 노고에 감사를 표한다. 제이스는 필트오버가 낳은 영웅답게 ‘발명하라, 발견하라, 될 수 있으면 자운에 가지 마라’는 필트오버의 원칙을 성실하게 지키며 성장했다. 그는 특히 기계를 다루는 재주가 뛰어나서 필트오버의 권위 있는 가문 지오파라로부터 기능장 후원 제안을 받은 최연소 견습생이 되는 영예도 누렸다. 제안을 받아들인 후 어린 시절 대부분은 마법공학 기계장비들을 설계하며 보냈다. 제이스는 또한 필트오버의 노동자 계급이 사용할 수 있도록 변신 도구들을 발명하기도 했다. 쇠지레로 변하는 렌치, 삽으로 변하는 곡괭이, 폭파 레이저로 변하는 해머 등은 축전지만 있으면 언제든지 변신이 가능했다. 그러나 제이스의 뛰어난 발명품을 보며 동시대인들은 부러움과 동시에 자괴감을 느꼈다. 제이스는 모든 문제를 너무나 쉽게 해결했기 때문에 동료들이 왜 간단한 문제들을 어려워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동료들은 제이스가 거만하고 오만하다고 생각했으며 남을 전혀 배려하지 않고 자기 속도대로 일하는 그의 태도에 불만을 가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동료들에 대한 제이스의 인내심도 바닥이 나기 시작했고, 제이스를 만나 본 사람들은 더 이상 그를 예의 있고 매력적인 남자로 여기지 않았다. 제이스에 필적할 만큼 지능이 뛰어날 뿐 아니라 그의 거만한 태도에도 별로 개의치 않는 자가 딱 한 명 있기는 했다. 그의 이름은 빅토르였다. 제이스와 빅토르는 진보의 날 파티에서 처음 만났다. 사람 많고 떠들썩한 파티장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았던 둘은 금세 가까워졌다. 그러고는 곧 함께 작업을 시작했다. 빅토르는 제이스가 지식을 확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때로는 제이스의 생각에 반대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제이스는 다양한 기술을 통해 인류의 발전을 이루고자 했고, 빅토르는 인간의 유한함이나 비논리적인 편견 등 인류 자체에 내재된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했다. 제이스와 빅토르는 자주 언쟁을 벌였지만 둘 사이의 갈등이 서로에 대한 사사로운 불만이나 미움으로 번진 적은 없었다. 목표에 도달하는 방법은 다를지 몰라도 궁극적인 목표는 같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제이스와 빅토르 모두 동료들에게 배척당하는 설움을 겪어본 적이 있었다. 빅토르는 통념을 벗어나는 생각 때문에, 제이스는 무례함 때문에 동료들로부터 외면을 당했다. 제이스와 빅토르는 힘을 합쳐 필트오버의 부두노동자들을 위한 기계 작업복을 만들었다. 이 작업복은 누구나 체력이 증대되는 효과를 누릴 수 있었고, 무게가 가벼워서 입은 채 물에 빠진다 해도 가라앉을 위험이 없었다. 둘의 관계가 틀어진 건 빅토르가 화학 물질을 주입한 새 작업복을 선보였을 때였다. 빅토르는 자신이 새롭게 개발한 작업복을 입으면 체력이 열 배나 증대될 것이며 피곤함이나 공포심을 느끼지 않을 거라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무엇보다 작업복을 입은 노동자는 상급자의 지시에 언제나 복종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빅토르는 작업 중 발생할 수 있는 사고를 상당 부분 줄일 수 있을 거라며 즐거워했지만 제이스의 생각은 달랐다. 제이스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위적으로 막는 것은 부도덕한 행위라고 생각했다. 제이스와 빅토르는 작업복을 어떻게 설계하느냐를 두고 치고받고 싸울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결국 제이스는 빅토르가 만든 위험한 작업복을 학술원에 보고했고, 빅토르는 이제껏 쌓아온 모든 명예를 잃고 필트오버의 과학계에서 추방되었다.빅토르는 제이스가 사귄 유일한 친구나 다름없었다. 빅토르와 사이가 갈라진 뒤 상심에 빠진 제이스는 예전처럼 혼자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더욱 배타적으로 변했으며 타인에 대한 인내심도 더 줄어들었다. 제이스가 홀로 쓸쓸히 연구를 하고 있던 어느 날, 지오파라 가문의 탐험가들은 슈리마 사막 깊은 곳에서 푸른빛을 띄는 희귀한 수정을 발견했다. 제이스는 지오파라의 과학자들이 그 수정을 제대로 감식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 수정을 연구해주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감식은 쉽지 않았고 지오파라 가문은 제이스를 질책하며 지오파라의 저명한 과학자들에게 연구를 의뢰했다. 수 개월간 연구를 진행한 과학자들은 그 수정이 아무 가치도 없는 쓸모 없는 물건이라고 입을 모았다. 에너지가 다 빠져나가 버린 돌멩이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들의 결론이었다. 지오파라의 지도자들은 실망하여 그 수정을 다시 제이스에게 가져다 주었다. 그들은 제이스의 지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그가 수정으로 뭔가를 할 수는 없을 거라고 장담했다. 결국 수정은 다시 제이스의 손에 들어왔다. 그러던 어느 날, 수정이 제이스에게 말을 걸어왔다. 마치 수정 안에 있는 무언가가 노래를 부르는 것 같았다. 순간 제이스는 수정 안에 아직 밝혀지지 않은 비밀이 담겨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는 수 개월 동안 온갖 방법을 동원해 수정을 실험했다. 수정을 원심분리기에 넣어 보기도 하고, 고열을 가하거나 꽝꽝 얼려보기도 했다. 만지작거리다가 유심히 관찰 해보기도 했고 수정에 관한 나름의 가설도 세웠다. 너무 답답해서 구리로 된 제도기에 자신의 머리를 박아본 적도 있었다. 사실 제이스는 언제나 쉽게 답을 찾았기 때문에 무언가를 해결하기 위해 이렇게까지 고민해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수정 하나 때문에 난생 처음으로 자신의 지적 한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 것이다. 제이스는 비로소 과거에 동료들이 느꼈을 절망감을 헤아릴 수 있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한계에 부딪혀 앞이 꽉 막혀버리는 기분. 그들도 지금의 자신처럼 좌절감을 느꼈을 것이다. 심지어 그들 곁에는 오만방자한 발명가 제이스가 있지 않았던가. 그들이 느낀 절망감은 더욱 컸을 것이다. 제이스는 문득 자신이 그렇게도 무시했던 동료 과학자들 중 누구도 아직까지 연구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들은 필트오버의 가치인 진보와 발견을 위해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제이스는 다짐했다. 그들이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그리고 좀 더 친절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겠다고. 제이스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수정을 연구해 보기로 했다. 수정을 통째로 실험하는 대신 쪼개서 작은 조각을 만든 다음 그것으로 실험을 해보려는 것이었다. 그는 수정의 일부를 깎아 내어 액체 금속 안에 매달았다. 그러고는 액체에 전류를 흘려 보냈다. 순간 수정 조각에서 고막이 터질 만큼 무시무시한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수정은 열을 발산했고, 섬광이 한번 번쩍이더니 눈이 멀어버릴 만큼 밝은 빛을 냈다.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수정의 에너지가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제이스가 진보를 이루어냈다는 사실이었다. 제이스는 뿌듯해 하며 새벽까지 밤을 꼬박 새며 연구를 했다. 다음날, 예상치 못한 방문객이 제이스를 찾아왔다. 제이스의 눈 앞에는 오래 전 그의 친구였던 빅토르가 서 있었다. 빅토르는 수정 조각이 발산한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감지하고 제이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러 온 것이었다. 빅토르는 필트오버 과학계에서 추방당한 후 자운에서 비밀 연구를 시작했고, 마침내 인류의 적인 질병과 기아, 증오를 근절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됐다고 했다. 제이스가 이 연구를 도와준다면 필트오버와 자운의 모든 과학자들이 꿈꾸던 바를 두 사람이 함께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인류 자체에 내재된 문제들로부터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과학자들의 꿈 아니었던가. 빅토르는 전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지만 제이스는 한번도 빅토르의 생각에 동조하지 않았다. 빅토르는 ‘영광된 진화’를 달성하기 위해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은 단 한가지, 제이스의 수정 같은 동력원이라고 했다. 그러나 제이스는 빅토르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동력원이 아니라 도덕적 잣대라며 함께하자는 빅토르의 제안을 매몰차게 거절했다. 오래 전부터 제이스의 무례함이 거슬렸던 빅토르는 제이스에게 달려들어 그를 쓰러뜨린 뒤 수정을 강탈했다. 의식을 잃은 제이스가 몇 시간 후 깨어났을 때 수정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그러나 빅토르의 눈에 띄지 않았던 작은 수정 조각은 액체 금속 안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제이스는 빅토르가 앞으로도 서슴지 않고 이처럼 비도덕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해 자신의 연구를 완수하려 할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빅토르가 말한 ‘영광된 진화’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빅토르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통제하려 할 것이 분명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는 생각에 제이스는 서둘러 액체 금속 안에 매달아 놓았던 수정 조각을 꺼냈고, 이를 거대한 변신 해머에 장착했다. 제이스가 수 년 전에 발명한 이 변신 해머는 그 동안 초강력 배터리가 없어 사용하지 못하고 방치해 놓았던 폭파 전용 무기였다. 제이스는 빅토르가 수정을 어디로 가지고 갔는지 알 길이 없어 답답했다. 바로 그 때, 마법공학 변신 해머에서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해머는 제이스를 동서남북 그 어느 쪽도 아닌 지하도시 자운이 있는 아래쪽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본래 한 몸이었던 수정과 재결합하고자 하는 수정 조각이 제이스를 지하 깊숙한 곳으로 안내했다. 동굴 모양의 휑한 건물 안에서 제이스는 소름 끼치는 광경을 목격했다. 수십 개의 시체와 해골들이 바닥에 널려 있었고, 해골 안에 있어야 할 뇌는 부동자세의 금속 병사들에게 이식되어 있었다. 그리고 금속 병사들의 몸은 맥박이 뛰는 듯이 고동치는 수정에 연결돼 있었다. 이것이 빅토르가 말한 영광된 진화의 첫 번째 단계였던 것이다. 제이스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빅토르에게 다가갔다. 빅토르와의 관계가 언제나 좋았던 것이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완전히 달랐다. 제이스는 처음으로 오랜 친구 빅토르를 자기 손으로 죽여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제이스는 큰 소리로 빅토르를 불렀다. 로봇 군대가 일제히 부동자세를 취하는 바람에 잠시 움찔하기는 했지만 빅토르에게 충고하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제이스는 이것이 빅토르가 말하던 ‘진화’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그들이 함께 꿈꾸던 진보는 아니라고 소리쳤다. 제이스는 그간 잘난척해서 미안하다고 사과까지 했다. 빅토르는 한숨을 쉬더니 로봇 군대를 향해 짧게 명령했다. “죽여버려” 로봇 군대가 자신의 몸과 수정을 연결해 주던 선을 스스로 끊고 제이스를 향해 전속력으로 돌진했다. 해머를 단단히 고쳐 잡았지만 사실 제이스는 한번도 변신 해머를 사용해본 적이 없었다. 첫 번째 로봇이 가까이 다가오자 제이스는 이 때다 하고 온 힘을 다해 해머를 내리쳤다. 수정 조각이 발산한 에너지가 근육에 스며들어 힘이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해머의 움직임도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거칠어졌다. 해머에서 나오는 에너지가 얼마나 세던지 해머가 손에서 튕겨져 나갈 것만 같았다. 해머에 맞은 로봇은 마치 폭탄을 맞은 것처럼 수많은 금속덩어리들로 분해됐다. 그러나 다른 로봇들은 동료의 소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이스를 향해 돌진하여 그를 주먹으로 마구 내리쳤다. 제이스는 로봇군대가 동시에 돌진해 올 경우 최소한의 힘으로 최대한 많은 로봇을 쓰러뜨릴 방법을 찾으려고 머리를 쥐어짰다. 그러나 그런 방법이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가 해머를 한번 휘둘러보기도 전에 기계들은 이미 그에게 달려들어 그를 가격하고 있었다. 제이스가 로봇 군대의 강타에 쓰러지고 말았을 때, 그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빅토르의 시선을 느꼈다. 승리의 기쁨에 젖어 있을 줄 알았는데 빅토르의 얼굴은 의외로 슬퍼 보였다. 빅토르는 인류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서는 희생이 따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오랜 친구라 해도 제이스를 살려둘 수는 없었다. 수 많은 로봇들이 일제히 몰려와 제이스를 포위한 채 기계 팔로 그를 내리쳤다. 제이스는 도저히 그 틈을 빠져나올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제이스는 난생 처음으로 이런 저런 계산이나 전략 없이 몸으로 부딪혀보기로 했다. 그는 자신의 몸 하나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마지막 남은 힘까지 쥐어짜내 밀어 부쳤고, 기적적으로 로봇 군대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제이스는 환한 빛을 발하는 수정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최대의 마법공학 에너지를 끌어 모은 뒤 변신 해머로 강하게 수정을 내리쳤다. 수정은 산산조각이 났다. 수정이 파편이 되어 흩어지는 모습을 본 빅토르는 괴로워하며 비명을 질렀다. 수정의 폭발로 인해 발생한 충격파 때문에 건물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의 몸이 뒤로 튕겨져 나갔고 로봇 군대는 맥 없이 무너져 내렸다. 건물을 지지하고 있던 토대마저 흔들리기 시작했다. 제이스는 건물 전체가 무너지기 전에 가까스로 건물을 빠져 나왔다. 빅토르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필트오버에 도착한 제이스는 지도자들에게 빅토르의 사악한 음모를 알렸다. 위기의 순간에 신속한 판단력을 발휘한 제이스는 (오만한 그를 직접 만나보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만큼은) 영웅이 되었고 ‘미래의 수호자’라는 별명도 갖게 되었다. 제이스는 필트오버 국민들의 칭송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미래의 수호자’라는 별명만큼은 가슴 깊이 새겨두었다. 그는 빅토르가 어디선가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을 것이고, 머지 않은 어느 날 필트오버에 끔찍한 일이 닥칠 것임을 직감했다. ‘언제든 오너라, 기다리고 있으마.’ 제이스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 |
2. 즉석 발명품
빅토르가 언젠가 반격을 가하리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비범한 사람이라면 정확히 언제 그 역습이 시작될 것인지도 예측할 수 있었다. 물론 제이스는 후자에 속했다. 제이스는 유리천장을 통해 들어오는 따스한 햇볕을 쬐며 작업을 하고 있었다. 제이스의 작업실은 그가 손수 만든 천재적인 발명품들로 가득했다. 미끄러운 표면에도 단단하게 고정되는 기계 장화는 작업 중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만들었으며 로봇 팔이 달린 배낭은 작업자가 필요한 도구를 손쉽게 꺼내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개발했다. 물론 제이스가 만든 발명품 중 최고는 그가 들고 있는 해머였다. 슈리마 수정 조각을 동력원으로 쓰는 마법공학 변신 해머는 이미 필트오버 내에서 명성이 자자했다. 그러나 제이스는 해머를 고이 모셔두지 않고 다른 도구들과 마찬가지로 편하게 다뤘다. 날카롭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세 번 들렸다. 그들이 왔군. 제이스는 오늘을 위해 많은 준비를 했다. 빅토르의 로봇들을 작업실로 가지고 와서 연구한 결과 기계들이 소통하는 내용을 엿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그들은 곧 현관 문을 때려부수고 마법공학 해머를 강탈하려 할 것이다. 그런 다음엔 그의 뇌를 노리겠지. 물론 그들이 원하는 대로 될 리는 없었다. 제이스가 해머 손잡이에 있는 스위치를 켜자 해머는 에너지가 끓어오르는 듯한 굉음을 내며 마법공학 포로 변신했다. 그는 현관 문을 조준한 채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문이 열렸다. 제이스는 방아쇠를 꽉 움켜쥐었다. 하마터면 일곱 살짜리 소녀를 날려버릴 뻔 했던 순간이었다. 제이스 앞에는 작고 귀여운 금발머리 소녀가 서 있었지만 제이스는 냉랭했다. 소녀는 문을 열고 머뭇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제이스에게 다가오려고 발걸음을 떼자 하나로 묶은 머리가 앞뒤로 경쾌하게 흔들렸다. 소녀는 제이스와 눈이 마주칠까 봐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제이스는 소녀가 왜 그의 눈을 피하는지 추측해 보려 했다. 두 가지 가설이 가능했다. 온 국민의 칭송을 받는 영웅을 만난 것이 너무나도 감격스러워서 일수도 있고, 아니면 저 꼬맹이가 화학 폭탄을 지니고 있는 빅토르의 끄나풀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는 것을 보니 빅토르의 부하는 아닌 것 같았다. “팔이 고장 났어요.” 축 늘어진 금속 병사 인형을 내밀며 소녀가 말했다. 금속 병사의 팔은 뒤쪽으로 뒤틀려 있었다. 제이스는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당장 나가. 안 그러면 죽을 수도 있어.” 소녀는 제이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난 인형 따윈 고치지 않아.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이 아니거든. 딴 데 가서 알아봐.” 소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인형 고칠 돈은 없어요, 이건 우리 엄마가…” 소녀는 애써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만들어주신 거예요, 그런데…” 제이스는 눈살을 찌푸리고는, 부릅뜨고 있던 눈을 한번 감았다 떴다. “그렇게 소중한 걸 왜 망가뜨렸지?” “일부러 망가뜨린 게 아니에요! 진보의 날 축제에 데리고 갔는데 어떤 사람이랑 부딪히면서 떨어뜨렸어요. 그냥 집에 두고 갔어야 했는데…” “그래, 집에 두고 갔어야 했어. 멍청하긴.” 소녀는 뭔가 말을 하려고 입을 열려다 그 상태로 굳어버렸다. 제이스는 이런 반응에 익숙했다. 이제껏 그가 만난 거의 모든 사람들은 이미 그를 알고 있었다. 전설적인 변신 해머와 그에 대한 영웅담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제이스에게 위엄과 겸손 같은 덕목을 기대했다. 적어도 오만방자한 인물은 아니길 바랐다. 제이스는 본의 아니게 그들을 실망시켰다. “저한테 왜 그러시는 거죠?” 소녀가 물었다. “다들 내 성격에 문제가 좀 있다고 하더군.” 제이스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소녀는 얼굴을 찡그리며 고장 난 인형을 그의 코 앞에 들이밀었다. “고쳐주세요.” “어차피 또 망가뜨릴 거잖아.” “아니에요!” “이 봐, 꼬마 아가씨. 난 지금 엄청 바빠. 그리고..” 그 때, 유리 천장 위로 뭔가 휙 지나가며 제이스와 소녀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머리 위로 매가 날아갔다 보다’ 생각했겠지만 제이스는 달랐다. 그는 숨을 죽였다. 올 것이 왔다는 미소를 띠며 제이스는 소녀를 번쩍 들어 작업대 위에 올려 놓았다. “기계들은 매우 단순하지” 제이스가 말했다. 제이스는 크고 얇은 청동 판 하나를 찾아 그 모서리를 망치로 두드렸다. “그 놈들의 몸은 별개의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어. 그 부분들이 어떻게 결합되고 작동하는지 예측하는 건 식은죽 먹기야.” 그는 계속해서 망치로 청동 판을 두드렸고 납작했던 판때기는 어느새 둥근 지붕 모양으로 변해 있었다. “그렇지만 인간은 복잡한 존재지. 감정적이고 예측 할 수 없거든. 그리고 무엇보다 저 놈들은 나만큼 머리가 좋지 않아.” 그는 위가 볼록한 둥근 지붕의 정 가운데에 구멍을 뚫었다. “멍청이들과의 결투라…얼마든지 받아주지.” “제 인형 얘기 하시는 거예요? 아니면…” “저들은 자신이 열등한 것도 모르고 복수를 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어. 그러니 어리석은 실수를 하지.” 제이스는 둥근 지붕 모양의 청동 판을 들어서 미리 뚫어 놓은 구멍에 반짝이는 구리 막대를 끼웠다.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물건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제이스는 소녀의 금속 병사를 보며 말했다. 그러고는 완성된 청동 우산을 높이 들어 올렸다. “어쩌면 현관문이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내 작업실을 공격할 수도…” 그는 위를 올려다 보았다. “그러니까, 좀 더 재미있는 방법으로 쳐들어올지도 몰라.” 제이스는 소녀에게 우산을 건네주었다. 우산이 쓰러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소녀는 온 힘을 쥐어 짜내야 했다.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들고 있어.” 소녀가 알았다고 대답하려던 순간 유리 천장이 머리 위로 와장창 무너졌다. 소녀는 무서워서 비명을 질렀다. 임시방편으로 만든 우산 위로 유리조각들이 빗방울처럼 튕겨 나갔고, 대여섯 명의 남자가 위에서 뛰어 내렸다. 녹색 빛을 내는 화학물질이 담긴 관이 그들의 목에서 팔다리까지 연결돼 있었다. 초점 없는 퀭한 눈에 무표정한 얼굴. 빅토르의 부하들이 분명했다. 그들에게서는 의지가 엿보이지 않았다. 자운의 지하 동굴에서 빅토르는 온갖 실험을 했을 터였다. 온 몸이 화학물질로 오염된 저들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빅토르의 명령을 따를 것이다. 제이스는 로봇 군대가 오리라 예상했지만 그렇게 많은 로봇을 대동하고 필트오버를 몰래 침입하기는 어려웠으리라. 문제는 저 노예들도 로봇군대만큼이나 위험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제이스와 소녀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들이 제이스와 소녀에게 다가오려는 순간, 제이스는 마법공학 전기 에너지를 폭파시켜 적을 가격했다. 그런 다음 마법공학 에너지로 가득 찬 전류로 빅토르의 부하들 주변을 에워쌌다. 이내 전류 구체가 폭발하자 약에 찌든 빅토르의 노예들은 작업실 벽에 쿵!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빅토르, 갑자기 들이닥치는 전략은 이제 지겨울 때도 되지 않았나?” 그 때, 거대한 기계 괴물이 의식을 잃고 쓰러진 빅토르의 노예들 사이로 뛰어내렸다. 마치 반은 인간, 반은 소인 괴물 미노타우로스와 잔뜩 화가 난 큰 건물을 반씩 섞어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조심하세요!” 소녀가 외쳤다. 제이스는 주위를 살폈다. “저 놈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겁먹지 말거라. 내가 다 알아서…윽!” 소녀를 안심시키려는 제이스에게 금속 괴물이 달려들어 가슴팍을 들이받았다. 제이스는 뒤로 밀려나 바퀴가 달린 작업대 위에 털썩 주저 앉았다. 등에 금이 갔는지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금속 괴물이 다시 달려들려는 순간에 제이스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다시는 내 몸에 손끝 하나 대지 못할 거다.” 제이스가 말했다. 제이스는 있는 힘껏 마법공학 포를 휘둘러 다시 해머로 변신시켰다. 미노타우로스는 제이스를 다시 한번 들이받으려고 몸을 낮췄지만 어리석게도 자신의 주위를 둘러싼 둥근 모양의 공격 표식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해머는 굉음을 내며 표적을 내리쳤다. 미노타우로스는 바닥에 툭 하고 쓰러졌다. 시체에서 뿌연 연기가 쉬익- 소리를 내며 빠져 나왔다. 제이스는 해머를 들고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고개를 들어 유리 천장을 바라봤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기습 공격이 끝난 것을 알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고작 몇 분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작업대로 가려 했으나 통증 때문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제이스가 몸을 구부린 채 배를 움켜쥐자 소녀가 얼른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괴물한테 맞은 데가 아직도 아파요?” “아프고말고.” “괴물을 집에 들여보내지 말았어야 했어요. 멍청하시긴.” 제이스의 말투를 따라 하며 소녀가 말했다. 제이스가 소녀를 보며 눈썹을 치켜 올렸다. 겁 먹은 소녀는 너무 버릇없게 굴었나 걱정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이스의 입가에 서서히 미소가 번졌다. “이름이 뭐지?” “아마란틴이요.” 제이스는 작업대 앞에 앉아 적당한 드라이버를 하나 골라 잡았다. “인형 이리 줘보렴, 아마란틴.” 그가 말했다. 마침내 소녀의 입가에 함박웃음이 차 올랐다. “고치실 수 있어요?” 제이스는 소녀를 보고 씩 웃어주었다. “이 세상에 내가 못 고치는 건 아무것도 없단다.” |
3. 구 배경
영웅들은 가진 것도 많고 다방면에 능력도 뛰어나다. 2단 변신 해머를 전용 무기로 사용한다거나, 재치나 매너가 뛰어나다거나, 조국을 수호하겠다는 사명감이 투철하거나... 이 모든 걸 겸비한 매력남이 여기에 있다. 그의 이름은 제이스.
필트오버의 영웅이다. 제이스가 지금은 국가적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지만, 본래는 촉망받던 젊은 발명가였다. 필트오버 정부는 제이스에게 그 희귀하다는 '비전 수정'에 대한 감식과 연구를 의뢰했고, 그는 곧 수정을 이용하여 엄청난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에 제이스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수정의 힘을 자유로이 컨트롤하는 기계장비를 발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수정의 에너지가 어마어마하다는 소문은 자연스럽게 다른 나라, 다른 과학자들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으며, 이 소식은 오늘의 악당, 자신의 육체를 직접 기계화한 자운의 과학자, 빅토르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는 직접 제이스를 방문해 수정의 힘으로 인류와 기계를 융합하여 '영광스러운 진화'를 함께 이뤄내자고 제안했지만 가차 없이 거절당하고 만다. 그러나 처음부터 빈손으로 돌아갈 마음이 없었던 이 과학자는 손쉽게 제이스를 쓰러뜨리고 비전 수정을 강탈했다. 보안 병력이 실험실을 지키고 있었지만 어차피 허수아비 격이었으므로, 빅토르는 실험실을 불태워 버리고 유유히 자운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제이스는 필트오버 정부에 사건의 심각성을 알리고 대응을 촉구했지만, 정작 정부는 자운에 대한 공격을 주저했다. 그러나 지금 당장 반격을 가하지 않으면 비전 수정의 그 막강한 힘으로 인해 조국의 안전도 담보될 수 없었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제이스는 결국 자신의 손으로 이 일을 해결하리라 마음먹었다. 실험실로 돌아온 그는 연구와 개발, 실험에 열중한 끝에 필생의 역작인 머큐리 해머를 탄생시켰다. 강력한 무기도 들었겠다, 당당히 자운으로 향한 제이스는 혼자서 빅토르의 실험실에 공격을 가했다. 돌진해 오는 빅토르의 졸개들을 모조리 쓸어버리며 도착한 중앙 실험실에서 그는 마침내 빅토르의 발명품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역시나 비전 수정이 동력원으로 쓰이고 있었고 동력원을 파괴해야만 이 장치를 멈출 수 있었으므로 이를 막으려는 빅토르와의 대결은 이미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막상막하의 대결에서 두 과학자 모두 심각한 부상을 입었으나, 제이스는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어 수정을 가격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곤 산산조각난 수정과 함께 요란하게 폭발하는 빅토르의 기계들을 뒤로 하고 가까스로 실험실을 빠져나왔다. 필트오버의 국민들은 기진맥진한 채,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온 그를 영웅으로 추대하며 환대해 주었다. 비록 자신에게 쏟아지는 국민들의 애정과 관심은 기쁜 일이었지만, 이런 축하행사나 눈에 띄는 행동은 외부의 적들을 도발하는 일이란 점 역시 그가 모를 리 없었다. 그래도 제이스가 있는 한 필트오버의 전망은 밝아 보인다. 한평생 자신의 능력을 자국민들을 보호하는 데 쓰겠다는 남자. 제이스는 미래의 희망 그 자체이다. "우리가 영리하게 행동하면, 필트오버는 어떤 위협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 날 봐, 내가 바로 산 증인이라고." - 제이스 |